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논술과 철학 강의 1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개별 사건에 대한 암기로써의 논술이 아니라 도올이 말하듯 철학 공부를 통해 세상사의 진리를 꿰뚫는 사고를 바탕으로 한 논술을 통해 실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진다. 철학을 하여야 철학사를 이해할 수 있고 철학사를 이해해야 철학을 이해할 수 있고, 이 둘을 다 하기 위해선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텐데 수능만 해도 벅찰 고등학생들이 철학과 철학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통해 사고력을 기르고 이 위에 자신의 세계관을 키워낼만한 물리적 시간이 존재할까.
48쪽
긴박하게 돌아가는 대륙의 상황을 주시하면서 김일성은 남조선인민들이 미제국주의자들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처절한 몸부림을 도와야한다는 열렬한 사명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 김일성과 조선노동당, 조선인민군, 북한의 인민들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때려잡는 우리의 영웅적 반공투사들을 숭배하라고 하는 것도 1차원적인 역사 해석에 의도적인 왜곡, 국가주의의 주입과 끝날줄 모르는 매카시즘, 지배세력의 의도적 활용으로 느껴져 들을 때마다 짜증나지만(이번에 개봉한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는 국방부와 국가보훈처에서 만든 건지 영화사에서 만든 건지 헷갈린다) 김일성이 개인의 욕망이 아닌 남한의 민중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보는 건 무리한 역사 재조명이 아닌가 싶다. 미제국주의자들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400만 명이 의미없이 처절하게 죽어나간 전쟁을 일으켰다고? 한국전쟁을 일본이 항복한 1945년부터 월남이 미군을 몰아낸 1975년까지의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는 것은 충분히 공감가지만, 남침이야 북침이냐(이게 도대체 남침이라는 게 남한이 침략했다는 건지 남한이 침략을 당했다는 건지 용어가 정확히 이해도 안되지만)가 어떻게 안 중요할 수가 있을까.
66쪽
결국 이러한 기나긴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일제의 잔재를 보다 더 바람직하게 청산해가고 있다고 나 도올은 믿는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67쪽
그의 절대군주적 권력은 두 가지 원칙에 뿌리박고 있었다. 그 하나는 ˝잘살아 보세˝였고 또 하나는 ˝빨갱이는 안돼˝였다.
: 지금까지도. 경제발전과 종북타령이라니. 욕망과 두려움.
68쪽
좌, 우익 경력의 폭로로 끊임없이 총검과 죽창에 시달렸던 민중들은 그러한 시련을 전혀 체험하지 못한 귀족자제 윤보선의 폭로보다는 오히려 빨갱이 시비로 곤욕을 치르는 박정희후보에게 더 뼈저린 동정의 염을 표했다.
90쪽
평화시에 군대가 존속할 수있는 이유도 민족을 위하여 얼마나 영예로운 전쟁을 싸웠냐하는 그 도덕성으로 확보되는 것이다.
91쪽
나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혼란이(4.19 이후의 상황) 어차피 거쳤어야 되는 창조적 혼란이며 도덕성없는 군인들에 의하여 진압되어야만 했던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고확신하지만.
92쪽
박정희의 죽어가는 모습은 거의 죽음을 고대하고 있던 자의 모습이었다. 자살에 가까운 죽음이었다.
93쪽
그것은 대의를 위한 전향이 아니라, 절대권력의 무의미한 존속을 위한 타성적 발악에 불과했다.
94쪽
전두환이 박정희에게서 배운 것은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바로 다스리고자 하는 민중들을 총검으로 무자비하게 찔러 죽이고 겁을 주어 다스려야 한다는 가치관이었다.
96쪽
한미연합사령관은 20사단의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이를 기꺼이 수락했다.(Your request is approved.)
97쪽
송원전문 학생 박영순양과 목포전문 학생 이경희양
73만 광주시민의 가슴은 이날 밤 이 가냘픈 목소리로 피멍이 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00쪽
폭력에는 오직 저항이 있을 뿐이며, 행동과 실천이 있을 뿐이다.
101쪽
논술이란 궁극적으로 모든 이데올로기의 권위나 억압을 무화시키며, 폭력을 제거하며, 우리 사회의 합리적 소통을 증대시키기 위한 교육적 장치로서 고안된 것이다.
106쪽
조선왕조의 시험들이 최소한 유신독재시절의 시험보다는 훨씬 그 모든 분위기가 더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 있다.
107쪽
간단하게 말하자면 여러분들의 사고력과 문장력을 테스트하여 우수한 인력을 대학에서는 뽑고싶어하는 것이다.
: 사고력과 문장력이 인물을 가려내는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가 될 수 있을까.
108쪽
나의 사고가 언어를 빌어 자기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난 당대의 언어체계가 나의 사고를 빌어 자기를 표현한다라고 거꾸로 표현할 수도 있다. 결국 나의 사고는 나의 언어의 노에다. 이때 ˝나의 언어˝란 나라는 개인의식을 초월하는 사회적 관계이며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당대의 가치의 체계와 관련이 있다.
114쪽
21세기 한국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서양문화를 알아야 하고, 서양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서양철학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희랍철학을 희랍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보고 싶다는 골동품적 호기심에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쓰고 있는 한국말을 정확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랍철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21세기의 ˝나˝는 이미 한국인(korean)이기 전에 세계인(Cosmopolitan)인 것이다.
115쪽
희랍인들의 ˝소피아˝ 즉 지혜는 그런 삶의 달관이나 영적 직관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변함없는 진리에 대한 통찰을 의미하는 것이다.
116쪽
플라톤은 철학을 하는 인간의 행위를 가리켜 ˝로고스를 부여한다˝ (logon didonai)라고 했는데, 이것은 어떤 현상에 대해 합리적인 근거 내지 이유를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인간이 인간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인간(anthropos)이라는 말의 어원 자체가 ˝자기가 본 것을 자세히 관찰하는 자˝ (anathron ha opope)라는 의미인 것이다.
117쪽
벼락이라는 사실을 신화적 허구와 관련시키지 않고 자연(physis) 자체의 이치로써 설명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사상가가 바로 서양철학사의 첫 장을 차지하는 탈레스라는 인물이었다.
119쪽
그들(희랍인)은 우리이 생각, 그 생각이 반복되어 형성한 관념, 그 관념이 조합하여 엮어내는 논리적 세계, 이런 것들이야말로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불변한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변화의 부정, 시공의 철저한 부정, 오로지 관념만의 긍정을 통해 파르메니데스라는 천재적 사상가는 변화가 전무하고 개별자가 전무한 단일한 세계를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120쪽
존재(Being)에 대한 희랍인들의 집착, 그 연구성과를 우리는 존재론(Ontology)이라고 부른다. 존재론이란 ˝참으로 있음˝에 관한 연구이다.
122쪽
분과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그 분과과학의 성과를 통합하고, 각 분과ㅗ가학이 자신마의 시야로써는 성찰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분과과학이 다룰 수 없는 인간사유와 가치의 근원적 영역을 끊임없이 통찰하는 데 철학의 기능은 충분히 살아있다. 오히려 분과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통합적인 철학에 대한 요청은 더욱 강하여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124쪽
철학에 접근하는 길로서 두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왔다. 하나는 철학자들이 제기한 많은 문제들 중 주요한주제들을 뽑아내어 그 주제별로 집중토론해가는 방식이다.
또 하나의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철학사적 접근이다.
126쪽
철학을 하지 않고서는 철학사를 쓸 수가 없다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철학을 하지 않고서는 철학사를 읽을 수도 없다.
철학은 철학사에 대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철학사가 제공하는 논쟁을 이해하고 그 이해된 논리적 체계 위에서 자신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수립하는 것이다.
129쪽
철학사의 제 개념은 개념의 의미보다는 그 개념의 의미를 전달하는 희랍인들의 삶이 우리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130쪽
철학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며, 그 사유체계가 타개하고자 하는 시대정신의 문제의식이 잇는 것이다.
133쪽
모든 역사는 현대사일 뿐이라는 크로체의 명언은 그대로 철학사에도 적용된다.
135쪽
대중의 참여가 없는 지적활동은 결국 한 문명의 악세사리로 끝나고 만다. 악세사리란 본시 있어도 좋은 것이요 없어도 좋은 것이다.
140쪽
어떤 인간도 타인의 형태를 지정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지식이나 지혜를 소유할 수 없다.
141쪽
개인의 의지에 반하는 어떠한 강제도 외면적 굴복 이상의 아무것도 보장치 못한다.
모든 광신은 이성과 관계없는 계시를 조성하는데, 그것은 자기 멋대로의 공상일 수가 있다. 우울증에 걸려있거나, 자기 기만증에 걸린 자들이 흔히 신성과 직접교제를 한다는 확신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계시는 반드시 이성에 의하여 판단되어야 한다. (Revelation must be judged by reason.)
관념의 기원에 관하여 그(로크)는 오로지 경험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이란 일차적으로 감관을 통하여 얻어지는 바깥세상(External world)의 경험에 의존하며, 다음으로는 내성(reflection)을 통하여 달성되는 심리적 사태의 내적세계(inner world)의 경험에 의존한다. 인간의 관념은 모두 이 감각(sensation)과 내성(reflection)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얻어질 수 없다. 선천적 본유관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인간은 백지와도 같다)
142쪽
˝우리는 사물을 인간의 견해에 의거하여 판단하면 안 된다. 인간의 견해를 사물에 의거하여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We should not judge of things by men`s opinions, but of opinions by things.)
그러나 로크는 이렇게 감각과 내성에 의하여 얻어지는 지식은 완벽한 확실성(certainty)을 제공할 수 없으며, 기꺽해야 확률성(probability) 이상의 것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43쪽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 이래로 지각은 지식의 바른 수단으로서의 자격을 얻지 못했고 그러한 생각은 중세기를 거쳐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에 이르기까지 매우 정당한 것으로 인지되었던 것이다.
162쪽
철학을 쉽게 하는 방법
알 수 있는 것만 정확히 알아도 된다.
첫째, 학생들은 우선 철학을 완벽하게 다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서양철학은 인간의 사고를 계발시키는 데는 으뜸이다.
163쪽
중국철학
중국철학은 인간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윤리적 과제상황에 관하여 매우 심오한 사유를 제공한다.
매우 프랙티컬하면서도 인성에 관한 깊은 통찰이 있다.
164쪽
한국철학을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우리민족의 사상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며, 중국철학의 곁가지로서 그것을 인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166쪽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들(일본)이 독자적인 자기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언어를 표현할 수 있는 한자 이외의 자기문자인 카나를 매우 일찍 개발했다는 사실이다. 헤이안 초기에 발전시켰으므로 자그마치 우리나라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보다 무려 600년이나 빠르다.
167쪽
우리나라는 아직도 국학이 부재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 고전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일천하다.
: 고전을 읽어보겠다며 동양의 고전으로는 사마천의 사기, 한비자의 한비자, 여불위의 여씨춘추, 맹자, 중용, 도덕경을 구입하고 서양의 고전으로는 플라톤의 국가, 대화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등을 산 반면 한국의 고전으로는 삼국유사 한 권 뿐이 없으며 그조차 읽어보지도 않았다. 한국의 고전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
168쪽
소박하게 배우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우리는 철학이라는 대해(大海)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해의 원칙은 나의 관심과 그 사상가의 관심과의 공감이다. 결국 공감되는 부분만이 이해되는 것이다. 물론 공감이 찬, 불찬이나 쾌, 불쾌의 좁은 선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찬동하지 않더라도 공감은 할 수 있는 것이다.
: 찬동하지 않는 주장에 공감할줄 아는 순간 대화가 가능할듯.
169쪽
철학자의 권위를 인정치 말라!
둘째,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 지구상에 존재한 어떠한 사상가나 종교가나 지도자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권위를 인정해서는 아니 된다.
세계 사대성인이라 부르는, 예수, 샤카무니, 콩쯔, 소크라테스도 우리에게 권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칸트를 공부하는 사람은 칸트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지, 칸트의 세계를 들여다보기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칸트는 되지 못하고 칸트의 흉내만 내기 위하여 칸트를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170쪽
철학사에 나오는 어떠한 인물을 접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를 같은 반에 있는 훌륭한 친구 이상으로 그를 존경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의 비범한 발상을 이해하고 나도 비범하게 되면 그뿐인 것이다. 평범한 누구든지 비범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예수가 될 수 있고, 내가 콩쯔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숭배하면 안 된다.
171쪽
종교적 신앙은 사유의 단절
종교교육이란 한 국가사회의 모든 체제가 종교에 의하여 지배되던 시저에만 유의미했던 교육이다.
172쪽
종교교육은 오로지 시민사회의 모든 자유, 평등의 원칙하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는 사람과 그것의 수혜를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택적으로, 자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종교학을 공부한다는 것과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구분되어야 하는 사태다. 신앙을 철학 위에 덮어 씌울 수는 없다.
: 철학이란 의심하는 것이고 신앙이란 의심 없이 믿는 것인데 그게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173쪽
종교가 없이도 인간은 얼마드닞 잘 살 수가 있다. 종교가 없이도 신앙심이 깊을 수 있으며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신적인 인성의 깊이를 지닐 수 있다.
: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사유로 종교를 만들어냈다면 인간은 그러한 사유에 종교의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그들의 사유에 따라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양심에 따르는 것만으로도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이란 매우 간단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교주의 독단적 연설, 신의 계시를 빙자한 어느 인간의 절대적 언설을 그냥 논리를 초월한 명령으로서 믿는 것이다.
174쪽
예수를 믿어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가 되어야 하고, 내가 나의 십자가를 나의 생애 속에서 창조해내야 하고, 내가 나의 삼 속에서 부활하고 내가 나의 부활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176쪽
예수를 생각하면서 살랑이는 가랑잎에도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면, 솔솔 부는 봄바람도 김일성 수령님의 덕분이라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행태를 공감할 수는 있을지언정 논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사실 북한 정권에서 아오지 탄광, 요덕정치범수용소를 만들어 수십만 명을 죽게 만들었다해도 하나님이 노아 일가만을 두고 모든 인류를 쓸어버린 지구 역사상 최악의 제노사이드보다 잔인했을까.
177쪽
정치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인간사회를 개선시키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것이 종교적 신앙의 대상은 아니다. 공산주의가 비판될 수 있다면, 민주주의도 얼마든지 비판될 수 있는 것이다.
월드컵에 이기는 나라라 해서 위대한 나라일 수가 없다. 월드컵을 응원하는 것이 애국, 애족의 대의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냥 놀이요 재미요 좀 흥분되는 소일거리일 뿐이다.
191쪽
핵심적 개념만을 집중적으로 이해하라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철학사적 기술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 개념들을 집중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193쪽
구체적 맥락이 없는 질문은 질문이 아니다. 그리고 사생활에 관한 질문은 질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그것은 대답해야 할 하등의 가치나 의무가 없다.
194쪽
한국의 젊은이들은 일체 타인의 용모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을 인사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나서 누가 좋은 사람이라는 둥, 누가 나쁜 사람이라는 둥 이런 ˝사람이야기˝를 해서는 아니 된다. 이것은 모두 반철학적인 사유이고 시간살해이다.
195쪽
젊은이들은 추상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쾌락이란 무엇인가?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평등이란 무엇인가? 법이란 무엇인가? 우주는 과연 어떻게 구성된 것일까? 우주는 유한할까 무한할까? 실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기 서 잇는 저 나무를 나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청춘을 보내는 자만이 진리의 문으로 다가갈 수 있고 궁극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196쪽
우정은 끊임없이 상대방을 성장시키는 것이라야 한다. 우정은 철학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정은 결코 부질없는 가십이나 쾌락의 동반자가 아닌 것이다. 이성간의 사랑도 철학이 없이는 그 매력이 지속될 길이 없다. 이성간의 사랑처럼 인간을 계발시키는 철학도 없다.
207쪽
논술은 말이 아닌 글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하고, 그 글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구어를 기준으로 삼기는 하지만, 기나긴 문어적 전통을 수용하여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명료하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의 문장론의 서두로서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208쪽
글이란 이해되기 위한 것이다. 내가 쓰는 글은 우선 내가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나의 이해의 구조를 내 글을 읽는 사람에게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멋있는 문구를 나열하는 것보다는 단 한마디라도 내가 자신있게 이해하고 타인에게 확실하게 이해될 수 있는 소박한 글을 써야하는 것이다.
209쪽
개화기때 <독립신문>의 글과 오늘날의 글을 비교해보면 불과 1세기의 차이지만 변화의 폭은 극심하다. 앞으로 1세기 후의 한국말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210쪽
논술의 문장은 너무 늙어서도 안 되고 너무 젊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젊고 아름다운 청년의 언어를 써야한다.
212쪽
항상 의미의 면적이 큰 단어를 선택하는 것보다는 의미의 면적이 좁은 단어를 선택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213쪽
의미의 면적을 좁힌다는 것은 그 단어의 지시체를 명료하게 인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문장은 애매하거나, 의미의 면적이 포괄적임으로 인하여 아름다울 수도 있따. 이때 중요한 것은, 모든 ˝애매성˝은 그 애매성 자체가 명료하게 의도된 것일 때만 문장의 요소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명료하게 의도되지 않은 애매성이나 포괄성은 무지의 광란일 뿐이요, 문장의 타락이다. 결국 문장에서는 명료하지 않은 단어의 선택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신이니, 자유니, 정의니 하는 따위의 의미의 면적을 종잡을 수 없는 추상언어보다는 구체적인 일상사물에 즉하여 사고를 진행하고 문장을 구성하는 것이 청년들의 할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명료하게!
214쪽
빠른 시간에 전체적 구상을 완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체를 묵을 수 있는 명료한 주제를 잡아내는 일이다.
215쪽
희랍의 시닉스(견유학파)의 대표적 사상가인 디오게네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천상에서 불과 기술을 훔쳐다가 인간세에 전하여 제우스의 형벌을 받게 된 것은 정말 쌤통이라고 박수치며 좋아했다. 사슬에 묶여 독수리가 그의 불멸의 간을 께속 쪼아대는 것은 너무도 정당한 형벌이라고 찬양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장난으로 인간세가 너무도 복잡해지고 빈부, 권력의 차와 억압구조가 생겨나고 지나치게 인위화되어, 문명이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18쪽
논술시험의 주제는 매우 일상적인 체험의 구도 속에서 평이하게 선택될수록 좋은 것이다. 문제는 쉽게 내고, 그것에 대해 논술하는 자의 정신 세계의 깊이를 형량하는 것이 출제의 기본정신이 되어야 한다.
: 면접을 본다고 해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219쪽
답안을 글로 작성하기 전에 머릿속에서 논리의 대강을 구성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논리적 주제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주제의식에 따라 처음과 끝을 먼저 생각해두는 것이 좋다. 처음시작부터 문장은 정갈하고 자신있고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고래로 명문장들은 첫 구절에 강력한 명구들이 많다.
문장을 쓰려할 때, 첫 구와 마지막 구에 대강 만족할 만한 명구가 떠오르면 그것은 성공적 문장으로 가는 길을 확보한 셈이다.
220쪽
명사적 구성법보다는 동사적 구성
명사는 정적이며 고착적이다. 그렇게 되면 문장 자체가 정적이 되어버리고 다이내미즘을 잃는다. 동사는 움직인다. 다라서 문장도 움직이게 된다.
222쪽
명사를 계속 포개는 구성법의 오류와 중언부언의 반복의 오류가 같이 들어있다.
: 나 역시 글을 쓸 때 문장을 명사로 범벅을 해놔서 문장에 생기가 없고 흐르지 않고 막힌 느낌을 받으며 꼴보기 싫은 허세가 묻어나는 느낌을 받는다. 명사를 덜어내고 동사를 사용하여 문장이 흐르게 하자. 문장을 따르는 독자의 시선에 막힘이 없게 하고 논리와 사고의 흐름 역시 시원하게 흐르게 하자. 내가 그런 능력이 있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사실 문장은 고사하고 맞춤법도 어렵다.
223쪽
우리말은 주어가 생략되거나 서양언어, 특히 인도유러피안어족의 언어가 규정하는 바 주어가 아예 없거나 해도 훌륭한 문장이 구성될 수가 있다. 그러나 주어를 명기할 필요가 있을 때는 확실하고 자신있게, 그리고 명료하게 제시해야만 문장이 힘이 있게 된다. 주어에 대한 애매한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 주어가 있고, 없고를 명료하게 의식하면서 문장을 써야한다.
225쪽
˝가령, 자신이 히틀러를 숭상했다고 치자, 그때는 자신이 히틀러처럼 생각하게 되어서....˝
여기서 ˝자신˝이라는 주어는 애매하다. 애매한 만큼 힘이 없다.
228쪽
˝시장은 사람이 많다.˝
이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이 영어의 훈련을 받아서 이것을 틀린문장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고치려 할 것이다.
˝시장에는 사람이 많다.˝
우리말에서는 장소를 나타내든지, 시간을 나타내든지, 무엇이든지 주부가 될 수 있다. 그것이 행위자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235쪽
불필요한 과정은 피하는 것이 좋다.
236쪽
문장을 될 수 있는 대로 간결하게, 불필요한 이음매 없이, 구성하라는 것이다.
학생들의 답안지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심하게 나타나는 문제는 중언부언의 오류이다. 같은 의미의 어휘들을 중복하여 나열함으로써 불필요하게 문장을 지리하고 연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237쪽
중언부언의 모든 것들을 잘라내 버려야 한다.
중언부언의 문제는, 문제의식만 가지고 있으면, 자기가 쓴 글이라 할지라도 계속 읽으며 스스로 교정을 보면서 쉽게 적발해낼 수 있다.
간결함은 명문장의 필요충분조건이다.
239쪽
파라렐리즘, 대구법. 병문.
명사는 명사끼리, 동사는 동사끼리, 형용사는 형용사끼리, 수사는 수사끼리, 부사는 부사끼리 짝을 맞추어가며 문장을 구성하는 것이다.
242쪽
비유를 동원할 때는 논지를 확실하게 강화하는 방향으로 살려야 한다. 비유, 은유, 속담, 고사성어, 경구, 명언, 고전인용 등등은 문장의 재미를 주거나 많은 내용을 압축시키는 효과가 있다. 허나 이런 수사법을 너무 자주 쓰면 논리적 힘이 오히려 약해진다.
249쪽
모든 문장은 한국말로 쓰여져야 한다. 원문을 표기할 필요가 있을 때는 괄호를 사용하면 된다.
253쪽
˝고유한 한국어˝가 존재한다는 주장 그 자체가 사기요, 픽션이요, 무지의 소치다. 언어는 끊임없이 변해온 것이다. 우리나라가 서양과 접촉하기 이전의 말만을 고유어라고 부를 수가 없다.
254쪽
순수 우리말이라는 픽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살아있는 오늘의 나의 말을 죽이고 제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일본말의 잔재는 혐오하면서, 영어단어사용은 자랑스럽게 뽐내는 것도 일관성이 없다.
써서 편하게 통용되고 있으면 다 우리말인 것이다.
255쪽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말들이면 무엇이든지 써라! 동, 서, 고, 금을 가리지 마라! 고유어에 구애받지 말라! 그러나 아름다운 우리말 어휘는 많이 발굴할 수록 좋다.
256쪽
문장실력의 핵심은 반복적 훈련이다.
일기는 쓰는 것이 좋다.
258쪽
자기가 쓴 글은 반드시 자기가 여러 번 읽으면서 반성의 여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고,
문장은 끊임없는 교정을 통해 발전한다.
260쪽
전 국민이 식민지 노예상태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비겁하고 비굴하고 기회주의적인 민족반역자들이 설치게 되는 것은 도덕의 부재를 논하기 전에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의 소치라 할 수도 있다. 압제적 상황에서 비열한 인간들이 생겨나는 것은 가련한 인간의 허약함을 탓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264쪽
힘은 앎에서 온다. 그 앎은 부분적 앎이 아니라 전체적 앎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