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기억의 파괴 - 흙먼지가 되어 사라진 세계 건축 유산의 운명을 추적한다
로버트 베번 지음, 나현영 옮김 / 알마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영화적 건축의 참다운 본질은
고체상태의 물성인 건축을
생기와 빛이 가득한 사건의 모습들로,
그것들의 에너지화된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으로
철저하게 변형시키는 것이다.

 

- 파스칼 쇼닝, <영화적 건축 선언서> 中

 


영화적 건축의 창시자 파스칼 쇼닝은 감정도 하나의 건축 재료라고 말한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처참한 사건이라는 스레브레니카 대학살을 통해 엿볼 수 있는데, 재건된 고향보다는 폐허인 피난처를 선택했던 보스니아 여인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여기서 남편과 아들을 잃었음은 물론 강간까지 당한 그들은 정부가 마련해 준 주거단지를 거부한다. 새 주거단지의 방과 창문과 벽이 오직 옛 집과 가족 파괴의 슬픔만을 상기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라예보의 폐허에 남기로 했고, 그곳에서 강간으로 생긴 아이를 낳았으며, 구걸과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결국 여인들에게 정주(定住)의 안식을 제공한 것은 다름아닌 정신세계의 집, 즉 감정을 재료로한 건축이었다. 그곳의 벽은 상실의 기억을 차단하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물리적으로 구축된 고향의 집보다 더 믿음직한 새 삶의 터전이 되어주었다.

 

 

 


<집단 기억의 파괴>는 건축물의 파괴가 민족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강조하며 이를 주도했던 폭력과 분쟁의 역사를 집요하게 추적하는데, 건축물이 한 민족에게 커다란 상처를 준다는 것은 쇼닝의 감정을 재료로한 건축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하나의 건축물이 파괴된다는 것은 기존에 한 민족 혹은 민족 개개인이 건축물에 대해 가지고 있던 경험과 의미가 파괴됨을 의미하며 정신세계에 구축된 이미지로서의 공간도 실제의 공간 못지 않게 철저히 부서짐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도 감정이 축조해낸 건축의 세계를 종종 살펴볼 수 있었다. 일례로 보스니아 내전의 또다른 충격이었던 스타리 모스트(보스니아의 다리 이름) 붕괴의 경우 이 지역 시민들에게 전례없는 슬픔을 안겨주었는데, 너무도 깊은 그들의 슬픔에 작가 슬라벤스카 드라쿨리지는 "우리는 왜 파괴된 다리의 이미지를 보며 학살당한 사람의 이미지를 볼 때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 답은 작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마 그 이유는 우리가 파괴된 다리에서 인간의 필멸성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명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파괴하는 행위는 이야기가 다르다. 다리는 그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개인보다 더 오래 살아남도록 지어졌다. 다리는 영원을 붙잡으려는 시도이며 개개인의 운명을 초월한다. 죽은 여인은 우리들 가운데 한 명이지만 다리는 인류 전체다.(p.40~41)


스타리 모스트는 시민들의 생활공간으로서 친근한 만남의 장소이자 도시 이벤트의 무대였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구혼의 추억이 담긴 특별한 장소이기도 했다. 드라쿨리지의 답변에 덧붙여보자면 시민 개개인이 가진 애착의 감정이 스타리 모스트를 자신만의 영원의 공간으로 상징화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부지불식간에 건축물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은 슬프게도 건축물의 물리적인 형태가 파괴되었을때 더욱 실감나게 드러난다.


건축물의 파괴가 인간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일찌기 전쟁을 시도했던 많은 전범자들이 간파했던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을 기억하는 우리들의 방식이 국제관계의 여파 내지는 인명피해라는 관점에 치중되었기에 문화파괴의 행위 자체는 다수에게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대부분 건축사가나 미술사가의 영역으로만 여겨져왔다. 저자는 이점을 매우 안타까와하며 '인종청소'의 일부로서 물질문화의 파괴가 갖는 힘을 역설하는데, 이는 집단 정체성의 말살뿐만 아니라 회복에의 의지까지 좌절시키는 파급력 강한 살상무기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다양한 형태의 분쟁에서 자행되었던 건축물 파괴의 저의와 양상을 구체적으로 분류해 논하며 이를 통해 '인종청소'에 숨겨진 물질문화 파괴의 실상을 보다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파괴의 대상이 되는 건축물들은 한 국가와 민족의 문화유산이나 권력의 상징이되는 건물, 혹은 랜드마크 등이지만 평범한 마을의 주거단지나 상업지구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즉, 전쟁 각본에 따라 침략자의 의도가 반영될 수 있는 건물이라면 모두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궁극적인 영향력 또한 동일하게 파급된다. 방법에 있어서도 과시적인 유혈의 파괴뿐만 아니라 대체 건물을 통한 은밀한 파괴도 동원된다. 후자의 경우 국제 여론을 시끄럽게 달구지 않으면서도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는 실리적이고 악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파괴가 해당 민족이나 종교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정들었던 마을회관이나 예배당이 침략자의 위상을 드러내는 건물로 바뀌어가는 것은 전쟁에서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였다.


전쟁뿐만 아니라 그보다 규모가 작은 테러나 긴장관계라고 여길 수 있는 분단에서도 건축물은 매우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내포하며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된다. 특히 테러에서는 대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건축물을 파괴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목표 건물의 상징성 여부가 중요한데, 이는 미국의 911테러 사례에서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한 국가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분단의 벽은 좀 더 독특한 방식으로 파괴를 진행한다. 여기서 벽은 단지 주변지역의 물리적인 파괴에 그치지 않고 한쪽 벽 너머의 강한 이들이 반대편의 약한 이들을 고립시키고 구속하는 방편으로 사용되며 약자들의 영토 자체를 감옥으로 만들어 한 민족, 심지어는 동족을 말살시키려는 잔혹한 의도가 다분하다. 이처럼 건축물의 파괴에는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음모와 술수가 담겨져 있으며 이는 미디어를 매개로 할 것을 고려해 사기로까지 확대된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집단 기억의 파괴>는 옛 유대인의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디아스포라, 독일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 및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각종 건축물 파괴, 터키의 아르메니아 학살과 하츠콘크 파괴, 911사태와 무역센터, 동서독의 갈등과 베를린 장벽 등 수없이 많은 역사속의 참상들을 면밀히 살펴가지만 단지 이 사건들을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고 재건과 대비책을 다루고 있는 점이 눈여겨볼만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재건은 반드시 합리적이고 올바르고 안정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여기에도 대외적인 선전과 '디즈니화(실제 장소나 사건에서 주로 부정적이거나 비극적인 측면을 제거하거고 건전해 보이는 형태로 재포장하는 행위(p.316))'의 위험, 그리고 정치적 음모들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 회복 보다는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건축물의 파괴 이후 남겨진 상처가 너무도 크기에 우리는 어떤 조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 여기에 동참하고 조약을 지키는 국가들은 (놀랍게도) 그리 많지 않아보인다. 이를 대변하듯 전쟁 중 오직 군사적 목표물들만 공격하도록 규정한 1999년 국제협약(헤이그 협약 제2차 의정서의 수정본)에 서명한 국가도 비교적 소수였다. 하지만 집단학살과 건축물 파괴의 책임을 물어 전범으로서 처벌을 받은 사례도 전무한 것은 아니다. 비록 이를 위한 국제적 노력이 큰 결실을 맺고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아직 희망을 버려서는 안되며 이 책 또한 그 희망을 향한 실천의 하나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만일 건축물의 파괴를 제재하기 위한 노력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든 물질세계의 건축물을 버리고 영화적 건축이 제시하는 무소유, 비물질 세계에서 살아야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영화적 건축이 인간의 감정과 시간의 지속성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공간을 구축한다지만 이것은 단지 실험적인 건축의 일부일 뿐이고, 우리는 여전히 든든한 벽에 둘러싸인 집에서 자랑스런 문화유산과 더불어 살아가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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