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신 택리지 : 서울 경기도편 - 두 발로 쓴 대한민국 국토 교과서 신정일의 신 택리지 4
신정일 지음 / 타임북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 최고 인구밀도 도시에 번번히 등극하고, 50년새 4배의 인구증가와 17배의 고령인구 증가, 2배의 면적 증가라는 경이로운 수치를 기록하고 있는 서울. 아침저녁 도로위엔 진득한 자동차의 물결이 차오르고 늘 그렇듯 무표정한 대열을 이루며 저마다의 목적지와 하루의 수당을 향해 종횡한다. 그런가하면 도로주변에선 늘씬늘씬한 건물들이 콧대를 세워 도도히 자라나고 한밤의 어떤 어둠도 네온사인의 욕망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사람들은 서울에 대해 그리 온정어린 눈빛을 보내지 않는다. 서울 앞에는 항상 '강팍한'이나 '삭막한', 또는 '비인간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며, 서울에 사는 사람들 조차도 이런 표현을 별 이의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이런 피상적인 동의에 반대하기 위해 이 책을 들었다. 왜냐하면 난 서울이 좋으니까. 그리고 내 고향인 서울을 좀 더 음미하고 싶어서.

여기서 '음미'라는 것은 이미 같은 시리즈의 '살고싶은 곳'편을 읽었기에 주저없이 선택한 단어이다. 또한 20년이 넘는 세월을 국토기행에 바친 이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내겐 일상인 서울을 멋진 가이드와 함께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양 설레임이 가득하다.

서울의 '서'는 수리, 솔, 솟의 음과 통하는 말로 '높다' '신령스럽다'는 뜻이 있으며, '울'은 벌, 부리에서 변음된 것으로 '벌판' '큰 마을' '큰 도시'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다. 서울은 한자로 경京과 도都로 표시되는데, 경은 크다는 뜻이고 도는 거느린다, 번성한다는 뜻이다.(p.27)


서울의 음미는 그 이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름의 의미를 증명이라도 하듯 신령스런 용출봉이 첫 페이지를 가득 메운다.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여 도읍지의 운명을 타고 태어난 서울의 이야기는 빌딩숲과 너른 차도를 묘하게 가로지르는 저자의 인도 속에서 시(詩)로 엮이고 풍경으로 어우러져 역사 속에서의 각축의 흔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여기에는 도읍지로서의 면모를 기려 우리의 궁과 정치, 행정에 관한 이야기들과 예로부터 이어져 온 서울지향의 일화들이 가득한데, 서울에 관한 속담같은 곁다리 이야기조차도 인심을 담고 있어 곰곰히 생각하게 한다.

서울의 길을 담고 있는 두번째 이야기는 우리 세대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장면들이 많다. 옛 성곽을 따라 걸으며 여전히 옛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생활속에서 흔히 지나치는 청계천, 남산, 동대문, 인왕산 등을 만나기에 별도로 유적지를 찾은 느낌이 아니다. 게다가 카메라를 담는 이의 눈썰미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풍경을 포착하고 있어 마치 일상 속에서 서울의 색다른 면모를 발견하는듯한 감흥으로 다가온다.

본격적인 근,현대사의 이야기들은 한강과 함께 굽이쳐 등장한다. 한국전쟁으로 폭파시켰던 다리, 개발을 명목으로 희생당한 밤섬, 모래사장이 사라지고 등장했던 아파트촌들...우리의 부모님과 조부모님 세대가 시간 속에서 체험하셨을 친근한 이야기들이 이중환의 <택리지>와 역사적 사료에 겹쳐져 더욱 깊이있게 살아나는 이 부분은 서울 이야기 중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기나긴 여정은 도심 한가운데의 몇몇 기념비적 건물들을 지나더니 서대문 형무소앞에 멈춰서며 광복과 민족을 숙제인양 남겨주었다.

2부의 경기도 이야기들은 내게있어 생소할뿐만 아니라(서울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경기도야...) 비춰지는 사진의 풍경도 서울과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서울의 사진들이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모습들을 주로 담고 있다면 경기도의 사진들은 훼손되지 않아 보이는 자연의 경관과 아직도 개발이 미흡한 듯 소박한 모습 그리고 서울 주변에 이런 역사적 흔적들이 있었나 놀랄 정도로 많은 유적들이 등장한다.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의 무거움을 탁트인 남한강 앞에서 털어내고 신선한 공기가 느껴지는 여주, 성남, 구리 등의 마을을 돌아보니 마음이 차분해 진다. 그러나 역시 남한산성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현장 탓인지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가볍지 않다. 인천, 강화도, 이천, 안성 등의 고장 역시 이중환의 지리적 묘사와 얽힌 옛 이야기가 많아 수월치는 않았지만 특산물 이야기 덕에 조금은 친근하게 느껴졌고, 다산의 태 자리가 있는 남양주시에 가서야 겨우 자연 경관을 돌아보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서울뿐만 아니라 경기도 곳곳에 쌓여있는 시간의 두께와 이를 한켜 한켜 들춰내는데 지치지 않는 저자의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양주시에서는 서거정이 동방 사찰 제일의 전망이라고 극찬한 수정사를 전망없는 풍경으로 보여준 점에 약간 실망했지만 포천에서 막걸리 한잔을 걸치고 경순왕릉과 한탄강을 바라보자니 임진강을 향해 떠날 기운이 생기는 듯 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임진강 너머의 북한땅과 파주. 이중환이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평했던 파주가 출판도시와 예술가 마을로 성장하고 통일 염원의 기념비가 서있는 모습은 이 책이 우리에게 넌지시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일까? 북한땅에 대해서는 판문점 이야기만 잠깐 비췄지만, 어쩌면 저자는 이곳에서 넘을 수 없는 저 선이 언젠가는 사라지고 밟지 못한 국토의 나머지 반을 신명나게 누빌 그날을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는 서울에서 출발했지만 의외로 많은 지역들을 탐색하며 도시읽기의 즐거움에 푹 빠질 수 있었다. 그리고 원했던 대로 서울에 대한 피상적인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몇 가지 이야기들을 챙겨넣었기에 매우 만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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