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 풍경과 함께 한 스케치 여행
이장희 글.그림 / 지식노마드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음먹고 서울 탐험에 나선적이 있었다. 한강 고수부지의 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삼각지, 서울역, 시청을 거쳐 종각에 이르렀다 되돌아오는 이 도보 여행은 지하철로 약 17~8개의 정거장에 해당하는 머나먼 거리였는데, 장장 4시간이 넘는 행군(?)을 날마다 반복한 탓에 발목에 무리가 생겨 결국 물리치료와 함께 3일천하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대중교통이나 차로 익숙했던 그 길을 '실제로' 걸어본다는 것은 3일밖에 되지 않는 짧은 여행에서도 생생히 느낄 수 있을 만큼 분명히 색다른 경험이었다. 막상 걸어보니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인도가 난 곳이 의외로 사람을 반기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자연조건이나 교통계획에 의해 도심 속에서도 섬처럼 단절된 곳이 있었으며, 거리의 화려함 속에 갑작스런 초라함이 끼어들어 함몰된 듯한 느낌을 주는 풍경도, 오랜 지병처럼 끙끙거리는 노후지역의 신음소리가 대로변까지 들려오는 상황도 감지되었다. 대도시, 그것도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이라는 곳의 중앙 대로는 이처럼 번화함이나 화려함이라는 피상적인 단어만으로는 간과할 수 없는 다양한 표정들을 품고 있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를 펼치게 된 것은 그때 그 탐험의 느낌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 그러나 나처럼 무모하지 않은 치밀하고 우직한 발걸음으로 서울을 경험했다면 분명 그때보다 더 풍부한 서울의 표정들을 생생하게 보여줄거라 기대했다. 또한 책속에 담긴 장소의 대부분은 유년기로부터 이십대까지의 내 모든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기에 나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 본 그곳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지 무척 궁금해졌다. 아마 서울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궁금증을 안고 있으리라!

경복궁에서부터 시작하여 명동, 효자동, 광화문, 종로 그리고 인사동에 이르기까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서울을 그려나간 스케치들은 마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손으로 만져 감각으로라도 기억하려는 노력인듯 정성스럽고 섬세하기 그지 없다. 스케치라 부르기에는 너무도 촘촘히 그어내려간 선들, 거기서 화살표가 뻣어져 나와 더 자세히 또 더 자세히...그리고 또박또박 눌러 쓴 글씨로 그곳에서의 시간들을 단정하게 각인해 놓는다. 저자는 이렇게 서울의 시간들을 회고하며 옛 문화재와 옛 이야기들로부터 현대식 고층빌딩로 빽빽한 도심, 뒷골목에 자욱한 일상의 흔적에 이르기까지 씨줄과 날줄처럼 공존하는 시간들을 짜내려가고 있다.

정성스런 그림으로 상기해본 서울의 모습이 더 아름다운 까닭은 있는 그대로의 서울이 세밀하게 재현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서울을 바라보는 애정어린 시선, 감성어린 시선들이 그림으로 나타나 우리가 바라는 서울의 정취와 여유를 만나게하고, 무심코 지나쳤던 삶의 고단한 흔적들에서 소소한 감동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골목이든 흔히 볼 수 있는 오목거울이 흑백 스케치 속에서 주황빛 모자를 쓰고 드러나는 순간, 골목이 환해지고, 어쩐지 안도감이 들며, 누군가가 지켜준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마저 솟아난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는 서울의 주요 문화재와 기념비적 건물들, 그리고 뒷골목의 풍경뿐만 아니라 자연과 사람을 만나게 해주어 더욱 살갑다. 때론 역사적인 인물도 만나고, 때론 서울을 지켜온 소문난 어르신들도 만나지만 그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몸짓과 표정만 보아도 서울 거리의 온기가 느껴진다. 나무도 마찬가지이다. 오래되고 희귀한 나무들뿐만 아니라 일률적으로 '가로수'라 불려졌던 나무들이 제 이름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인사한다. 더불어 도시학을 전공한 저자답게 서울에서 발견되는 소소한(?) 문제점이나 도시설계상의 이슈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따지고 있는 점도 매력적이다. 그저 지나치기 쉬운 표지석의 방향이나 문화재 보존을 위한 미비한 대책, 책상위에만 머문 도시계획으로 나타나는 어이없는 공간들은 성급하게 자라 온 서울의 시간을 지층이라 바라볼 때 격동으로 드러난 단층과 같이 느껴진다. 이렇게 어긋난 단층들을 고르게 잘 가꿔가야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서울 토박이인 나에게는 매우 절실하게 다가온다.


책 속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내게 소중한 의미가 되는 장소들을 꼽아보는 것이었다. 말로는 분명히 들었지만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시인 이상의 집,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저자의 스케치로나마 만나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 그리고 광화문의 뒷모습! 이것을 다시 보게된 것이 얼마만인지...마지막으로 가수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에도 등장하는 덕수궁 돌담길의 작은 예배당! 저 안에는 아기천사가 되어 날개를 달고 있던 순수함의 추억이 고이 잠들어 있다. 지금은 서울을 향한 발걸음이 그저 일상에 지나지 않는 무미건조한 왕복에 불과하지 않지만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다시 탐색의 문을 활짝 연다면 나도 이 책에서처럼 반짝이며 살아있는 시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라...

참 아름다운 생각이다.



 

늘 곁에 두고도 잊고있던 하늘이
욕심 없는 기둥 하나로 우리의 지붕이된다.
흘러가는 시간을 잠시 붙들어
우리의 서울이라 알려주는
지은이의 마음도
저 기둥과 같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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