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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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억을 돌이켜 떠올려 본 박완서 작가와의 첫 만남은 사실 썩 유쾌하지 않았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는 갓 스물을 넘긴 청춘이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과중했고, 읽어갈수록 지하창고로 내려가는 느낌을 떨치고 싶어 중간에 페이지를 덮어버렸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었다.

 

이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친절한 복희씨

팔랑이는 샛노란 치맛자락이 인상적인 표지다. 그리고 친절하다니까 읽어도 괜찮을 것 같다.
이번엔 뭔가 포근함과 초연함을 기대해도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는 않았다. 역시 예전과 같은 손길로 나를 지하창고로 데려간다. 하지만 내게도 그간 쌓아온 세월의 내공이 있다. 어두운 것이 그다지 부담스럽지만은 않아 가만히 적응해본다. 작가는 부산하진 않지만 재빠른 솜씨로 내 눈앞에 많은 것들을 재현해 낸다. 마치 3D 홀로그램을 투사하는 것같은 탁월한 묘사력은 등장인물들의 세밀한 움직임도, 시간의 물결을 오가는 배경들도, 보이고 싶지 않은 속내까지도 적나라하고 생생하게 그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시대조차 지나온 듯 눈에 선했다. 이것은 자세히 묘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섬세하게 흐를 것과 독특하게 꼬집어 낼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리고 그것을 이음새없이 재봉하는 숙련된 능력이다.

또 한가지 놀라운 점은 등장인물의 관계들을 엮어가는 방식이었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일반적인 관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사촌동생을 가정부처럼 고용하는 여자(그리움을 위하여), 바깥사돈과 살아가는 여자(대범한 밥상), 남자와 동거하다 대학선배의 별장지기로 전락하는 여자(거저나 마찬가지) 등 사회속에서 일반적이고 튼튼한 관계를 상실한 이들은 예외적이고 우발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마치 한 짝씩 남은 신발들을 맺어 한 컬레가 된 모양새다. 그럼에도 짝짝이 신발로 자신있게 이야기를 걸어가는 작가의 연륜이 상당히 돋보인다.

책 속에서 만난 노년들은 누구 하나 인생을 달관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예전의 유쾌하지 못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여전히 사랑에 목말라하고, 여전히 갈등하며, 흔들리고, 응어리지고, 가식적인 노년의 모습. 나름대로의 감추기와 해법이 있어 그런대로 살아가지만 아무도 어린이 프로에 등장했던 이상적인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되어주지 않았다. 때론 아들 내외에게 외면당하고 부부만의 시간을 위해 촛불을 사는 노인(촛불밝힌 식탁), 디카를 들고 손주에게 보낼 사진을 찍는 경실(대범한 밥상)과 같이 다독이는 방법을 배운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아이와 같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의연해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작가는 노년의 주인공들에게 절뚝거리는 삶을 살게 한 대신 해탈하라는 무거운 짐은 지워주고 싶지는 않았나보다. 

<친절한 복희씨>는 가보고 싶지 않은 시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습들을 부드럽게 일러주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보다는 이렇게도 살아진다..라는 소극적인(?)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격려하는 것 같다. 팔랑이긴 하지만 나부끼지는 않는 노란 치맛자락처럼 그리고 그 아래 드러난 굳센 두 다리처럼, 그치지 않는 흔들림과 동행하며 묵묵하게 걸어갈 수 있다는 희망. 아직은 이 소극적인 희망을 흔쾌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스무살 때처럼 지레 밀쳐내지는 않았으니 살다보면 그녀의 책을 읽은 효력이 발생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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