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늑대의 피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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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히데오, 사사키 조의 명품들 이후 오랜만에 제대로 된 경찰소설을 읽은 느낌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경찰-야쿠자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 작품인데,

성실한 경찰’, ‘야쿠자와 너무 친한 경찰’, 그리고 야쿠자가 작품의 세 축이기 때문입니다.

 

성실한 경찰히오카 슈이치는 히로시마 현 구레하라 동부서 폭력반에 배치된 신참입니다.

그는 배치와 동시에 야쿠자와 너무 친한 경찰오가미 쇼고의 파트너가 됩니다.

실적에 관한 한 군계일학이지만 그에 못잖게 징계도 수두룩하게 받아온 오가미 쇼고는

도무지 경찰인지 야쿠자인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미스터리한 인물입니다.

야쿠자에게 정보와 뒷돈을 받는 것은 물론 경쟁 조직의 궤멸을 돕기까지 하는 오가미를 보며

신참경찰 히오카는 야쿠자보다 더 야쿠자 같은 그의 행태에 몇 번씩 분노에 휩싸이곤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히오카의 눈에 점차 오가미의 위악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수사를 자행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의 행동과 말 어딘가에서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위화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견디다 못한 히오카가 야쿠자를 상대하는 형사에게 정의가 무엇이냐고 묻자

오가미는 예상도 못한 의미심장한 말을 건넵니다.

폭력단은 사라지지 않아. 우리의 임무는 야쿠자가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감시하는 일이야. 나머지는 도를 넘는 녀석들을 없애기만 하면 돼.”

 

말하자면, 모든 야쿠자는 박멸해야 한다는 히오카의 정의가 실현 불가능한 망상이라면,

현실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해 악의 부작용을 막는 것이 오가미의 정의인 것입니다.

실제로 오가미는 구레하라 시 전역에 야쿠자 간의 전쟁이 임박해오자

무조건적인 단속과 체포보다는 한쪽의 궤멸을 통해 전쟁을 막는 방법을 택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나머지 한쪽의 승리를 위해 열심히 분투합니다.

이쯤 되면 히오카는 물론 독자마저도 오가미는 어떤 사람?”이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응원해야 할 주인공인지, 야쿠자와 함께 박멸돼야 할 인지 경계가 애매해지는 것입니다.

 

그 혼란엔, 단골술집 마담 아키코가 들려준 오가미의 비극적인 과거사도 한몫 거드는데,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히오카는 어느 새 오가미의 정의에 감염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의 파트너가 되어 야쿠자의 전쟁을 막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전개와 반전이 일어납니다.

 

막판에 폭죽처럼 연이어 터지는 반전은 기시감이 드는 대목도 살짝 있긴 하지만

경찰-야쿠자 소설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긴장감과 속도감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고독한 늑대인 오가미의 정의가 구현되는 과정, 그의 피를 물려받는 히오카의 성장기,

그리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 벌어지는 야쿠자의 전쟁과 판세가 마무리되는 과정 등

다양한 서사들이 묵직한 여운과 함께 절묘하게 조합되며 클라이맥스를 장식합니다.

사실, 스포일러가 될 대목들이 많아서 이렇게 두루뭉술한 묘사밖에 할 수 없지만,

마지막 50여 페이지는 그야말로 폭주 그 자체라고 할 만큼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애를 먹었던 건 소화불량에 걸릴 만큼 많은 등장인물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여러 야쿠자 조직은 물론 경찰캐릭터도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데,

다 읽고 보면 4~5명의 주요 인물들에게만 집중했어도 된다는 걸 알게 되지만,

읽는 동안에는 모든 인물을 유심히 봐야만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의아했던 두 가지 의문은 모두 여성에 관한 것인데,

하나는 표지를 장식한 인물이 오가미도, 히오카도 아닌 정체불명의 젊은 여성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한없이 거칠고 폭력적인 세계를 다룬 이 작품의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입니다.

앞의 의문은 도무지 풀 길이 없어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뒤의 의문은 놀라움 그 자체라서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도 잘 믿기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성작가가 야쿠자 소설을 쓰지 말란 법도 없거니와 띠지에 작가 사진이 실려 있고,

이름이 유코(裕子)’임을 알고 봤는데도 읽는 내내 여성작가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거칠고 폭력적이면서도 리얼한 경찰-야쿠자 소설이라는 의미입니다.

 

2016년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을 비롯 다수의 수상과 노미네이트 경력을 보면

유즈키 유코가 보통 내공을 지닌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국내에는 2011년에 출간된 최후의 증인외에는 소개된 작품이 없어서 아쉽지만,

일본에서 이 작품의 후속작(‘불길한 개의 눈’)이 출간됐다는 정보는 무척 반가웠습니다.

고독한 늑대의 피가 호응을 얻어 유즈키 유코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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