살인귀 후지코의 충동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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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소설에는 어렸을 때 가족을 잃고 결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결국 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창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받은 왕따와 학대, 가정폭력은 결국 그녀를 살인의 길로 이끌고 만다.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자신을 정당화하며 살인을 반복해 살인귀가 되어가는, 한때 장밋빛 인생을 꿈꿨던 11세 소녀. 무엇이 그 소녀를 전설의 살인귀로 만들었는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이야미쓰(イヤミス)’는 불쾌한 기분이 남는 미스터리를 가리키는 일본식 조어입니다. ‘싫다는 뜻의 이야(いや)’와 미스터리의 미스를 결합한 단어인데, 마리 유키코는 이 분야에 있어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판단이지만) 단연 톱클래스입니다. 지금까지 여자 친구’, ‘골든 애플’, ‘갱년기 소녀등 세 작품을 읽었는데, 말 그대로 어딘가 찜찜하고, 불편하고, 불쾌한 여운이 더 강했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번 더는 마리 유키코 작품을 읽지 않을 테야!”하면서도 알 수 없는 중독증 때문에 자꾸만 손이 가는 묘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제목이나 표지가 워낙 남의 시선을 끄는 작품이라 연휴를 맞아 방에 틀어박혀 읽었는데, 역시나 여러 번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살인귀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공포나 잔혹함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도 디테일하게 시체 훼손 과정을 묘사한 한두 군데를 제외하곤 대체로 아주 쿨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살인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히려 핵심은 살인귀가 된 후지코라는 여자의 파란만장한 연대기입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족과 학교에서 심각한 왕따와 폭력을 당하던 후지코는 일가족이 살해된 와중에 홀로 살아남아 이모의 손에 크게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남되, 절대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일념만 남은 후지코는 자신의 생존과 화려한 삶에 대한 동경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철저히 파괴합니다. 중학생 시절 부잣집 아들인 대학생과 몸을 섞으며 신분상승을 기도하는가 하면, 돈만 모으면 성형외과로 달려가 자신의 얼굴을 모조리 뜯어 고치기도 합니다. 끔찍한 가난과 추한 외모만 극복한다면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또래집단의 아웃사이더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속임수를 부리기도 하고, 자신의 약점을 알아낸 사람을 서슴없이 제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후지코의 삶은 점점 엄마의 그것과 닮은꼴로 진화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깨달은 후지코는 더더욱 포악해지고 동시에 희생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갑니다.

 

사실, 후지코가 바란 것은 행복입니다. 다만, 후지코에게 있어 행복은 어떻게 해도 채워지지 않는 무한대의 탐욕 그 자체였습니다. 후지코는 늘 자신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야.’라는 주문을 걸면서 자신의 탐욕을 합리화하고 절대 도달할 수 없는 행복을 위해 살인귀를 자처했습니다. 돈을 위해, 사랑을 위해, 행복을 위해 죄의식 없는 맹목적 살인을 불사한 후지코. 그런 살인귀의 일생을 지켜보는 일은 응원할 수도, 저주할 수도 없는 일이라 독자로서는 이야미스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며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소 작위적인 사족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의 백미라 지칭하는 대목은 서문후기입니다. 이 작품이 반전을 내포한 미스터리로 분류되는 것도 바로 서문후기때문인데 단순한 연대기처럼 읽혔던 앞선 내용들을 모두 뒤집어엎는 듯한 마지막 한 줄은 (저처럼 사족으로 여긴 독자 외에는) 꽤나 충격적으로 읽힐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CCTVDNA검사가 도입되기 전인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다 해도 후지코가 어떻게 경찰의 수사를 피해 수많은 살인극을 저질렀나, 라는 의문도 제기되지만 사실 그 부분은 이 작품에서는 굳이 리얼리티를 따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보다는, 불행한 유년기로 인해 행복에 대한 갈증이 극에 달했던 한 소녀가 어떻게 서서히 살인귀로 진화했으며, 그 갈증의 끝이 어떤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가, 라는 꽤나 암울하고 불편한 서사 자체에 몰입해서 읽어야 할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국내 출간된 마리 유키코의 작품 중 유일하게 안 읽은 작품이 고충증인데, 한동안은 읽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역시나 호기심이 생기는 것을 보면 마리 유키코의 이야미스의 늪은 무시무시한 흡인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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