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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조선과 일본
조경달 지음, 최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8월
평점 :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사건과 사건의 비어있던 연결고리를 채울 수 있는 책. 고등학생의 경우 근현대사 교과서를 1독 후 이 책을 읽고 다시 교과서를 보면 그 흐름을 좀 더 자연스럽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개화파는 갑자기 어디서 등장했고 청나라와 일본만 등장하던 조선 후기 역사에 갑자기 아관파천이니 친러파니 하는 건 왜 나온 것이며 하는 등의 전후 사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후기 조선의 통사이자 일본과의 관계사이기 때문에 내용이 어렵지는 않다. 근대사를 가볍게 복습해본다는 느낌으로 읽으면 좋을듯.
동학과 동학농민군의 자치 시기에 대한 평가는 왜 이리 미미한 것일까. 동학농민군이 전라도를 해방구로 만들어 스스로 개혁해가며 통치한 것을 보면 파리 꼬뮨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이리 근현대사 교육에서 비중이 낮은가. 동학은 인내천 평등사상을 주창하였는데 왜 이는 우리나라의 근대화 역사에 아무런 족적을 남기지 못한 것일까. 그것이 성과로 이루어지지 못해서?
밑줄, 생각
6쪽
한국의 국민 국가화는 그리 용이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재빨리 근대화한 일본이 한국의 국민 국가화를 저해했다는 것이 종래의 견해인데,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에는 일본처럼 간단하게 서구화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한국에는 문명 의식 차원에서 일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우월 의식이 있었으며, 유교적 민본주의라는 정치 문화가 각계각층에 널리 침투해 있었다. 단순히 위정척사파의 사상뿐만이 아니라, 개화파의 사상도 유교적 민본주의에 구속당하면서 근대화를 구상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 세계도 공유하는 정치 문화였다.
10쪽
두 나라는 마주 보고 있는 거울처럼, 조선은 일본의 그늘이 되었고, 조선이 그렇게 될수록 일본은 양지로서 빛났다.
11쪽
오늘날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은 식민지 근대성론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좋아지거나 그렇지 않거나에 상관없이 조선인은 나쁜 근대의 가치를 내면화하였다는 것이다.
13쪽
부탄 정부가 필요 이상의 GDP 발전을 추구하지 않고, 주민 총행복량의 증진에 정책의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부탄의 전통적 정치 문화 양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양자는 각각 어떠한 사회를 전제로, 어떻게 근대 세계로 돌입하였으며, 그 결과 어떠한 국가를 만들어 내었는가? 이 책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정치 문화의 문제를 단서로 삼아 밝혀 보려 한다.
27쪽
서리는 역이었기 때문에 봉급이 없었으므로, 행정 수수료 등을 명목으로 해서 급여를 스스로 조달하는 식의 수탈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따.
32쪽
요컨대 주자학에 기초한 인정 이데올로기는 조선에서도, 일본에서도 확실히 기능하였지만 조선에서는 통치 원리 그 자체였던 데 비해, 일본에서는 통치 수단이었다는 측면이 강하다. 원리를 가진 사회란 그리 용이하게 스스로를 바꾸기가 어렵다. 이와 같은 점은 양국이 서구의 충격에 대응한 방식에 중요한 차이를 초래하였다.
34쪽
세도 정치에 대한 불만은 우선 정권에서 배제당한 양반의 불만을 일으켰다. 1811년 홍경래의 반란이 그것이다. 평안도의 가산에서 시작한 반란은 우선 가산 군수를 살해하고 일거에 평안도 각지로 세력을 확장했다. 반란은 몰락 양반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지방 차별타파와 안동 김씨 타도를 기치로 내걸었다.
민중의 최대 반란은 1862년의 임술민란이었다.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민란 발생지는 전국 71개 읍에 이르렀다. 임술민란은 이러한 민란의 총칭이다.
35쪽
임술민란에서는 수령과 향리, 향임 등이 주요한 공격 대상이었지만, 사족이 이끄는 민중은 향리 등을 몇 명 살해하였으나 수령을 살해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국왕이 직접 임명한 수령은 국왕의 신분이었고, 살해는 역성 혁명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수령은 기껏해야 쫓겨나는 데 그쳤다. 민중은 국왕이 파견한 선무사나 안핵사 앞에 엎드려 국왕의 인정을 애원했다. 민란에서도 법과 규율이 있었다.
36쪽
1821~1822년에 크게 유행하였던 콜레라 재앙에서는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
38쪽
동학은 1860년 5월 경상도 경주에서 몰락 양반 출신의 최제우가 창건하였다. 최제우는 유교, 불교, 도교의 세 종교를 통합하여 <천심이 곧 인심>이라고 하며, 만인은 선약의 복용과 주문의 암송을 통해 쉽게 <시천주>, 즉 천령에 감응할 수 있다고 하였다. 거기에는 일신교적 우주관이 있었고, 신비주의적 천인합일 사상이 있었다. 동학은 만인에게 군자화, 신선화, 더 나아가 진인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인간 평등의 논리 또한 가지고 있었다.
동학이란 서학(천주교)에 대항하는 동방(조선)의 배움을 의미
41쪽
일본형 화이 의식이라고 불러야 할 우월의식이 존재했다. 일본은 신국이며, 무위에서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의식이다. 조선은 그러한 시각에서 융국이었다.
명-청 교체를 통해 황(문명과 야만)를 뒤바꾼 중국은 더 이상 중화가 될 수 없었따.
조선은 작다고는 하더라도, 이제이 세계에서 유일하게존재하는 중화라고 하는 문명 의식이었따. 이른바 소중화사상으로, 일본은 어디까지나 문명적 척도에서 동이였다.
: 일본은 무위를 기준으로, 조선은 소중화사상을 기준으로 서로를 오랑캐 국가로 멸시하고 있었다.
조선 외교를 독점적으로 담당하고 있던 쓰시마 번
막부도 애초부터 있었던 조선 멸시관에 더하여, 재정상의 이유에서 조선 통신사의 에도 초빙을 허례로 생각하게 되었다.
막부 말기의 조일 관계는 삐걱거리고 있었다.
42쪽
조선을 향한 침략을 노골적으로 언명한 선구자는 사토 노부히로였다.
이러한 정략은 하시모토 사나이나 요시다 쇼인이 계승하였는데, 근대 일본의 팽창주의를 생각하는 선상에서 중요한 인물은 쇼인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요시다 쇼인의 밑에서 수학하였다.
요시다 쇼인은 <취하기 쉬운 조선, 만주, 지나를 무력으로 평정하고, 교역에서 러시아에 잃어버린 것을 조선과 만주에서 토지로 보상받아야 한다>라고 함.
43쪽
일본에서는 (조선의 유학과 달리) 지켜야 할 절대적인 <도>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구의 충격>이라는 위협에 대항하기 위하여 지켜 내야 할 무언가를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국체>였다.
국체란
1. 천황의 일계 지배
2. 천황과 만민의 친밀성
3. 만민의 자발적이고 끊임없는 봉공심
이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 권력이다. 여기에 심취한 자가 쇼인이었다.
<국체>는 메이지 헌법에서 근대 일본의 국가 원리로서 확립되었다.
44쪽
도쿠가와 막부에 <정한>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은 쓰시마 번이었다. 재정난에 빠졌던 쓰시마 번은 열강의 침략이 구체화되면 우선 조선이 위기에 빠지고, 그 경우에 쓰시마도 화를 입게 되므로, 막부의 원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정한>의 언설은 이러한 문맥에서 나왔다.
메이지 유신으로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1869년 1월 31일, 신정부는 쓰시마를 통하여 왕정복고의 사실을 조선에 고지하였는데, 그 서계가 일방적으로 구례를 배척한 것이었고,
이건은 조선 국왕을 격하하고 천황을 상위에 두는 것과 같은 문서였따. 조선은 이 서계의 수리를 당연히 거부하였다. 여기서 국교가 사실상 단절.
신정부는 조선이 이 서계를 거부할 것을 확신하면서 사절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53쪽
양민만이 부담하고 있던 군포를 호포나 동포란 명칭으로 바꾸어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주인인 사족으로부터도 징수했다. 이것은 조선의 신분제 역사상 획기적인 의미를 가졌따.
군역을 부담하지 않는 것은 사족의 중요한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우리나라가 종래부터 해왔던 양반 상인의 제도를 폐지하였던>인물이라고 평가.
55쪽
경복궁 재건 공사는 대원군 실각을 부른 최대의 원인
대원군은 대외 정책으로 쇄국양이 정책을 완강하게 관철. 그 시초는 천주교 탄압.
1866년 2월부터 탄압에 착수했다.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이 처형당했고, 조선인 신도의 경우 일설에 따르면 1만 명 가까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제까지 없었던 조선 역사상 최대의 종교 탄압이었다. 이것을 병인박해라 한다.
60쪽
일본에서는 <국체> 사상의 대두를 통해 <국가>가 절대화되었기 때문에 <도>는 부차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서구화로의 전환이 용이할 수 있었다. 서구에 대한 철저한 항전은 <국가>를 멸망시키는 것일 뿐이다.
61쪽
그에 반해 조선에서는 <국가>가 멸망하더라도 <도>에 따라 죽는 것이야말로 인륜의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다.
67쪽
조선 측의 접견대관 신헌과 부관 윤자승은 <만국공법>에 대하여 아무런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고, 조약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강화도 조약 당시)
68쪽
이러한 조약(강화도조약, 조일수호조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수호조규 제1관에서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라고 당연한 사실을 명기한 점이다.
이어서 일본의 치외 법권이 인정되었고, 조선의 관세 자주권은 부정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본은 일본 환폐의 유통권까지 획득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미곡 무역의 자유, 부산 이외에 원산과 인천을 개항할 것, 개항장 주변 4킬로미터 이내에서의 내지 통행권, 조선 연해의 측량권 등도 획득했다. 이로써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었다.
70쪽
(일본 내 정한파와 반대파의) 논의는 <정한> 그 자체의 도덕성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사족 반란을 방지하는 데 <정한>이 유효한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따.
77쪽
조선의 개화사상은 예상치 못한 탄생 양상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실학을 기반으로 서구 사상을 수용하였고, 거기에 불교가 그 촉매의 역할을담당함으로써 내재적으로 생성되었다.
85쪽
김옥균은 일본을 모델로 한 조선의 근대화와 대국화를 꿈꾸었고, 이후 동지들에게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86쪽
민씨 정권의 탄생 이후 국비가 낭비되었고, 매관매직의 풍조가 다시 성행하였따. 그 때문에 대원군 시대에는 완화되었던 가렴주구가 다시 심해졌다. 또한 민비는 무당이나 점쟁이들을 중용하여 기도나 점을 치는 데 막대한 포상금을 쏟아부었다. 국가개정은 궁핍해져 갈 뿐이었따.
88쪽
고종은 <지금부터 크고 작은 공무는 대원군이 결정하도록 명한다>라 고전교를 내려 대원군에게 정권을 위임하기에 이르렀다.(임오군란 당시)
90쪽
김윤식,어윤중, 김홍집 등의 온건 개화파와, 김옥균, 박영효, 홍역식, 서광범 등의 급진 개화파.
제물포조약(임오군란의 결과)
군란 주모자의 체포와 처벌 이외에, 피해자에 대한 배상금 5만 엔, 국가 배상 50만 엔, 일본 공사관의 일본군에 의한 경호 등을 합의하였다. 또한 이 조약과 동시에 일본수호조규속약도 조인되어 부산, 원산, 인천에서 일본상인의 활동 영역이 50리(20킬로미터)로 확장됨과 동시에 한성 근교의 양화진 개시와 일본 외교관원의 내지 여행권을 인정하였다.
99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죄사로 박영효를 정사로 하는 수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국기인 태극기는 이때 배 안에서 제작하여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101쪽
개혁은 민씨 정건과 알력을 초래했다. 민씨 정권도 분명하게 근대적 개혁에 반대했던 아니었으나 그것이 개화파 주도로, 게다가 급진적으로 실시되는 것에 대해서는 척족, 문벌 정치는 추진하는 입장에서 몹시 거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개혁의 추진은 어느 방향이든 자파 세력의 후퇴, 부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개혁의 추진은 어느 방향이든 자파 세력의 후퇴, 부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07쪽
애초부터 조선에서는 <부국강병>은 권력주의적 패도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어서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전통이 존재하였따. 그것을 대신하여 주창한 것이 <자강>이었다.
108쪽
갑신정변이 왜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라는 형태를 취하고, 더욱이 일본에게 전면적으로 의존하려 했는가, 그 본질은 전적으로 개화파의 우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민중의 이반은 개화파 정권 붕괴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109쪽
갑신정변에 깊이 관여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경우 좀 더 노골적이었다. 그는 애초부터 국권주의자였지만, 1885년 3월 16일 [지지신보]에 게재한 [탈아론]에서 조선과 청국을 <악우>라고 하며, 서구 문명국과 같은 태도로 양국을 상대해야 한다고 하였다.
122쪽
일본 화폐가 유통되는 것에 덧붙여 금은동의 비가가 국제 기준과 동떨어져 있던 상황을 이용함과 동시에, 사기적인 물물교환 등을 통해서 이루어진 약탈적인 금 수출은 1897년 일본이 금 본위제로 이행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메이지 첫해부터 청일 전쟁 전년까지 여러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금의 총액은 1,230만 엔 정도였는데, 그 가운데 68퍼센트는 조선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또한 가격이 싼 조선의 미곡이나 대두의 수입은 일본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고용하는 데 기여했다. 오사카나 고베의 노동자는 통상적인 쌀값의 3분의 1 정도로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38쪽
농민군 중에는 일부 부민이나 일본 소농민이 다수 참가하고 있었는데, 이들 대다수는 농번기였기 때문에 귀향해 버렸다. 그 가운데 농민군의 주체로 빈농층이나 무산자층, 천민 등의 존재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자치의 급진화는 이러한 요소가 원인이었다.
139쪽
종래의 집강소라고 하면 농민군 자치 기구라고 하여 상당히 유명하였는데, 이것은 착오이다.
일반적으로 집강은 촌장(풍헌, 약정, 존위 등)과는 별도로 촌정이나 풍교를 감찰하는 임원을 말했다. 자치기구는 어디까지나 도소였고, 양자는 원칙적으로 구별되었다.
152쪽
8월 24일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 내각에서는 이범진, 이완용, 안경수 등 정동파가 진출했따. 정동파란 한성의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 미국 공사관 등에 출입하고 있던 관료들을 말한다.
갑오개혁은 갑오농민전쟁에서 나타난 농민의 제반 요구를 국정 전반에 걸쳐 근대적 여러 개혁을 통하여 응하려 한 것이었다.
155쪽
민비 암살의 기도는 같은 해 9월 1일 부임함 퇴역 육군 중장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를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164쪽
러시아는 다른 열강의 조선에 대한 간섭을 방어하기 위해서 칭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고
칭제는 조선 왕조의 비원이었다. 여진족인 청에 복속하는 예를 행한 이래로 사대 지향의 한편으로 자립 지향도 끊임없이 존재하였다.
166쪽
그렇다면 왜 <조선>이라고 하는 국호를 폐지하여 <대한>으로 해야만 했는가? 그것은 <조선>이 고조선에서 유래하는 것이지만 국초에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을 때 명명된 국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은 제국에 어울리는 국호가 아니었다. 제국의 논리로서는 복수의 국가를 복속시킨 결과로서 탄생한 국가라고 하는 명분이 있어야만 했는데,그 결과 채용된 것이 <한>이었다. 고종의 조칙에 따르면 신화, 전설상의 단군과 기자에 의한 개국 이래로 고조선은 영토가 분할되어 <서로 다투도>있었는데, 고구려 당시 마한, 변한, 진한을 통합하여 <삼한>으로 삼고, 지금의 조선에 들어와 북쪽으로는 말갈, 남쪽으로는 탐라(제주도)를 정복하여 4,000리에 이르는 <일통의 업>을 이룬 것이 된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잘못된 것이나, 세분화된 <한>이 고구려 때를 계기로 서서히 확대하여 제국이 되었고,그 때문에 <대한>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논리이다.
173쪽
독립협회가 정력적으로 조직한 운동은 우선 열강에 대한 이권 양도를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활기를 띠고 있던 독립협회에서는 이권 양도 조사를 실시하려는 급진파가 대두하였고, 그들은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의 이권 양도에도 반대하였다. 다만 영국, 독일 일본에 대한 경계는 약하였고, 독립협회는 독특한 세력 균형관을 가지고 러시아와 그 동맹국인 프랑스를 특히 위험하게 보았다.
210쪽
조선인 가운데는 예외적으로 자진하여 인부에 나서는 자가 있었다. 일진회였다. 일진회는 원래 러일 개전 이후인 1904년 8월 18일 일본 군부의 지원을 받은 송병준이 창립한 친일 단체이다.
동학의 정통인 교단 중앙은 갑오농민전쟁 이후 서서히 개화주의로 방향을 틀었고, 러일 전쟁 시기에는 친일화하였다.
일진회 회원이 100만이라고 하였는데, 10만 명 내외의 세력을 과시하였고, 한말 최대의 정치,사회 단체가 되었따.
235쪽
최익현은 일본군과 싸우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나타난 적은 한국군이었다. 동족상잔의 전투를 그만두려 호소하였으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최익현은 의병의 해산을 결의했다.
:을미늑약에 항거하여 일어난 최익현은 그들 앞에 선 한국인 진위대를 보고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236쪽
최익현은 적의 쌀은 받지 않는다고 하여 절식하다가 얼마 후 사망하였다.
243쪽
일진회 송병준은 양위하지 않는다면 자결하든가, 천황에게 직접 사죄하든가, 아니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고종을 다그쳤다.
250쪽
<도>는 문명이었고, <국가>의 상위로 설정하였는데, 조선 왕조, 대한제국이 소중한 것은 <도>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주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의병장에게 문명을 위해 죽는 것은 나라를 위해 죽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 이인영의 행동이 이해는 가지만 단결된 13도 창의군이 일본군과 맞붙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긴 하다.
256쪽
대한 내셔널리즘을 적극적으로 고취하였던 인물이 바로 박은식과 신채호였따. 양자의 사상적 특징은 당시 사회 진화론은 <진보>를 중시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강한 와중에, 반대로 철저하게 <경쟁>을 중시하여 이해하였다는 점에 있따. 그 결과 양자는 현실 세계에는 가혹한 경쟁이 있을 뿐, 보편적 도의 등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국가는 도의보다도 무겁다고 주장한 것이다.
257쪽
주자학적 사유에 젖어 있었던 조선의 지식인은 이러한 사유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었는데, 박은식과 신채호는 도덕과 정치를 분리시킴으로써 진정한 국가주의를 정립하였다.
260쪽
보안법(1907년)을 실행하고, 이 법률로 내부대신은 안녕 유지를 위하여 결사를 해산하고, 경찰은 집회나 <다중 운동>을 제한, 금지할 수 있게 되었다.
언론 통제로서는 신문지법(1907년) 중요하다. 내부대신은 <안녕 질서>를 방해하는 신문을 압수하고, 발행 정지, 발행 금지 등이 가능하도록 했다. 반일 기사의 엄격한 금지였다.
게다가 통감부는 출판법(1909년)에 기초하여 출판을 허가제로 하여 검열을 엄격하게 하였고, 다수의 출판물을 발행 정지시켰다. 언론 탄압은 여기서 극에 달한 느낌이었다.
: 이미 나라가 강탈 당한 바 언론 탄압은 대수롭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261쪽
통감부는 베델을 공사 양면으로 감시함과 동시에 두 차례에 걸쳐 영국 영사관에 고발하였다. 영국은 치외 법권에 기초한 영국범의 적용과 일본과의 우호 관계 사이에서 고민하였는데, 결국은 준거로 삼아야 하는 추밀원령을 수정하였고, 영국인 발행 신문은 우호국의 관헌과 한국 신민 사이를 이간질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베델을 처벌하였다. 즉, 베델은 1907년 10월 6개월의 근신 처분을 받았고, 다시 1908년 6월에는 3주간의 금고형과 6개월의 근신 처분을 받았다. 금고형이란 한국으로부터의 추방이었다. 베델은 그래도 되돌아왔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불행하게도 3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하도록 하여 대한국 동포를 구출하라>가 유언이었다. 제국주의가 풍미하던 시대에 피억압 민족에게 일신을 바쳤던 보기 드문외국인이었다.
: 허버트와 베델에 대해서는 추후에 더 공부를 해야겠다. 조선인은 세계에서 제일 비능률적인 민족이라며 경멸했던 잭 런던과는 달랐다.
264쪽
선교사들은 <문명의 사도>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조선의 문명화를 부르짖는 이토 히로부미의 평판은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베델의 반골 정신과 일본 혐오는 두드러진 것이었다.
270쪽
<우리들은 죽을 수밖에 없겠지요. 괜찮아요. 그걸로 됐어요.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죽는 편이 훨씬 낫지요>라고 말하였는데, 죽음을 각오한 의병의 비장한 심정이 강하게 전해져 온다.
292쪽
병합조약과 동시에 조선귀족령을 실시하여 76명의 조선인이 귀족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한규설과 유길준을 비롯한 6명이 작위 수여를 거부했다. 또 대관을 역임한 김석진은 자결하였고, 궁내부대신으로 고종의 매제였던 조정구는 두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다. 순국자는 전국적으로 줄을 이었다. 양반 유생 9,811명에게는 경로금이 지급되었고, 효자 등 향촌의 모범자에게는 포상을 수여하였다. 또 대사면을 실시하여 부정을 한 지방 관료도 그 죄를 용서받았다. 그리고 일반 민중에 대해서는 미납 세금을 면제하였고, 추수에 한하여 지세를 5분의 4로 감면하였다. 더욱이 13도에는 국탕금 1700만엔을 지출하여 진휼이나 교육 보조금 등에 충당하였다.
이렇게 성대한 대접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의 진수성찬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 민중은 이제부터 어두운 가시나무 같은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막막한 불안감을 품으면서도, 그것을 지워 버리려는 듯 <공포의 보수>를 받아들이며 한순간 안도하는 숨을 내쉬었다.
293쪽
그와 같은 병합 합리화의 언설은 역사학자 기다 사다키치의 논의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다. 병합하던 해 그는 [한국의 병합과 국사]를 저술하여 아득한 고대에 분가하여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조선을 본가인 일본인 인수한 것이 한국 병합이라고 했다. 정체론과 타율성 사관의 입장을 <일선 동조론>으로 보강하면서 병합을 합리화한 논의였다.
295쪽
한편 한국병합조약이 조인된 밤의 연회 석상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득의만만하게 <고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살아 있다면 오늘 밤 달을 어떻게 보았을까?>라고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