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에게 꽤 익숙한 말 중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라는 모 기업의 슬로건이 있다. 이것의 본래 의도는 젊은이들의 상상력을 응원하고 도전과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러지의 이상을 전달하려는 것이겠지만 홍세화의 글을 읽고 나니 오히려 '세상대로 이끌려가는 생각'에 대한 반발, 사회의 기존 사고방식에 강요당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란 태어나면서부터 내 안에서 존재한다 느끼기에 자신의 소유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 우리의 생각은 어릴적부터 가정과 학교를 통해 꾸준히 다듬어진 것이며 그것은 항상 시대와 문화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꿈을 가져라' '새로운 일에 도전해라'와 같은 푸른기 어린 덕담을 들으며 자라지만 극심한 경쟁사회 속에서 그 메시지는 사회가 최상으로 여기는 가치를 획득하라는 압박으로 밖에 여겨질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 생각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대로 이루는 것보다 절실한 과제로 여겨진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생각의 좌표>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언급했던 '지적 인종주의'에 물든 교육 현실과 피상적으로 자리잡은 노동자 의식을 속속들이 파헤치며 '사유하는 인간'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교육의 참모습인 학습(學習)이 배울 학(學) 따로, 익힐 습(習) 따로 분리되어 습(習)이 제구실을 못하는 이유를 물신주의 사회에서 찾는 홍세화는 학생들이 독서와 토론을 통해 주체적 사고를 확립하고 사회를 향한 비판적 사고를 갖출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좋은 것을 배워도 사회에서 그 반대의 것을 익힌다(習)(p.28)'는 사실과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념'일 뿐이라는 사실을 젊은이들이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또한 사회구성원들을 향해서는 계몽이나 의식화가 아닌 '탈의식'을 주문하는 것도 눈여겨 볼 점이다. 여기서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되고 세뇌된 의식을 벗고 발가벗은 존재가 되자(p.72)'라는 의미의 탈의식은 어떤 주체에 의해 끌려가게 마련인 계몽이나 의식화보다 사고 주체의 개인을 위해 타당한 제안으로 들린다.

우리는 흔히 '홍세화'하면 '좌파' 혹은 '중도좌파'라는 말을 떠올리지만 그가 지적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들은 좌우에 속하지 않고 공통필수에 해당하는 근본적인 문제점들이다. 특히 '노동자 의식'은 투쟁이라 쓰여진 조끼를 입을 때만 나타나고 일상에서는 '자발적 복종'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점, 자본주의 물신 사회의 종말은 인간이 아닌 자연의 반란에 의해 도래할 것이라 우려하는 점(물론 이것은 4대강사업과 현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기 위한 서두일수도 있지만), 회색주의자란 더 검은 것을 색출하여 비난의 대상으로 삼고 흰색을 말살시켜 스스로의 더러움을 감추는 자들이라 고발하는 점 등은 이 책을 통해 깊이 성찰해야 할 우리 사회의 과제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생각의 주인은 누구인가', '회색의 물신사회', '긴장의 항체'라는 타이틀을 중심으로 철학적 사유를 펼쳐가는 이 책은 교육과 주체적 사고, 노동자와 자본주의, 정부 현안이라는 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논리에만 그치치 않고 서민들의 생각과 일상에 직접 부딪힌 현장감 있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 그가 얼마나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고민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런걸 '빠리의 택시 운전사'로 잘 알려진 홍세화 답다고 해야할까? 대한민국 구석구석 그 난감한 지리를 대로든 골목이든 마다치 않고 누비는 모습이 무척 인상깊고도 고달파 보인다. 한편, <생각의 좌표>는 미래, 현재, 과거를 향해 차례대로 써보낸 세 통의 편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생각의 주체와 우리의 사고를 논하고 있는 부분은 미래 사회의 주인공이 될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요, 회색인이나 탈색 가능한 흑색인이 판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부분은 현 정부에 보내는 날카로운 상소이며, 마지막으로 오랜 세월 고국에 올 수 없었던 상처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명제를 되새기는 것은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다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솔직한 감정의 토로와 더불어 그가 추구해왔던 휴머니스트로서의 자세가 담겨있다.

따라서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존재의 이유와 의의를 부정하는 것이고 훼손하는 것이다...그것을 위해 반인간적인 것, 비인간적이게 하는 것들과 싸우고 저항하는 실천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자에게 있어 휴머니즘은 필요조건이며 동시에 권리이다...이것이 내가 나 자신을 그 무엇보다 휴머니스트라고 부르는 이유이며, 내가 기계적 이데올로기 논쟁과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던 근본 이유다.(p.245)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이제 그가 택시운전사라는 방랑기 어린 이름 대신 실천적 휴머니스트라는 이름으로 불려졌음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에 의하면 본래 휴머니즘이란 "중세 종교라는 성채에 대항했던 강건하고 적극적인 힘"을 의미한다니, 그 강건한 힘이 더욱 자라 물신 자본주의의 성채도 동일하게 발휘되길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홍세화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게 들렸다. 아니, 사실 그가 "쓸쓸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땅의 주류인 지배계급 편에 서지 않고 소수자로 힘겨운 저항을 계속하자니 힘에 부칠 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소수에겐 그래도 탄식보다는 의지가 어울린다"고 밝혔던 것을 기억하며 다시 앞을 향해 묵묵히 걸어갈 그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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