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 2,000년 동안 서양문명을 이어온 가장 위대한 이야기
김용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한반도 작은 땅에 서쪽으로부터 신이 나려온지 어느덧 125년이 흘렀다. 개화에 힘입어 서구문화의 일부로 유입된 기독교는 당시 전통과 권위의 중심지였던 광화문 근처, 정확히 말해 덕수궁 후문과 옛 대법원을 바라보는 고풍스럽고도 아늑한 자리에 거처를 두고 첫 십자가를 꽂았으며 역사와 더불어 때론 독립운동가들의 후원자로, 때론 우파의 기생자로 인식되면서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해왔다. 이제는 밤하늘의 별보다 먼저 눈에 뜨이는 십자가, 새벽 5시를 마다하지 않고 올림픽 체조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신도들로 그 위력을 짐작케하는 신은 말그대로 도처에 존재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밖의 사람들에겐 아직 관심 밖의 이야기이다. 더불어 그들이 마주치는 신이란 대부분 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단들을 통해서이며, 학교에서도 진화론 위주의 교육을 받은 탓에 신에 대해 어느정도 편중된 시선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서두부터 기독교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신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까닭은 이 책에서 말하는 신이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이 아닌) 바로 기독교의 신이며 또한 상당 부분 성경적인 해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신학의 입장이 아닌 철학의 입장으로 말하고 있지만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창조론과 성삼위일체에 대한 가능여부를 설명하며, 기독교가 공격받는 여러가지 사항들에 대해 이해할만한 답변들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신을 옹호하는 편에서 서술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차원에서 읽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은 아니며 좁게는 종교와 과학과의 공존, 넓게는 신과 인간과의 화합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서구의 문물은 쉽게 받아들이고도 정작 그 기원이 되는 사고체계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인문학적 성찰이 보다 근본적으로 서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아직까지도 분분한 과학과 종교의 논쟁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제공하리라 생각한다.

신의 의미, 신의 존재성과 존재여부, 시간과 창조, 신의 인격성과 섭리, 유일신과 삼위일체 등 크게 5가지의 주제를 중심으로 이어나가는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신에 대해 궁금했던 모든 것이 담겨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누군가가 신에 대해 적극적으로 묻지 않는다면 이는 아마도 신의 존재여부에서부터 회의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우리가 신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거나 신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다해도 고대의 철학자들이나 문학가들의 깨달음에서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하지요.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p.85-86)

물론 이것은 조금 선문답같이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신과 우리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출발할 때 다른 철학자들이 규명하는 신의 존재가 의미있게 다가온다.

그래서 모세가 어렵게 알아낸 신의 이름이 '야훼(YHWH)'지요...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존재'입니다. 그래서 만일 신에게 본질이 있어야 한다면...그것은 오직 '존재'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다마쿠스의 요한네스가 "신을 가리키는 그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인 명칭은 '있는 자'다"라고 말한 이유이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모든 피조물은 본질과 존재가 구분되지만 "신의 본질은 그의 존재와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까닭입니다.(p.86)

이처럼 아무런 형상도 갖지 않고 오직 '존재'로만 표현되는 신은 그리스적 사유로보면 영원불변의 어떤 것이었으며 '자기동일성(auto kathahauto)'이라는 속성을 가져 논리적으로는 결코변화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존재'에 대한 히브리어인 haya에는 생성, 존재, 작용의 의미를 담고 있어 이를 통해 정적인 신과 역동적인 신의 모습이 공존하게 되었으며 시간을 매개로 '영원히 안식하면서 부단히 활동하는 신'이라는 속성이 가능케 되었다.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시간을 매개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이 하나로 종합된 겁니다.(p.153)

한편, 칸트는 "내용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 유명한 언명을 통해 이성을 감성의 테두리에 가두고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로부터 기독교인들은 신을 종교적 경험의 차원에서 파악하게 되었고 '신의 현존'의 측면에서 보면 이성만으로 신을 파악하려는 신학자들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신이 창조주임을 설명하는 3장은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성경과 과학이론, 철학을 바탕으로 상세한 설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성경의 천지창조와 천체물리학의 빅뱅이론이 일치하는 점, 도킨스가 내세운 '눈먼 시계공(지적설계론)'이란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범하는 것에 불과하며 지적설계론이란 정통 기독교 이론이 아니라는 점, 다윈이 진화론의 논리를 맞추기 위해 증거가 될만한 자료들을 수집해왔다는 사실과 진화론자임에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의 의견 등 보다 창조론을 가능하게 하는 논지를 펼쳐나간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는 과학과 종교의 화합을 위한 설명들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라는 개념을 통해 과학과 종교가 서로 다른 말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주장하며 이 논쟁은 합의나 일치를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서로의 담론에 대한 이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창조주가 위대하고 전지전능한, 먼 곳에 있는 신을 논했다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인격적인 신은 가깝고 친밀하며 우리 삶의 대소사를 돌보는, 보다 곁에 느껴지는 신을 논하고 있다. 여기서는 신의 섭리, 기도와 같은 보다 종교적인 색채가 많이 드러나며 신의 섭리와 우리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작용하며 세상을 움직여가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의 유일성에 관한 부분은 '삼위일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삼위일체는 플로티노스의 일자 형이상학으로부터 그의 '일자, 정신, 영혼'이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령'으로 이어져갔지만 초기에는 기독교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요한복음 1:1)에서 나타나듯 오직 하나로 존재하는 신을 묘사하고 있기에 무려 60여년에 걸쳐 기독교사에서 가장 큰 논쟁으로 기록되었던 '삼위일체 논쟁'을 겪어야 했다. 이 논쟁은 어느 한편의 승리라기 보다는 그들 사이의 차이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 철학을 극복하고 보다 자신들에게 합당한 유일신의 개념을 만들어가게 되었다.

신의 유일성에 대한 설명은 '종교적 다원주의'를 맞은 현대 기독교의 난제와 이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저자의 주장은 신의 유일성이 차별적 배타성이나 폭력성의 근거가 아닌 오히려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의 바탕이라는 데 있다. 또한 기독교 입장도 기독교의 속성을 가급적 덜 양보하면서 타 종교를 가능한 한 인정하는 소극적 자세가 아니라 신의 유일성을 근거로 다른 종교와의 협력을 이뤄내고자 하는 적극적인 자세여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본질공동체적, 영원동등적이고, 몰트만의 표현을 따르자면 상화내주적, 상호침투적 사랑이 그 본질이지요. 여기에는 서로 이질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통일적인 하나-됨'을 이루는 '이종사랑(heterologous love)'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배타성이나 폭력성도 침투할 수 없습니다....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이 가진 포괄성과 통일성으로서의 유일성이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만 유일자입니다.(p.800-801)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 신화속의 신으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의 유일신에 이르기까지 신학, 철학, 과학, 예술 등 다방면의 학문을 아울러 던지는 화두는 결국 '어떻게 화합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록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한번쯤 함께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질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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