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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평점 :
1999년 프랑스의 시골 마을 보발.
12살 소년 앙투안은 숲 속에서 우연한 사고로 옆집 꼬마를 죽이고 만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는 시신을 나무 둥치 구멍에 숨긴다.
이후 실종수사가 진행되지만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탓에 사건은 조용히 묻힌다.
12년 후, 앙투안은 비밀을 가슴에 묻은 채 의사가 되어 파리에서 살고 있다.
평온했던 일상은 그가 그토록 꺼려왔던 고향을 방문하게 되면서 깨어지고 만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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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만난 피에르 르메트르의 작품입니다.
제일 먼저 시도했던 ‘알렉스’는 도저히 번역을 따라갈 수 없어 중도에 포기했고,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지금은 ‘웨딩드레스’로 출간)는 꽤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당연히 스릴러라고 생각하고 읽은 이 작품은
스릴러의 외형을 띄고 있긴 하지만 본질은 ‘한 소년의 고통스러운 성장사’에 가깝습니다.
또, 어딘가 난해한 느낌이 드는 ‘사흘 그리고 한 인생’보다는
‘죄와 벌’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리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12살에 저지른 우발적인 살인과 시신유기,
그날 이후 언제 체포될지 모른다는 악몽과 공포에게 점령당한 12년의 시간들,
그 시간들이 흐른 뒤 잠시나마 장밋빛 미래를 꿈꿨지만 결국엔 맞이해야만 했던 파국,
그리고 뒤늦게 깨달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 등
한 소년의 ‘죄와 벌’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디테일하게 묘사한 작품입니다.
독자는 내내 모순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아무리 우발적인 살인이라 해도 시신을 유기하고 스스로 죄를 밝히지 않은 앙투안을 보면서
‘과연 우리의 주인공이 체포돼야 하는 건가, 무사해야 하는 건가’라는 딜레마를 겪게 되는데,
바로 이 모순된 감정과 딜레마 때문에 12년 후 앙투안에게 닥친 파국을 지켜보는 일은
독자로 하여금 꽤나 무겁고 착잡한 감정을 갖게 만듭니다.
동시에, ‘진정한 형벌은 무엇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도 자문하게 만드는데,
‘자유를 구속당한 수형자로서의 형벌’과 ‘몸은 자유롭지만 자아와 정신이 파멸되는 형벌’ 중
과연 어떤 것이 더 정의를 구현하는 형벌인지, 또 어떤 것이 더 가혹한 형벌인지,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쉽사리 답할 수 없는 이 자문은 꽤나 긴 여운을 남겨놓습니다.
300페이지 남짓한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앙투안이 겪는 악몽과 공포와 불안을 묘사하는데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어서
사건 자체만 추려놓고 보면 중단편에도 충분히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이런 ‘감정 중심의 구성’은 극도로 불안한 앙투안의 감정에 이입하게 만드는 힘은 있지만,
동어반복 또는 ‘강요된 감정’처럼 읽히는 아쉬움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나름 막판에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진실들이 쏟아지면서 반전의 묘미도 전해주곤 있지만,
초중반에 지나치게 강조된 앙투안의 심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과유불급’이었던 탓에
이 작품의 미덕이 많이 가려졌다는 게 저의 솔직한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