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세계의 소시민에게 몽골이란 푸른 초원이 펼쳐진 머나먼 고원지대에 불과했다. 가끔 어린이 후원단체 같은 곳에서 카탈로그를 보내오면 오늘날 몽골인들은 이렇게 살아가는구나,하며 다 해어진 그들의 옷소매를 통해 삶의 편린을 엿볼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일상을 스쳐가는 무수한 정보의 일부일 뿐, 마지막 커피 한 모금과 함께 덮어버리고 나면 그만인 것이 대개 이런 카탈로그들이 받는 대우였다. 그러던 어느날 몽골이 갑자기 성큼 다가왔다. 바로 사진가 김홍희의 작품들을 통해서였다. 푸른 초원이라는 잘 포장된 모습이 아닌 현실의 몽골, 메마른 땅이 끝없이 펼쳐지고 어두운 구름이 드리워지기도 하는 그곳을 나는 너무도 생생히 보게 된 것이다. 뿐만아니라 사진 속의 몽골인들은 더이상 푸른 초원을 말달리던 칭기즈칸의 후예인척 하지 않았다. 그들은 황량한 사막에 가판대를 설치했고, 대지에 발전소를 심었으며, 점퍼와 츄리닝 차림으로 당구를 치거나 벽에는 포르노 포스터를 붙여놓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조드>가 광야의 중세를 그리려고 했다는 점은 무모한 도전처럼 보일수 있겠지만 아직은 선량함 남아있는 몽골의 눈망울들에게 커다란 힘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작가정신이 나로 하여금 <조드>라는 기나긴 여정의 첫머리를 출발하도록 재촉했다. 문명화와 서구화를 동일시하는 이 시대에, 그리고 이제 그에 대한 반성이 일고있는 시점에서, 작가가 칭기즈칸의 몽골을 통해 글로써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는 상당히 전염성 강한 메시지였던 것이다.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자고 말하기는 쉽지만 그에 값할 '인류사 상'을 얻기는 어렵다. 낡은 역사관을 대체할 그림이 있어야 새로운 역사관이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보다 바른 세계사 상(像)'을 찾으려는 노력에 나도 동참하고 싶었다. 소재가 국경을 벗어난 점도, 시대적 배경이 먼 것도 개의치 않았다. 가톨릭과 비(非)가톨릭 정신이 각축하는 성곽의 중세가 아닌, 이동문명과 정착문명, 농경민과 유목민의 충돌을 야기한 광야의 중세를 그리려는 의지는 21세기 정신의 산물이다. 특히 근대적 가치관이 주목하지 못한, 보다 광활한 세계에 부합하는 인간형을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작가의 말 中)

 

 

 


광야의 신화
광야의 신화는 하늘에서 떨어진 조그만 연못이 자라 아주 큰 호수가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천 개의 물방울이 모여 하나가 되고 그 하나가 다시 천개로 모이는 유기적 창조의 과정은 말씀의 권위로 이레만에 완성된 서구의 천지창조와 대조를 이루며 희미해진 이 땅의 신화를 다시 세우겠다는 의지로 비춰지기도 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할법한 전래동화가 도란도란 피어날 즈음이면 마치 할머니의 무릎에 기대어 졸듯 꿈결같은 옛 이야기로 빠져든다. 그리고 꿈보다 더 달콤한 이야기 속에서 고운 백조와 사냥꾼을 만나고, 늑대족과 사슴족의 사랑을 목격하며, 민담을 갖겠다던 외눈박이의 순박함에 웃음 짓는다. 그래, 그 위대한 칭기스칸은 용이 꿈틀거리고 천지가 개벽하며 나타난 인물이 아니더란 말이지...문득 "유목민인 칭기즈칸의 제국주의는[...]소유하고 점령하는 게 아니라 소통하고 통과해 가는 것이 몽골의 방식이었습니다"라는 작가의 변이 떠오른다. 모든 신화에서 말해주는 것이 사랑이요, 바보와 외눈박이의 어진 마음이니 이후 칭기즈칸이 품은 뜻도 여기서 비롯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뿐만아니라 고운님이라는 뜻의 알랑고아가 달빛과 한 몸이 되어 만들어낸 자식, 강인한 땅의 생명력을 지닌 여인의 몸에서 하늘의 음기를 취해 태어난 자식의 후손이니 태양처럼 군림하는 칭기즈칸이 아니라 극복하고 소통하는 칭기즈칸의 모습이 예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처럼 <조드>가 그리는 칭기즈칸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던 서구적 카리스마의 전형과 다르며, 바로 이 점이 몽골을 비롯한 동방인들에게 재조명되어야 할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혈흔을 닦는 시심(詩心)
전율을 할만큼 한바탕의 거친 싸움이 있었다. 바로 자무카의 말 무리를 공격하는 늑대 무리의 보복전이다. 너무도 치밀한 전략이 잔인함을 더 도드라지게 하는 이 싸움은 도저히 동물간의 육박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지혜롭고 영악했으며 때론 비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말이든 늑대든 우두머리들이 가진 리더십과 자식애에서 훗날 벌어질 유목민들간의 전쟁이 그려지기도 했다. 유목민들도 분명 이들처럼 뼈마디가 바스러지고 내장이 짓밟히는 가운데 자신의 영역과 자식새끼들을 지키려 안간힘을 썻으리라! '흰머리를 풀어헤친 귀신 바람이 불던 날' 설원 위에 펼쳐진 말 무리와 늑대 무리의 육박전은 강렬하다 못해 장렬하기까지한 싸움이었다. 그래서인지 안전지대인 헤를렌 강변에 도착해서도 이 느낌이 쉬 가라앉지 않는다. 흰머리 바람으로도 지울 수 없었던 붉은 혈흔이 비로소 스러지기 시작했던 시점은 바로 자무카의 입에서 시(詩)가 흐르는 순간. 그는 자신이 이끌던 말 무리를 도와준 이가 사라진 의형제 테무진(훗날 칭기즈칸)임을 알고 변함없는 우정을 시(詩)에 담아 노래한다. 헌데, 이 거친 사내의 시(詩) 한 수가 강렬한 싸움의 서사보다 더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유를 분별하려는 세세한 마음에서 뚜렷한 단어를 짚어내긴 어렵지만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은 <조드>의 서사가 시심(詩心)에 힘입어 때론 신비한 전설로, 때론 순수한 동심으로, 때론 달관의 지혜로 촉촉하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투가 휩쓸고간 자리를 위로해주는 나직한 노래가 된다.

 

 


흰뼈와 검은뼈의 우정
가문을 세운 여자 알랑고아의 막내 아들 보돈차르 몽학의 직계 혈통. 사람들은 이들을 황금가문의 흰 뼈라 불렀고, 직계가 아닌 혈통을 검은뼈라 불렀다. 테무진은 흰 뼈 출신이며 자무카는 검은 뼈 출신. 이들의 우정을 다룬다는 것은 아직도 '계급혁명' 외에 별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한 우리들에게 그 벽을 해체해 보이려는 야심찬 시도로 다가온다. 그래서 서로를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봤다던 테무진과 자무카의 관계에 주목하게 되는데, 귀족출신으로 평민인 자무카와 의형제를 맺는 테무진은 마음가짐부터 이미 남다르다. 오늘날로 치면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더 중요시했던 테무진, 즉 칭기즈칸의 자세는 문득 하늘은 높은 것이 아니라 넓은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며 이후 넓은 하늘이 지나게 될 우정과 갈등의 해법이 어떤 것일지 사뭇 기대를 걸게 된다. 서로 지문을 보여주고 서로의 운명을 엿본 두 사람, '태어나는 곳은 달라도 묻히는 곳이 같기를'맹세하는 두 사람에게서는 신분의 경계를 허물고자하는 인간으로서의 의지가 결연히 흐르기 때문이다. 만일 이 맹세가 이뤄진다면 언젠가는 하늘이 땅 위에 있지 않고 그저 평행으로만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를 우리는 희망해도 좋을 것 같다.

 

 


조드와 칭기즈칸의 길
850년전 대자연이 다스리던 몽골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격한 세계로 다가온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겨울의 서식지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매섭게 몰아치는 혹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몽골에서는 그 너른 땅에 어린 추위가 움터 젊은 추위가 되고, 다시 늙은 추위로 이어지기까지 기나긴 겨울이 계속된다. 조드 또한 이 겨울의 출신으로, 한겨울 유라시아 내륙에 몰아닥치는 혹독한 추위를 의미하는데, 조드가 밀어닥치면 초원은 초토화가 되고 목숨이 달린 것들은 제아무리 인간일지라도 죽음의 문턱에서 발버둥치게 된다. 살아남을 길은 오직 서로 뭉치는 것. 이는 거룩한 어머니 알랑고아가 화살 다섯대를 묶어 일러준 교훈이었다. 그리고 어린 테무진이 칭기즈칸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여정도 신화속에 고이 간직된 어머니 일랑고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길이었을 뿐, 누군가를 정복해 제국을 이루려는 것은 그의 꿈이 아니었다.


"죽음의 땅을 벗어나 다른 장소로 가고 싶은 것, 그걸 가로막는 장애물을 뛰어넘은 게 칭기즈칸의 정복의 이유가 아닐까"


작가의 깊은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테무진을 칭기즈칸으로 키워낸 원동력이 조드라는 신선한 해석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단지 자연의 순리에 따라 극복할 고난은 뛰어넘고 품어야 할 생명들은 감싸안았으며 함께할 동지들과는 화살대처럼 나란히 힘을 포갰다. 그러는 사이에 칭기즈칸은 하늘과 땅,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소통자가 되었다. 다시 쓰는 몽골의 역사에서 그는 소유라는 상하의 축이 아닌 소통이라는 백방의 축으로 화(和)한 것이다.

 

 

 

 

서구화의 물결이 침투한 몽골의 사진을 보며 잠시 상상에 젖어본다. 지금도 몽골의 광야에서는 열두 가지 바람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도 타인의 불에 예를 갖춰 건드리지 않으며, 모든 가축이 생명의 존엄성을 알고 그것에 경외심을 가진 자의 손에서 죽어야 할까? 그리고 지금도...수분없는 눈보라가 말발굽 아래 부서져 쉬 가라앉지 않는 그 진기한 풍경들을 볼 수 있을까? 물론 나는 정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칭기스칸의 몽골이 되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왜냐고 묻는다면 푸른하늘이 내린 아이의 마음을 잠시 훔쳐봤던 설렘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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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5-09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홍희..찾아봤어요.
김홍희 작품집 먼저 읽고나서 다시 댓글 달아야겠어요.
ㅎㅎ 분홍신님 포스팅은 댓글 예고를 제가 자꾸 하게 되네요. 분홍신님 포스팅 글이 좋아서 그런거 같애염. ^^

탄하 2012-05-13 11:19   좋아요 0 | URL
하하, 댓글 예고편이라..
이거, 달사르님께서 신개념을 만들어 놓고 가셨군요.
김홍희님의 사진이 너무 좋아서겠지요.^^

이분 작품집 볼만 해요.
글까지 쓰신 책도 있는데 매우 감성적이시기도 하구요.
달사르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달사르 2012-05-27 22:33   좋아요 0 | URL
ㅎㅎ 작품집 멋지더이다. 첨에는 뭐이래? 이랬다가 몇 번을 다시 보고 또 보니 점점더 작품집이 좋아지던데요? 작가해도 되겠다, 란 생각이 들 정도로 글도 좋았구요. 분홍신님 덕분에 좋은 책 만났어요. ^^

탄하 2012-05-31 22:59   좋아요 0 | URL
에헤, 덕분은요..^^
이분, 김홍희님, 외모는 꽤 카리스마 있어 보이시지만 글은 참 가슴을 저리게 해요.
제일 처음 읽은 책이 <나는 사진이다>였는데, 작품만 김홍희님꺼고 글은 다른 사람이 쓴 줄 알았다가 나중에 글도 직접 쓰신 걸 알고 깜짝 놀랐었답니다. 그게 아주 오래전인데, 그때는 독서를 잘 안하던 때라 사진작가가 에세이집을 낼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든요.
달사르님도 정붙이셨다니 다행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