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량치차오 지음, 최형욱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미산 소씨(소동파)가 말하기를, ˝육국을 멸한 것은 육국이지, 진나라가 아니다. 진나라를 멸한 것은 진나라이지 천하가 아니다˝라고 했다. 조선이 망하는 길을 취하지 않았다면 비록 100개의 일본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이 어찌하겠는가?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를 보지 못했는가? 그 국토 면적과 인구가 모두 조선보다 훨씬 못하지만, 유럽의 여러 큰 강국이 그들을 멸망시킬 수 없었다.

잭 런던의 러일전쟁 종군기를 읽고, 량치차오의 조선에 대한 기록을 보니 조선을 멸한 것은 조선이지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이 아닌듯하다.

조선을 대하는 량치차오의 망국사관적 접근과 사회진화론인 태도를 신경쓰며 사실과 해석, 객관적 해석과 의도적 해석을 잘 구분해 가며 읽는다면 한말 조선의 상황을 제3자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책 역시 내용이 어렵지 않아 수능을 준비할 때 읽었더라면 근현대사 교과서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밑줄, 생각

39쪽
나가모리안이 제출된 이후로 한국 조야의 상하 모두가 격렬히 저항했다. 그리고 일본 여론 역시 자국 정부를 올바르다고 여기지 않았다. 올바르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한국에 대한 수단이 준엄함에 있어서 잘못됐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가모리 씨가 본국에서 원래 저명 인사가 아닌데 이 중량감 떨어지는 개인에게 전 한국의 토지에 관한 전권을 맡겼다는 것이다.

42쪽
국기 기관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일은 재정권이요, 군정권이요, 외교권이다. 이 세 가지가 없다면 그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43쪽
그 외교 고문 관련 조약을 얼핏 보면 초빙되는 자가 한 미국인(스티븐스)인데, 나는 이 점에 대해 의혹이 생긴다.
나중에 스티븐스라는 그자가 워싱턴의 일본 공사관에서 수십 년 동안 근무했음을 알았다.
미국인은 이름뿐이고, 일본인이 그 실질이다.

44쪽
지금 일본은 조선의 병력을 제한하여 2만에서 1,000으로 줄임으로써 조선으로 하여금 영원히 되살아날 희망을 갖지 못하게 했다.

45쪽
시바 시로의 <한국의 장래>

갑. 한국 황제 반면론
을. 한일대제국 합병론 (대략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병립 군주국 같은 것을 말한다)
병. 고문정치론
정. 보호국론
무. 한국 영구중립론
기. 총독정치론
경. 정치방기/실업획득론(정치는 놔두고 실제적인 이익을 얻자는 것?)
신. 한국 황제 양위론
임. 망명객 이용론

47쪽
로마 문명은 실로 무수한 인류의 억울한 피, 고통스런 눈물로 이룬 결정체다. 하늘의 도는 친애함이 없어 오직 강자를 도울 뿐인지라 로마의 명성이 마침내 수천 년 동안 천지에 빛났다.

51쪽
아! 조선이 아직도 조선인의 조선이던가! 아직도 조선인의 조선이던가!
이번 일에서 조선 사람이 일본에 대해 범한 것은 돌을 던진 것뿐이고, 다친 사람은 보병 한 명뿐이었다. 다쳤지 죽지는 않았따. 경상이지 중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대가는 군대 장교 여섯 명이 포박되어 처벌받고, 정부의 대신 네 명이 면직되고, 전국의 사법권이 전이된 것이다.

53쪽
조선을 망하게 한 자는 처음에는 중국인이었고, 이어서 러시아인이었으며, 끝은 일본인이다. 그렇지만 중, 러, 일인이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스스로 망한 것이다.

59쪽
한일의정서
제4조 제3국의 침해 또는 내란에 의해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 또는 영토 보전이 위험해질 때, 대일본 제국 정부는 반드시 신속하게 때에 맞게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 제국 정부가 일하기 쉽게 충분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대일본 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전략상의 필요한 지점에 대해 때에 따라 수용한다.

이 의정서는 바로 일종의 보호조약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64쪽
도둑(러시아)이 이웃집(조선)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 대신 쫓아내고(일본)는 그 공을 핑계로 그 집 가산을 다 뺏는다면, 집주인(조선)으로서는 도리어 도둑(러시아)에게 잃는 게 나을 것이다. 지금의 정세가 이와 다를 게 무엇인가!

82쪽
한국 정부가 경질되고, 한국 황제가 양위하고, 한국 군대가 해산하고, 한일신협약이 성립되었다. 아! 한국이 망했다. 아! 한국이 완전히 망했다.

한국 황제가 어떻게 한국을 망하게 했는가? 기지가 조금 있으나 독단으로 처리하기를 좋아하고 정해진 의견이 없으며, 오직 그럭저럭 버티는 데에만 힘쓰며 사람들의 이목을 막으려고만 했다. 모든 일을 직접 결재하여 군신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나아가고 물러났다. 그는 사람을 씀에 있어서 버리기를 마치 바둑 두는 것과 같이 하여, 왕왕 1년 사이에 그 고문관 및 각부 대신들을 수십차례 경질하고 했다. 또 늘 외국에 기대어 그 지위를 보존하고자 했다. 10년 동안 개혁 조칙들이 수십 차례 내려졌으나 정치는 전에 비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한국에 이러한 황제가 있음으로 인해 한국은 마침내 망했다.

한국 인민이 어떻게 한국을 망하게 했는가? 한국 인민은 양반 관리들을 마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미천한 관직이라도 더없는 영광으로 여겼다. 조정에 벼슬하는 자는 오직 사당을 키워 서로 끌어주고 서로 밀치며, 자기 자신만 알고 국가가 있음은 몰랐따. 그 일반 백성은 국사를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줄곧 정치 분야에서의 운동을 하지 않았으며, 오직 위에서 은택을 베풀기만 바랐다. 권세와 이익에만 우르르 달려들어, 외국 사람이라도 나라 안에 세력이 있는 자를 보면 숭배라는 말이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한국에 이러한 인민이 있음으로 인해 한국은 마침내 망했다.

: 한국의 멸망을 조선은 개국부터 패도보다는 왕도를 추구했고 일본이 <국체>를 내세울 때 <도>를 중시했고 공격하기보다는 유지하려 했다는 것으로 변명할 수 있을까. 그럼 조선, 한국은 일본보다 빨리 근대화를 이루어 초기 자본주의로 진입하여 주변국들을 식민화했었어야 했던 것인가.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한국의 제국주의를 바라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19, 20세기의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제국주의로 귀결하였는데 우리도 그랬어야 했던 것인가? 나는 우리나라가 침략국이 아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19, 20세기의 세계적인 강탈에 기반하여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룬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점을 끝내고 전쟁을 지나 스스로 지금의 성과를 이뤘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물론 그 안에도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주저 없이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모르겠다.

84쪽
공자가 말하기를, 세 사람이 길을 갈 때는 반드시 거기에 내 스승이 있으니, 그 좋지 않은 점을 가려내어 내 잘못을 고친다고 했다. 믿음이 이와 같다면 한국 황제와 한국 인민은 또한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반면교사로 여겨지는 것이 딱히 유쾌하지 않다.

85쪽
한국의 멸망은 대체로 러일 선전의 날에 이루어졌다.

조선 귀족들은 양반이라고 부른다. 수백 년 동안 국권을 제멋대로 농단했다.

87쪽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은 사실 궁정에 있다. 오늘날 세상의 입헌국들에서 군주는 정치적 책임이 없고 악정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질고 어질지 못함은 한 나라의 정치와 큰 관계가 없다. 전제국가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국가의 명운이 전부 궁정에 달려 있다.

92쪽
명성황후가 제멋대로 정사에 임했다. 아름다운 부인이 부추겨 처리하니, 온 나라가 임금의 비가 있음은 알되 임금이 있음은 모르는 것이 거의 20년이나 되었다. 진나라 혜제가 가후에게 속박되었던 것과 같다.
여러 민씨가 조정 대열에 가득 포진하고 뇌물 수수가 공공연히 행해졌다. 수년 사이에 민씨 중에 백만금 이상 모아 집안을 일으킨 이가 10여 명이나 되었다.

102쪽
메가타 다네타로의 보고서에는, ˝사람들이 모두 조선의 재정이 문란하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에 ‘문란‘ 두 자로는 아직 부족하고, 그것은 대략 재정이 없는 형상이다˝라고 했다.

103쪽
미산 소씨(소동파)가 말하기를, ˝육국을 멸한 것은 육국이지, 진나라가 아니다. 진나라를 멸한 것은 진나라이지 천하가 아니다˝라고 했다.

조선이 망하는 길을 취하지 않았다면 비록 100개의 일본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이 어찌하겠는가?

107쪽
조선이 존재로부터 멸망에 이른바, 겪은 과정은 4단계였다. 첫째는 청나라에 예속되었던 시대, 둘째는 명목상 독립했던 시대, 셋째는 일본에 예속되었던 시대, 넷째는 일본에 병탄된 시대를 말한다. 일본이 조선을 멸망시킨바, 지나온 과정 역시 4단계였다. 첫째는 청나라와 조선을 다투던 시대, 둘째는 러시아와 조선을 다투던 시대, 셋째는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게 된 시대, 넷째는 조선을 병탄한 시대다.

114쪽
비정한론파도 물론 한국을 정벌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은 아니고, 지금은 아직 그 때가 아님을 말했을 따름이다.

118쪽
<예>에 이르기를 ˝남의 신하된 자에게는 외교가 없으니, 감히 두 임금을 섬기지 못한다˝고 했다. 조선은 우리에게 신하였는데,

: 고종이 중국에 기대, 러시아에 기대, 미국에 기대 한국을 보존하려 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던 짓이었던가.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고 있나? 미국에 기대, 일본에 기대 나라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지키는 것인가?

바야흐로 저들(일본)이 스스로 우리(중국)의 속국과 평등해지기를 원한다고 하며 은근히 공손하고 온순함에 머무는 줄 알았다.

: 중국이 강화도 조약을 대하는 자세. 그들은 조선이 청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조선과 같은, 청의 속국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119쪽
임오군란 ->제물포 조약
(4) 일본은 공사관에 수위병을 둔다. 조선에 일본군이 있게 된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런데 우리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정치적인 상식이 전혀 없었다. 악한 정치를 개혁하여 어지러움의 근원을 다스리지 못했고, 모질고 사나우며 방자하게 함부로 대하여 그 군주와 백성의 원망을 샀다. 때문에 기세 왕성한 신진 무리로 하여금 일본과 결탁하여 우리 나라를 막을 생각을 하게 했다(갑신정변). 이에 조선에는 중국당, 일본당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124쪽
갑신정변->톈진 조약

강화도 조약은 조선으로 하여금 우리(중국)의 속국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게 했고, 텐진 조약은 우리로 하여금 조선이 우리의 속국이 아님을 인정하게 했다.
톈진 조약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일본과 평등함을 명확히 했다.

129쪽
시모노세키 조약
이로부터 우리(중국)은 조선에서 다시는 발언권이 없게 되었다.

141쪽
한국을 멸망시킨 것은 일본이요, 일본을 도와 한국을 멸망시킨 것은 한국의 일진회다.
일진회의 영수는 송병준이요, 이용구인데, 병준이 특히 주동이었다.

145쪽
공정한 입장에서 논하자면, 일진회가 아니었다면 일본은 사실 아직 한국을 멸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일진회가 있었기에 일본은 한국을 멸망시키는 데 더 힘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진회의 성립은 한국을 망하게 한 일대 사건이라고 해도 안될 것이 없다.

152쪽
순종 황제는 마침내 황태자에게 일본 유학을 명했으며, 이토에게 태자태부를 맡겼고, 곧이어 태사로 올려 이끌고 다니게 했다. 이토는 이날부터 한국 황태자를 좌지우지하기를 마치 보모와 같이 했다.

155쪽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물으으니, 자신은 광복군의 한 장관으로서 의는 도망칠 수 없다고 답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으니, 자신은 이미 자신의 원수를 섬멸하여 자신의 일이 끝났으니 한 번 죽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구할 것이 없다고 답했다. 일본인들도 그에게 존경심이 생겼다.

156쪽
이토가 암살당하고 9일 뒤, 이용구는 회원 30만을 거느리고 연서하여 한일합방청원서를 그 정부 및 통감부에 바쳤다.
이용구와 그 회원들은 매일 각 고을로 유세를 다니며 합병의 이로움을 찬양했다.

157쪽
그 말이, ˝합벼이 되면 우리 한국 백성은 이제부터 드디어 일등 국민이 된다˝고 했다. 이렇게 서로 호소하자 한국 백성 중 이를 믿는 자들이 더욱더 많아졌다.

일본이 합병의 공을 찬양한다면, 송병준, 이용구가 마땅히 이토 히로부미 위에 있어야 할 것이다.

159쪽
한국 수상 이완용은 도쿄의 홍수를 위문하는 명목을 빌려 통감 관저를 방문했으며, 합병협약의 내용이 마침내 이때 결정되었다.

160쪽
(이완용) ˝우리 집안은 백성에게 원망을 들은 지 오래되었다. 이제 매국의 이름을 피하려고 하는 게 더구나 어찌 가능하겠는가? 일본의 덕을 입으면 그래도 그럭저럭 유지할 수 있다. 자리를 잃느니 앉아서 고깃상을 받겠다.˝

165쪽
열강들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행위에 대해 모두 예상했던 일로 보고 의아해하지 않았으며, 다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했따.

167쪽
조선이 멸망함에 군현의 장관이나 해외 유학생들 가운데는 순국자가 꽤 있었다. 그러나 한국 조정의 고관들은 한 사람도 순국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168쪽
무릇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정벌한 연후에 남이 정벌한다.
40년 동안 일본이 했던 바를 하고자 했던 나라는 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열매를 획득한 나라가 어째서 오직 일본이었는가?

177쪽
이 조약문(톈진조약)을 국제 법리로 해석하면, 조선이 중일 공동보호국임을 명확히 인정하는 것이다.

184쪽
아! 자연도태되어야만 할 자들이여, 조선의 귀족이로다. 중국의 가장 고귀하면서도 일없이 놀고먹는 어느 계급의 국민이여, 이것을 볼지어다.

251쪽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천하라는 세계질서와 화이라는 그 안의 조화 구도를 적절히 유지해오다가 천하와 화이로 포괄할 수 없는 타자인 서구와 충돌하면서 자연히 그간의 질서와 구도에 균열을 초래하게 되었다.

255쪽
사회진화론은 한말부터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조의 하나라ㅗ, 특히 1900년대 초 일제에 국권을 유린당하는 상황 속에서 지식인들은 민족의 실력 양성, 즉 계몽운동을 위한 논거로서 이를 적극 받아들였다.

260쪽
종합적으로 말해서 량치차오는 복고적 고증학에서 벗어나 금문공양학을 위주로 하는 경세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유학 기반하에 망명기간을 중심으로 일본을 통해 서구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또 먼저 근대화한 일본 학술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 한말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 상당수는 다분히 의식적이고 주동적으로 중국인 량치차오를 매개로 서구 및 일본을 학습하고, 아울러 량치차오 사상의 영향도 받았다.

261쪽
량치차오에게 있어서 조선은 동지보다는 서구와의 대비 속에서 중국을 비춰볼 수 있는 또 다른 특수한 타자였고, 또 아쉽게 잃어가는 속국이었다.

269쪽
량치차오의 조선에 대한 인식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조선 망국의 근본적인 원인이 조선, 조선인에 있다는 것으로, 이는 결국 중국의 계몽을 위한 논거가 되었으며 그 논조는 동정적인 데서 나아가 사뭇 비판적이고 비관적, 냉소적이었다.

량치차오는 조선은 총체적으로 부실한 가운데 특히 정치의 부재를 큰 문제로 제기했다.

272쪽
한일병합 발표를 앞두고도 황제 즉위 4주년 기념연회를 자연스럽게 치른 조선 군신들의 어이없는 행태는 당시 개인주의와사대주의가 팽배했던 데 비해 국가의식과 주권의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매국은 원래 값없는 일임에도, 이름을 적어 책공까지 하는구나. 엎어진 둥지에 어찌 알이 있겠는가? 아! 가련한 벌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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