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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외딴 성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서혜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등교 거부 후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던 중학교 1학년 여학생 안자이 고코로는
갑자기 환한 빛을 내뿜는 방안의 거울에 무심코 손을 댄 순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거울 속 세상은 서양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웅장한 고성이었고,
늑대가면을 쓴 어린 소녀와 고코로 또래의 6명의 남녀학생들이 고코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1년 남짓 그곳을 드나들 수 있으며 비밀열쇠를 찾으면 소원을 빌 수 있다는 늑대소녀.
오랫동안 부모 외에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고코로는
어딘가 삐딱하고 상처를 지닌 듯한 나머지 6명에게서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낀다.
또, 비밀열쇠를 찾아 소원을 빌면 자신의 고통과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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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교육’, ‘판타지’, ‘미스터리’ 등 츠지무라 미즈키의 전공들이 총출동한 작품입니다.
등교거부 중인 소녀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 다른 세상과 만나고
처음 만난 또래들과 갈등/화해하며 시간제한이 설정된 미션을 해결한다는 스토리는
언뜻 보면 해피엔딩이 보장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냄새가 감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림 형제나 안데르센의 예쁜 동화처럼 포장된 듯한 이 작품의 핵심 서사는
갈등을 이겨내고 힘을 합쳐 비밀열쇠를 찾아 아름다운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외딴 성에 오게 된 10대들의 비극적인 상처와 스스로 그것을 극복해가는 성장기입니다.
정체불명의 늑대소녀는 거울을 통해 성에 오갈 수 있는 건 9시부터 17시라고 알려줍니다.
고코로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다른 10대들 모두 등교거부 중이란 걸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꽤 많은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그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피합니다.
각자 누구에게도 털어놓고 싶지 않은 고통스런 사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친해진 뒤에도 좀처럼 속내를 털어놓지 않던 그들은
아키라는 소녀가 교복을 입은 채 외딴 성으로 들어온 사건 때문에 일대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등교거부 중인 10대’가 주인공이라면 ‘결국엔 학교로 돌아간다’는 엔딩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작품 역시 비슷하긴 해도 그 과정은 여타 작품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보통은 ‘학교와 가정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란 전제 하에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는 ‘싫으면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통해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과 인물에 대해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고
결국엔 ‘돌아가서 얼마든지 싸우겠다’는 자기 의지를 키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7명의 10대는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거울 속 외딴 성과 현실세계를 오가며
자신이 처한 상황들과 고통스런 싸움을 계속 이어갑니다.
그러면서, 현실보다 외딴 성에서의 시간을 더 행복하게 여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와도 쉽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자신들이
외딴 성에서 만난 또래들에게 친구이자 보호자 같은 안온함을 느끼게 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대 외에는 절대 성에 남을 수 없었고,
늑대소녀가 정한 날짜가 지나면 이 성에서의 기억이 모두 휘발된다는 사실 때문에
성 안의 10대들은 ‘영원히 이들과 성 안에 남고 싶다’는 것이 불가능한 소망임을 깨닫습니다.
결국 이 간절하고도 실현 불가능한 욕망으로 인해 성 안에 큰 파장이 일어나게 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비밀열쇠만이 해법임을 깨달으면서 이야기는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사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작품세계에 낯선 독자라면 꽤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고백하자면, 그녀의 작품을 5~6편 읽은 저로서도 그 당혹감은 거의 마찬가지였습니다.)
동화에 가까울 정도로 비현실적인 설정 속에 10대들의 등교거부라는 문제를 다루다 보니
독자로서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페이지를 넘겨야할지 무척 모호해지기 때문입니다.
‘동화 같은 판타지’로 여기고 읽자니 작품 자체를 너무 가볍게 대하는 것 같고,
‘10대와 학교의 문제를 다룬 미스터리’라 하기엔 비현실적인 판타지 서사가 신경 쓰이고,
무엇보다 고코로의 상처라든가 막판의 반전과 여운이 분량만큼의 임팩트를 갖추지 못한 탓에
왠지 어중간한 상태에서 마지막 장을 덮게 된 느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츠지무라 미즈키만의 특별한 코드들이 전부 버무려진 맛난 비빔밥 같으면서도
뭔지 몰라도 양념이나 재료 하나가 덜 들어간 듯한 허전함이 남은 작품이었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보기 드문 별미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비현실적인 시공간에 초대받은 등교거부 중학생들’이라는 특별하고도 인상적인 설정은
츠지무라 미즈키가 꾸준히 추구해온 10대와 학교와 교육의 문제를 다루기에
더없이 매력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의 산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다소 뻔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설정의 힘만으로도 신선하게 만든 필력이랄까요?
새삼 아직 못 읽은 츠지무라 미즈키의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가
어떤 캐릭터와 설정과 스토리를 담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