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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나랑 노랑 - 시인 오은, 그림을 가지고 놀다!
오은 지음 / 난다 / 2012년 3월
평점 :
만일 이 세상에 오직 단 하나의 색깔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루했을까? 답답했을까? 장엄했을까? 아니면 재밌었을까? 모르긴해도 한 시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온통 한 가지 색인 세상이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하나의 색깔에 이렇게 많은 의미와 느낌과 사연을 담을 수 있는데 어떻게 지루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빨강만해도 열정, 사랑, 공포, 혁명, 용기, 관용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묘하게도 사랑-공포 처럼 매우 이질적인 단어들이 하나의 빨강 안에 공존한다. 이것은 빨강뿐만이 아니다. 다른 색에서도 유사한 의미, 이질적인 의미, 문화로 인해 부여된 특별한 의미들이 함께하며 색이 가진 속성들을 만들어간다. 어디 그뿐일까? 만일 세상에 색이 하나뿐이라면 사람들은 색을 요모조모 탐구하며 그 색으로는 불가능한 속성까지 기어이 발명해 내려고 했을 것이다. 파랑인 세상이 너무 춥게 느껴진다면 파랑으로 뜨거움을 느낄 수 있는 형태를 고안해 냈을지도 모르고, 노랑인 세상이 너무 명랑하다면 노랑을 통해 우울함까지 느낄 수 있도록 빛을 더 연구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에 살게 될리는 만무하지만 어쨋든, 하나의 색에 몰두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색에 대한 생각을 무한히 확장시켜주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시인은 화가가 부러웠나보다. 사람이란게 때론 나의 재주보다는 타인의 재주가, 나의 도구보다는 타인의 도구가 더 멋져보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시인은 색이 되고자 했고 만날 색과 놀았다. 어떤 날은 빨강이 되고, 어떤 날은 초록이 되고, 어떤 날은 칠흑같은 검정이 되면서...시인은 점점 색에 동화되어 버렸다. 색에 동화되고 나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색을 알 수 있었다. 이젠 색의 움직임, 색의 무게, 색의 성깔까지 모두 통달해 감정이입의 최고봉에 이른다. 그러나 여기서 그칠 것인가! 시인은 더 욕심을 부렸다. 그는 그림 속으로 홀연히 스며들어가 그림에 그려진 사물이 되고, 인물이 되었으며, 마침내 화가의 마음에 진입, 그가 가진 삶의 추억과 화가로서의 번민에 자신의 가슴을 가만히 포개본다. 마치 어떤 사물에 다가가면 자신도 그 색과 똑같은 색이 될 수 있는 카멜레온처럼, 시인은 색깔뿐만 아니라 화가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동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너랑 나랑 노랑>은 그렇게, 너와 나와 그것이 하나가 되어가는 가운데 탄생한 이야기이다.
처음엔 깜빡 속았다. 슬며시 화가로 위장한(?) 시인 때문에 화가의 속마음, 화가의 부치지 못한 편지, 화가와의 인터뷰가 모두 온전히 화가의 것이거나 미술사료에서 발췌한 것이라 착각했다. 물론 이것은 그림에 눈이 팔려 서문을 읽지 않은 나의 실수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문을 읽었다하더라도 카멜레온처럼 숨어있는 시인을 쉽게 발견하진 못했을거다. <너랑 나랑 노랑>은 시인이 색과 그림과 화가의 내면으로 잠입해 그 안에 있는 숨겨진 이야기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창작형태로 표출한다. 때론 그것이 편지가 되기도 하고, 때론 모노로그처럼 들리는 자서전이 되기도 하고, 때론 시로, 때론 메모로, 인터뷰로, 희곡으로, 자유자재로 변하지만 중요한 것은 표출된 형식 자체가 아니라 실험적인 형식을 통해 깊어가는 색의 감성에 있다.
만일 클림트의 <키스>를 감상하며 시인이 적어 놓은 노랑의 사연을 읽는다면 yellow의 [-ou]발음이 반복되는 동안 진정 천천히 흐르는 노랑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천천히 흐르는 노랑은 다른 그림에서의 노랑이 아니라 오직 클림트의 <키스>에 해당된다. 시슬레의 <루브시엔느의 설경>을 표현한 시를 보면 여백을 가득 메웠다 이내 사라지는 눈송이의 운명을 '눈','물','빛'의 조합으로 이야기한다. 감성은 물론 형태와 과정(눈이 녹는 과정)까지 묘사하고자 했던 이 시는 눈으로 침입하는 빛과 사라지며 반짝하는 눈을 동시에 느낄수 있고, 그 내부의 가장 중앙에 있는 '물'('눈물'로 읽히게 하는)을 통해 풍경의 중심이 되는 애잔한 슬픔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늘 풍경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화가 시슬레의 순수한 마음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밖에도 슬며시 미소짓게 하는 시도는 시인이 반 고흐가 되고자 했던 흔적이다. 시인은 감쪽같이 '내 동생 테오'를 부르며 마치 자신이 고흐인 양 편지를 쓰고 있다. 하긴, 스스로의 열정을 견디다 못해 귀를 잘라버린 광적인 천재, 살아 생전 많은 편지를 남겼던 반 고흐이니 글을 쓰는 시인으로서 꼭 한번은 감정을 이입해보고 싶은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시인이 들려주는 색과 그림과 화가의 이야기는 색다르다. 아니, 색같다.

<너랑 나랑 노랑>이라는 제목을 보면 이 책이 무척 따스하고 경쾌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마도 세번이나 혀 끝을 튕겨주는 'o'과 '너랑 나랑'에서 느껴지는 유대감과 노랑이 가진 밝은 색채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정작 글들을 읽다보면 그리 경쾌하지만은 않다. '갈기갈기 ?어지는' 초록이나 '희미한' 하양, '불길한' 빨강처럼 색깔들은 저마다 음(陰)의 요소를 발산한다. 색에 빠진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색이 가진 명랑하고 아름다운 속성을 너머 그것의 맨 밑바닥에 숨겨진 슬픔과 추함까지 감싸안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시인은 뭉크의 <키스>로부터 색깔 여행을 시작했다. 가장 황홀하고 아름다운 키스가 칠흑같은 검정으로 둘러싸인 그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다른 어떤 색깔보다 검정을 소개해 보고 싶다. 세상의 모든 색을 다 삼켜버린 잔혹한 검정에는 어떤 사연들이 담겨있을까? 뭉크의 <키스>는 안락한 검정을 말하지만 이것은 죽음의 안식을 갈망하는 화가의 심리를 반영한다. 그리고 시케이로스의 <절규의 메아리>는 고달프고 처절한 혁명을, 로드첸코의 <검은색 위의 검은 색>은 야심찬 단단함(말레비치의 흰색에 대항함)을,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는 엄격한 단정함을 각각 나타내려고 했다. 여기서 <화가의 어머니>는 화가의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희곡을 통해 그 깊은 속내를 묘사하고 있는데, 매우 짧은 모노로그지만 기다림의 시간을 버텨 온 한 여인의 한을 잘 표출해 주었다. 이처럼 <너랑 나랑 노랑>에는 하나의 색끼리 비교해보는 재미과 그것으로부터 뻣어나온 문학적 상상을 음미하는데 즐거움이 함께한다.

색의 내면으로 시작해 그림의 내면으로, 화가의 내면으로 천천히 이동하며 여섯가지 색깔 각각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을 끌어올린 시인은 여느 그림감상이나 그림해설보다 다채롭고 진지한 생각들을 보여주었다. 이제, 세상이 온통 한 가지 색으로 물든다해도 절망할 사람은 없겠지. 그땐 우리 모두 시인이 되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