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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의 어린이 십자군 ㅣ 어린이를 위한 인생 이야기 25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준형 옮김 / 새터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어린이 십자군>은 전쟁 중에 길을 잃은 어린이들에 관한 이야기지만 사실 아이들을 위해 쓰여진 그림 동화는 아니다. 지독한어둠과 절망이 내포되어 있는 이 이야기는 원래 2차대전 당시 브레히트가 독일의 폴란드 침공 소식을 듣고 전쟁에 휩쓸린 아이들의 불행을 시(詩)로 묘사한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아이들만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이나 풋풋하고 감동어린 에피소드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것은 오직 공포와 굶주림과 고통 뿐. 이러한 가운데 아이들이 죽음 직전까지 따뜻한 곳을 향해 전진했다는 사실은 순백의 눈송이보다 더 한결같아 숭고하기까지 하다. 냉혹하고도 무심한 현실인 듯 시종일관 아이들의 발걸음을 어렵게 했던 눈송이도 하얗게 침묵하며 순진무구한 희망의 끝에 예를 갖춘다.
시작은 강렬한 붉은 색과 함께 전쟁의 참상를 비춰내고 있다. 비명을 지르는 아이의 모습에서는 흡사 뭉크의 <절규>와 같은 공포가 느껴지기도 한다. 어디선가 부모 잃은 아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행렬은 점점 더 길어져 갔다. 여린 어깨엔 자기 짐보다 무거운 슬픔을 지고, 유일한 희망을 남쪽의 '따뜻한 나라'라고 부르면서, 아이들은 길도 지명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그렇게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그들은 가엽게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죽음의 사자는 이미 그 앞을 지났는데, 이것은 개나리의 꽃망울을 소멸시키는 눈송이에서, 그리고 펑, 펑이라는 포성과 같은 운율에서 슬며시 드러난다.
작은 개나리 나뭇가지 위에
펑
펑
하얀 눈만 내리어
노랑 꽃망울이 돋아나지 못하는 거랑 같았지.

마르크스의 사상에 심취했고 반나치주의였던 브레히트는 아이들의 공동체를 통해 그가 꿈꾸던 이상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세계에서는 모두가 대장을 믿고 따르고,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돌보며(강자가 약자를 돌보듯), 부유한 유태인이 가난한 식탁을 마다하지 않고, 나치가 유태인들에게 미안해하며, 나치나 유태인이나 폴란드인이나 공산당이나 함께 다독이며 서로를 보듬어주는, 하여 종국에는 2차대전의 전범자들이 희생자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이 이루어지는, 결코 실현될 수 없지만 꿈에나마 보고픈 모습들이 펼쳐진다. 다만 이 세계에서도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 이뤄지지 못함은 미래에 어떤 기대도 걸 수없다는 브레히트의 극한 절망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대장이 길을 모른다는 것은 앞으로 선한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여곡절 끝에 총상을 입은 군인 아저씨가 갈 곳을 알려주지만 여전히 잔혹한 운명의 저주가 훼방을 놓는다. 잘못된 길이지만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아이들은 백지 위에 가벼운 터치로 묘사되고, 공허한 공간 속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며 앞으로 질주한다. 바로 이 장면에서, 앞서 아이들이 길을 떠나며 품었던 '언젠가는'이 떠올라 마음 한 구석을 아프게 찌른다. '언젠가는'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작 너무도 잔인한 미래였기에.
아이들은
정말로 언젠가는
따뜻하고 먹을거리도 많은
평화로운 마을로 가고 싶었어.

길을 떠날 때의 아이들 모습이 온데간데 없다. 이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은 그저 지치고, 배고프고, 슬프고, 두려운 '세상 모든 아이들의 얼굴'이 되었고, 세계대전의 아픔은 모든 전쟁의 아픔으로, 더 나아가 암담한 미래에 대한 절망으로 아른거린다. 이는 브레히트가 <다음에 태어나는 사람들>이라는 시(詩)에서 절규했던 한 구절, "정말로 내가 사는 시대는 어둡다! 도대체 어떤 시대인가, 지금은..."을 절실히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해질녘 붉게 물든 구름들 사이로
힘없이 쪼그라진 얼굴들이
어렴풋이 아른거려.
스페인 사람들 얼굴도,
프랑스 사람들 얼굴도,
그리고 동양 사람들 얼굴도!
그 서글픈 얼굴들이 다 내 눈엔 보여.

이제 아이들은 순진한 희망이 눈보라 속에 숨진 노란 개나리와 동행할 시간. 간절함과 간절함이 서로를 부비대는 삐뚤빼뚤한 손글씨 편지는 결국 그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아이들의 편지를 목에 매단 개는 먼 훗날 굶주려 숨진 채 발견되었다. 전쟁의 참상이 사랑을 거세해 버린 세상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최후였던 것이다. 브레히트의 <어린이 십자군>은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55명의 아이들을 통해 잔혹한 현실과 이상세계에 대한 좌절을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어둠의 시대를 묵묵히 견디려했던 아이들의 순진한 의지는 작가의 절망을 너머서며,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상실된 유토피아의 꿈을 잠시나마 바라볼 수 있었고,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이 그 꿈을 다시 이어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덧붙임 : <어린이 십자군>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다룬 시(詩)이므로 문학작품 답게 역자 후기와 해설, 각주까지 갖추고 있으며,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용어들로 풀이하고 있어 문학과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뿐만아니라 해설에는 본문과 관련된 실화나 전설들이 곁들져 독서의 풍요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상기 이미지 중 마지막에 삽입된 개와 손글씨의 이미지 책 속의 두 컷을 재조합한 것으로 실제 도서의 이미지와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