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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 모더니즘 + 제국주의 + 몬스터 + 종교 ㅣ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크로키란 미술에서 사물의 특징을 잡아 빠르게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그림 그리기에 익숙한 사람의 손놀림을 보면, 먼저 중심선을 재빠르게 잡고난 다음 특징이 잘 드러나도록 선의 강약을 조절하며 한 호흡에 그려낸다. 그렇기에 코끼리의 발을 다 그리지 않아도, 음영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아도, 긴 코나 큰 귀, 우람한 몸통만 잘 그려낸다면 누구나 코끼리임을 알아챌 수 있다.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은 이렇듯 세계사의 주요 장면에 대한 크로키와 같다. 저자는 방대한 세계사에서 욕망, 근대화, 제국주의, 몬스터(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종교의 5가지를 주 원동력으로 뽑아내고, 통사(通史)적 방법으로 굵직하게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그리고 곳곳에 스타벅스나 마이크로소프트, 테러 등 현대 사회의 요소들을 등장시켜 역사와 현실과의 유사성 혹은 인과관계 등을 더 쉽게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먼저 세계사를 움직이는 첫번째 원동력 '욕망'은 우리에게 친숙한 커피와 홍차로 시작한다. 이 은은하고 우아한 기호식품이 대체 욕망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더욱이 세계를 양분하는 근대의 원동력이라니, 커피와 홍차에 붙은 수식어 치곤 너무 대단한 듯 하다. 처음엔 그저 커피생산과 식민지에 대한 이야기 정도겠거니하고 페이지를 넘겼는데 의외로 재미있는 관점들이 눈에 뜨인다. 저자는 커피의 '잠들지 않는'속성, 즉 각성 효과가 근대의 욕망을 지속적으로 몰고 간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했다. 물론 이것은 서구인들이 커피를 많이 마셔 일을 더 많이 할수 있었다는 단순한 해석이 아니다. 커피를 자주 마시게 된 프랑스인들은 '커피 하우스'를 통해 정보 교환에 몰두함으로 정보 자체가 힘이 되는 근대적 구조를 만들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커피의 힘은 보스턴 차사건을 계기로 비싼 차를 수입할 수 없게 된 미국에서 더욱 꽃피워 오늘날의 월스트리트에 이르렀고, 차를 마시는 우아한 성향은 유럽에 남아 문화와 예술의 바탕이 되었다 하는데, 이들의 부유함을 떠받치기 위해 땡볕아래 스러져간 '니그로의 땀(흑인 노예들의 노동)'이 애처럽기 그지없다.
'근대화'라는 두번째 원동력에서는 원근법을 통해 오늘날로 이어지는 시각의 힘을 논한 점이 흥미로웠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된 원근법은 중세의 신(神)에서 벗어나 인간의 시점으로 세계를 파악하려 했던 우리들의 노력이었다. 그리고 중세에서 '성서'의 지식을 지배하는 것이 권력으로 이어졌듯 근대에서는 '시선'의 지배가 권력의 지배로 이어졌다. 여기서 저자는 감옥을 통해 '보다-보여지다'의 지배구조를 논했던 근현대 철학자 벤담, 푸코를 등장시켜 르네상스로부터 이어져온 시선의 지배의 계보를 설명하며 이어 인공위성과 인터넷을 연결시켜 '정보'의 지배가 오늘날 막강한 힘을 갖게 되는 원리까지 도출해 나간다. 그리고 이토록 시각의 영향력이 막강한 사회에서 아로마테라피나 마사지가 각광받는 현상은 그동안 등한시되었던 시각 이외의 신체감각을 되찾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라 지적한 점도 신선한 견해였다.
이어지는 세번째 원동력 '제국주의'에서는 현대판 제국주의인 '글로벌리즘'의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점을, 네번째 원동력인 '몬스터'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중세 교회의 유사성, 파시즘을 계승하고 있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등을 언급하며 꾸준히 과거가 반영된 오늘날을 이야기해 준 점이 인상깊었는데, 워낙 방대한 분량인지라 각 주제에 대한 설명을 진지하게 다루기엔 조금 지면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으로 다섯번째 원동력인 '종교'는 근래 종종 볼 수 있는 중세 다시보기와 아직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인 이슬람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의 요지는 르네상스가 중세 이후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며 십자군 전쟁을 통해 유럽으로 흘러들어온 이슬람 문화가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발현한 것이라는 점인데, 이를 통해 이슬람의 연금술에서 시작된 과학, 즉 마법의 돌을 꿈꾸던 순진한 과학이 오늘날 생명 공학으로 이어져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고 있음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었다. (이는 아마도 최근 과학자들이 부단히 주장하는 무신론의 대세에 반하는 것이기에 그리 느껴졌던 것 같다.)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은 세계사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고 연대적으로 공부하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내게 통사(通史)적 묘미로 다가온 책이었다. 크로키처럼 굵직한 사건들만 추려낸 덕에 오랫동안 세계사에서 멀어졌음에도 부담없이 읽어갈 수 있었으며, 역사를 재해석하고 현대의 사건 속에서 반추해가는 과정을 통해 경직된 상태로 기억속에 산재되있던 세계사를 새로운 모습으로 만나게 되어 즐거웠다. 이 책을 통해 좋은 워밍업의 시간을 가졌으니 세계사는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내가 다가가기 쉬운 통사적 책들부터 다양하게 시도해 보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