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 지하철에서도 읽고, 점심 먹고 남은 시간에도 읽고, 누군가를 기다리면서도 읽고, 아주 가끔은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책을 읽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익숙한 독서시간은 야심한 밤 내 방에서 앞쪽에 스탠드 불빛을 두고 책을 읽을 때이다. 이 때만큼은 하루의 피로를 잊고 나만의 세계로 편안히 몰입할 수 있다, 와 같은 말로 맺는 것이 정석(?)이겠지만 사실 상황은 그리 편안하지 못하다. 책상 위에 포터블 작업대를 떡 허니 올려 놓는 바람에 책상에서 책을 읽지 못하고 침대 위에 엎드려 읽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엎드려서 읽다 보면 팔이 저려오고 어깨와 등쪽 날개 뼈에도 부담이 간다. 이렇게 한 시간 정도, 혹은 그 이상 책을 읽다 자면 다음날 아침 반드시 근육통이 찾아온다. 이건 뭐, 독서력이 아니라 근력을 키우는 것 같다.

 

하지만 불편한 자세임에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 읽은 책들이 있다. 거참, 불편한데 익숙해지고는 있단 말이지…그런데 돌이켜보니 그런 책들을 읽었음에도 리뷰를 꿀꺽! 해버렸다. 나름 독서 후유증으로 인한 체력저하 때문이라고 ‘변명’을 해보기도 하지만 조금 찔린다. 하여, 이젠 올해도 반이나 지났겠다, 더 더워서 귀찮아지기 전에 몇 권만 골라 빨리, 간략히, 한꺼번에 마무리 해본다.^^

 

 

 

 

   <위풍당당>


성석제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부터 ‘입담’이라든지 ‘이야기꾼’이라는 수식어를 익히 들어 무척 궁금했던 작가인데, 올 봄 유독 노란색에 홀려버리는 바람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노란색 표지의 책을 거의 연달아 4권이나 읽었다). 결론은? 입담. 인정한다. 물론 겨우 작품 하나를 가지고 그의 입담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결론 내릴 처지는 못되지만 적어도 <위풍당당>에서의 입담은 무척 능청스러웠다, 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의 능청스러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싶으면 바로 이 책의 표지를 보면 된다. 얼핏 보기엔 고풍스런 산수화처럼 어엿한 품세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에서 발전소와 양옥마을을 눈치챌 수 있다. 순간, 호연지기 충만한 산수화의 이미지는 뿅~!하고 증발하고, 문명에 오염된 산골마을의 현실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문장의 서사도 마찬가지이다. (각 장의) 처음엔 잔뜩 폼을 잡아 진지하고도 장엄한 입담으로 시작하곤 하지만 결국엔 어떤 찌질함과 맞부딪히는 것, 그래서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며 하찮은 인간과 마주하게 하는 것, 그것이 그의 입담이 가지고 있는 ‘척하다가 뒤통수치기’ 기법이었다.

 

<위풍당당>은 간략히 말해 각자의 가족에게서 상처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식구’라는 이름으로 단합해 조폭에 대항하는 이야기이지만(그리고 그밖에 정치적 부도덕과 생태계에 관한 메시지가 내포된 이야기지만), ‘인생이여, 고마워요’라는 마지막 장의 제목을 보니 결국 작가는 ‘연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모든 소제목들이 그렇지만 사실 ‘인생이여, 고마워요’는 노래 제목으로, 특히 이 곡은 아르헨티나의 국민가수 소사의 노래(원래는 비올레타 파라의 곡)였기 때문이다. 군부 독재시절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희망이 되었던 <인생이여, 고마워요>. 그들의 노래는 바로 (그리고 아직도) 우리들의 노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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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어서
나에게 준 두 개의 밝은 별
그것을 열면
흑과 백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으니까
높은 하늘 깊이 별들이 보이고
군중 속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네요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어서
나에게 준 귀로 전부 새겨 넣게 되는
밤과 낮의
귀뚜라미와 카나리아 소리
망치 소리와 물레방아 소리, 공사장 소리와 소낙비 소리
그리고 마음 깊이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러운 목소리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어서
나에게 소리와 문자를 주어서
내가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할 수 있는 언어를 주어서
어머니 친구 형제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영혼의 길을 비춰줄 빛을 주어서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어서
힘차게 뛰는 심장을 주어서
인간의 두뇌가 이룩한 성과를 보며
선이 악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게 해주어서
그의 맑은 눈 깊은 곳에서 내 시선이 가 닿게 해주어서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어서
웃음을 주고 눈물을 주어서
덕분에 행복과 슬픔이 구별되고
그것들이 내가 노래를 만드는 재료
당신들의 노래, 그것도 같은 노래, 모두의 노래
그것은 나 자신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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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의 아이들 1,2>


입담에 있어 한 술 더 뜨는 사람이라면 인도의 작가 살만 루슈디가 있다. 그의 입담은 마치 덩굴줄기처럼 넘실대며 증식하여 마침내 읽는 사람이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나를 알려면, 나 하나를 알기 위해서는, 당신도 나처럼 그 모든 인생을 먹어치워야 한다.(p.26)'는 엄포로 시작하는 이 책은 뭐라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아주 진부하고 대책없는 표현이지만 저절로 이런 감탄사가 튀어나오는 것을 막을 순 없다. 균열에 맞서 모진 호흡을 이어가는 주인공 살림 시나이처럼 이야기는 여간 해선 끝을 양보하지 않으려 하며, 정작 끝이 나려 할 즈음엔 읽는 사람이 오히려 그 끝을 거부하고 싶어진다.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는 이야기, 영원히 숨죽이며 읽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 <한밤의 아이들>인 것이다.

 

<한밤의 아이들>은 격정적인 인도의 현대사를 해방둥이 살림 시나이의 인생과 병치해 이끌어가고 있는데, 해방을 겪은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유사한 점이 많아 단순히 먼 나라 인도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았다. 해방이 희망과 안녕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혼돈과 분열의 계기가 되었던 역사, 그리고 식민 지배자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채 허울뿐인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살림은 새 바람을 몰고 올 차세대의 지도자가 아니라 이 모든 업보를 짊어져야 할 희생자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살림은 자신의 한 많은 삶을 공들여 피클로 저장한다. ‘먹어치워야 한다’는 말이 이유 없는 은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피클은 상당히 커다란 의미가 있다. 우리로서는 피클을 이태리나 미국 같은 서구 음식으로 생각하지만 인도 역시 피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클은 단순히 삭히고 저장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닌 인도 고유의 무엇(우리로서는 김치와 같은)이며, 그 피클에 살림의 삶을 절여 담는다는 것은 후대에게 간절히 가 닿고 싶은 역사의 메시지일 것이다.

 

이 책은 이후에 영화로도 제작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기억에 의하면). 대체적으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잘 보지 않는 편인데, 이 책만큼은 영화로 나오면 꼭 보고 싶다. ‘역사’를 많이 언급해서 복잡하고 어려우리라 예상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판타지적 요소가 있어 더 매력적이고 풍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다시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책, 다시 읽게 되면 리뷰를 꼭 써야지.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사실 마르크스에 관한 입문서를 신간으로 읽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기존 입문서에도 꽤 괜찮고 잘 알려진 것들이 있어 이른바 스테디 셀러 중 하나를 선택하고 다음엔 곧장 데이비드 하비를 읽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를 주목하게 된 것은 이 책이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의 저자 우치다 타츠루의 책이기 때문이었는데, <푸코...>에서 그가 보여줬던 명쾌하고도 친절한 설명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던 거 같다.

 

이 책은 우치다 타츠루와 그의 지인 이시카와 야스히로가 서신을 교환하는 형식을 통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시카와가 마르크스 저서들을 하나 하나 소개하며 핵심 내용으로 '기초'를 정리하는 역을 맡았다면, 우치다는 해당 저서의 내용에 개인적인 인문학적 사유를 보태 '확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르크스의 사상을 정리하고 이에 더해 자신들의 의견을 토론하는 모습은 청년들이 마르크스를 읽으며 실천했으면 하는 그들의 제안인 동시에 솔선수범인 듯하다. 뿐만 아니라 두 노 교수가 신나게 마르크스에 몰두하는 것에서 풋풋한 청년의 열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은 사실 마르크스를 읽기 위한 '본격 입문서'라고 소개하긴 곤란하다. 문 앞에서 친절하게 손잡이를 돌려주는 도우미 같다고나 해야할까? 따라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필요 하겠고, 다만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했던 (내용 이외의) 몇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마르크스를 읽으며 사회를 보는 시각을 달리하자는 것, 그리고 마르크스를 읽을 때는 그의 생애에 걸친 발전을 고려하며 저서마다 '시기'를 알고 읽어나갈 것, '시기'에 주목해 읽되 구체화되거나 더해지는 개념들을 염두하며 읽을 것, 마지막으로 저자들처럼 읽은 것을 통해 사유를 확장하고 서로 의견을 주고 받으며, 의견을 주고받을 때는 누가 옳다 그르다 편을 나누지 말 것 등이다. 그들은 특히 똑같이 마르크스의 사상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관점을 내세워 논쟁과 편가르기에만 열을 올렸던 기성세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았다. 이 멋진 두 분의 뜻을 위해서라도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어봅시다.
 

 


<무조건 살아, 단 하나의 삶이니까>


이 책은 평소 ‘휴먼스토리’나 ‘성공스토리’와는 무관해 보이는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이라 호기심에 클릭했다가, 그만 북 트레일러를 보고 깜짝 놀라 읽게 된 책이다. 세 살 때 부모에게 버림받고, 다섯 살 때 고아원에서 탈출, 그 때부터 껌팔이로 전전하며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결국 자신의 꿈인 성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한 청년의 이야기. 너무도 소설 같은 삶이기에 오히려 사람들에게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그래서 진실을 글로 새겨 보여줘야 했던 파란만장의 결정체. 이것이 바로 <코리아 갓 탤런트>의 스타 최성봉의 삶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젠 그리 대단하다 싶은 삶도, 비참하다 싶은 삶도 없는 것 같았는데, 이 청년의 이야기를 읽으니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간다. 그리고 ‘무조건 살아’라는 단순한 한 마디도 몇 번의 자살을 시도했던 그의 외침이기에 더욱 간절하고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정말 그는 무조건 살았고, 무조건 살아야 했다. 무조건 살기 싫어 죽으려 했지만 무조건에는 엄청난 가속도가 있어 삶을 멈추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 유일한 희망이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무조건의 힘을 다시 한 번 믿어봤으면 좋겠다.

 

나는 일년에 한 두 번쯤 누군가의 인생에 대한 책을 읽게 되는데, 신경 쓰고 챙겨 읽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꼭 그렇게 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문득 깨닫는 것은, 누군가는 몇 십 배나 더 큰 불행을 가지고 태어나 그것을 몇 백배나 더 큰 행운으로 만들며 살아간다는 것. 그래서 사소한 불만들이 부끄러워진다는 것. 마지막으로 인생의 종점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다는 것. 

 

 

 

이 밖에도 약 10권의 책이 나의 밤을 삼켰고, 나는 그 책들을 삼켜버렸지만 지난 6개월간 함께했던 책들과의 시간은 내 안에 고스란히 함께할 것이라 믿는다. 이젠 가급적 읽은 책들은 그 때 그 때 정리해야지. 가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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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7-03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편한건 사실인데, 그래도 침대에서 책읽기는 포기할 수 없어요. ^^ 엎드려서 읽다가 어깨 아프면 또 자세 바꿔서 읽고 또 앉아서도 읽다가 누워서도 읽다가 말이죠. 덕분에 저도 요새 근육통에 시달려요.하하 ^^;

앗. 안그래도 <위풍당당> 장바구니에 넣어놨는디요. 책표지에 그런 숨은그림찾기가 있었단 말이군요. 음..이런 뒷통수치기는 아주 통쾌한데요.

탄하 2012-07-04 13:01   좋아요 0 | URL
저만 근육통이 오는 것이 아니군요. 그래도, 맞아요..포기할 순 없죠?^^

<위풍당당>의 핑크색 띠지를 벗겨보면 제가 말씀드린 부분이 있어요.
이 책은 유쾌한 입담이 즐겁긴 한데, 호기심을 유발+유지하는 면에서는 그럭저럭이네요.
뭐랄까, 구성이 치밀하게 짜인 건 알겠는데 그게 다 드러나 보여서.^^
하지만 노랫말과 함께 읽어보면 어떨지 모르겠네요. 저는 다 찾아보진 못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