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량치차오 지음, 최형욱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미산 소씨(소동파)가 말하기를, ˝육국을 멸한 것은 육국이지, 진나라가 아니다. 진나라를 멸한 것은 진나라이지 천하가 아니다˝라고 했다. 조선이 망하는 길을 취하지 않았다면 비록 100개의 일본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이 어찌하겠는가?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를 보지 못했는가? 그 국토 면적과 인구가 모두 조선보다 훨씬 못하지만, 유럽의 여러 큰 강국이 그들을 멸망시킬 수 없었다.

잭 런던의 러일전쟁 종군기를 읽고, 량치차오의 조선에 대한 기록을 보니 조선을 멸한 것은 조선이지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이 아닌듯하다.

조선을 대하는 량치차오의 망국사관적 접근과 사회진화론인 태도를 신경쓰며 사실과 해석, 객관적 해석과 의도적 해석을 잘 구분해 가며 읽는다면 한말 조선의 상황을 제3자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책 역시 내용이 어렵지 않아 수능을 준비할 때 읽었더라면 근현대사 교과서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밑줄, 생각

39쪽
나가모리안이 제출된 이후로 한국 조야의 상하 모두가 격렬히 저항했다. 그리고 일본 여론 역시 자국 정부를 올바르다고 여기지 않았다. 올바르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한국에 대한 수단이 준엄함에 있어서 잘못됐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가모리 씨가 본국에서 원래 저명 인사가 아닌데 이 중량감 떨어지는 개인에게 전 한국의 토지에 관한 전권을 맡겼다는 것이다.

42쪽
국기 기관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일은 재정권이요, 군정권이요, 외교권이다. 이 세 가지가 없다면 그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43쪽
그 외교 고문 관련 조약을 얼핏 보면 초빙되는 자가 한 미국인(스티븐스)인데, 나는 이 점에 대해 의혹이 생긴다.
나중에 스티븐스라는 그자가 워싱턴의 일본 공사관에서 수십 년 동안 근무했음을 알았다.
미국인은 이름뿐이고, 일본인이 그 실질이다.

44쪽
지금 일본은 조선의 병력을 제한하여 2만에서 1,000으로 줄임으로써 조선으로 하여금 영원히 되살아날 희망을 갖지 못하게 했다.

45쪽
시바 시로의 <한국의 장래>

갑. 한국 황제 반면론
을. 한일대제국 합병론 (대략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병립 군주국 같은 것을 말한다)
병. 고문정치론
정. 보호국론
무. 한국 영구중립론
기. 총독정치론
경. 정치방기/실업획득론(정치는 놔두고 실제적인 이익을 얻자는 것?)
신. 한국 황제 양위론
임. 망명객 이용론

47쪽
로마 문명은 실로 무수한 인류의 억울한 피, 고통스런 눈물로 이룬 결정체다. 하늘의 도는 친애함이 없어 오직 강자를 도울 뿐인지라 로마의 명성이 마침내 수천 년 동안 천지에 빛났다.

51쪽
아! 조선이 아직도 조선인의 조선이던가! 아직도 조선인의 조선이던가!
이번 일에서 조선 사람이 일본에 대해 범한 것은 돌을 던진 것뿐이고, 다친 사람은 보병 한 명뿐이었다. 다쳤지 죽지는 않았따. 경상이지 중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대가는 군대 장교 여섯 명이 포박되어 처벌받고, 정부의 대신 네 명이 면직되고, 전국의 사법권이 전이된 것이다.

53쪽
조선을 망하게 한 자는 처음에는 중국인이었고, 이어서 러시아인이었으며, 끝은 일본인이다. 그렇지만 중, 러, 일인이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스스로 망한 것이다.

59쪽
한일의정서
제4조 제3국의 침해 또는 내란에 의해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 또는 영토 보전이 위험해질 때, 대일본 제국 정부는 반드시 신속하게 때에 맞게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 제국 정부가 일하기 쉽게 충분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대일본 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전략상의 필요한 지점에 대해 때에 따라 수용한다.

이 의정서는 바로 일종의 보호조약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64쪽
도둑(러시아)이 이웃집(조선)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 대신 쫓아내고(일본)는 그 공을 핑계로 그 집 가산을 다 뺏는다면, 집주인(조선)으로서는 도리어 도둑(러시아)에게 잃는 게 나을 것이다. 지금의 정세가 이와 다를 게 무엇인가!

82쪽
한국 정부가 경질되고, 한국 황제가 양위하고, 한국 군대가 해산하고, 한일신협약이 성립되었다. 아! 한국이 망했다. 아! 한국이 완전히 망했다.

한국 황제가 어떻게 한국을 망하게 했는가? 기지가 조금 있으나 독단으로 처리하기를 좋아하고 정해진 의견이 없으며, 오직 그럭저럭 버티는 데에만 힘쓰며 사람들의 이목을 막으려고만 했다. 모든 일을 직접 결재하여 군신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나아가고 물러났다. 그는 사람을 씀에 있어서 버리기를 마치 바둑 두는 것과 같이 하여, 왕왕 1년 사이에 그 고문관 및 각부 대신들을 수십차례 경질하고 했다. 또 늘 외국에 기대어 그 지위를 보존하고자 했다. 10년 동안 개혁 조칙들이 수십 차례 내려졌으나 정치는 전에 비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한국에 이러한 황제가 있음으로 인해 한국은 마침내 망했다.

한국 인민이 어떻게 한국을 망하게 했는가? 한국 인민은 양반 관리들을 마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미천한 관직이라도 더없는 영광으로 여겼다. 조정에 벼슬하는 자는 오직 사당을 키워 서로 끌어주고 서로 밀치며, 자기 자신만 알고 국가가 있음은 몰랐따. 그 일반 백성은 국사를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줄곧 정치 분야에서의 운동을 하지 않았으며, 오직 위에서 은택을 베풀기만 바랐다. 권세와 이익에만 우르르 달려들어, 외국 사람이라도 나라 안에 세력이 있는 자를 보면 숭배라는 말이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한국에 이러한 인민이 있음으로 인해 한국은 마침내 망했다.

: 한국의 멸망을 조선은 개국부터 패도보다는 왕도를 추구했고 일본이 <국체>를 내세울 때 <도>를 중시했고 공격하기보다는 유지하려 했다는 것으로 변명할 수 있을까. 그럼 조선, 한국은 일본보다 빨리 근대화를 이루어 초기 자본주의로 진입하여 주변국들을 식민화했었어야 했던 것인가.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한국의 제국주의를 바라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19, 20세기의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제국주의로 귀결하였는데 우리도 그랬어야 했던 것인가? 나는 우리나라가 침략국이 아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19, 20세기의 세계적인 강탈에 기반하여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룬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점을 끝내고 전쟁을 지나 스스로 지금의 성과를 이뤘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물론 그 안에도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주저 없이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모르겠다.

84쪽
공자가 말하기를, 세 사람이 길을 갈 때는 반드시 거기에 내 스승이 있으니, 그 좋지 않은 점을 가려내어 내 잘못을 고친다고 했다. 믿음이 이와 같다면 한국 황제와 한국 인민은 또한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반면교사로 여겨지는 것이 딱히 유쾌하지 않다.

85쪽
한국의 멸망은 대체로 러일 선전의 날에 이루어졌다.

조선 귀족들은 양반이라고 부른다. 수백 년 동안 국권을 제멋대로 농단했다.

87쪽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은 사실 궁정에 있다. 오늘날 세상의 입헌국들에서 군주는 정치적 책임이 없고 악정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질고 어질지 못함은 한 나라의 정치와 큰 관계가 없다. 전제국가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국가의 명운이 전부 궁정에 달려 있다.

92쪽
명성황후가 제멋대로 정사에 임했다. 아름다운 부인이 부추겨 처리하니, 온 나라가 임금의 비가 있음은 알되 임금이 있음은 모르는 것이 거의 20년이나 되었다. 진나라 혜제가 가후에게 속박되었던 것과 같다.
여러 민씨가 조정 대열에 가득 포진하고 뇌물 수수가 공공연히 행해졌다. 수년 사이에 민씨 중에 백만금 이상 모아 집안을 일으킨 이가 10여 명이나 되었다.

102쪽
메가타 다네타로의 보고서에는, ˝사람들이 모두 조선의 재정이 문란하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에 ‘문란‘ 두 자로는 아직 부족하고, 그것은 대략 재정이 없는 형상이다˝라고 했다.

103쪽
미산 소씨(소동파)가 말하기를, ˝육국을 멸한 것은 육국이지, 진나라가 아니다. 진나라를 멸한 것은 진나라이지 천하가 아니다˝라고 했다.

조선이 망하는 길을 취하지 않았다면 비록 100개의 일본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이 어찌하겠는가?

107쪽
조선이 존재로부터 멸망에 이른바, 겪은 과정은 4단계였다. 첫째는 청나라에 예속되었던 시대, 둘째는 명목상 독립했던 시대, 셋째는 일본에 예속되었던 시대, 넷째는 일본에 병탄된 시대를 말한다. 일본이 조선을 멸망시킨바, 지나온 과정 역시 4단계였다. 첫째는 청나라와 조선을 다투던 시대, 둘째는 러시아와 조선을 다투던 시대, 셋째는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게 된 시대, 넷째는 조선을 병탄한 시대다.

114쪽
비정한론파도 물론 한국을 정벌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은 아니고, 지금은 아직 그 때가 아님을 말했을 따름이다.

118쪽
<예>에 이르기를 ˝남의 신하된 자에게는 외교가 없으니, 감히 두 임금을 섬기지 못한다˝고 했다. 조선은 우리에게 신하였는데,

: 고종이 중국에 기대, 러시아에 기대, 미국에 기대 한국을 보존하려 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던 짓이었던가.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고 있나? 미국에 기대, 일본에 기대 나라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지키는 것인가?

바야흐로 저들(일본)이 스스로 우리(중국)의 속국과 평등해지기를 원한다고 하며 은근히 공손하고 온순함에 머무는 줄 알았다.

: 중국이 강화도 조약을 대하는 자세. 그들은 조선이 청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조선과 같은, 청의 속국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119쪽
임오군란 ->제물포 조약
(4) 일본은 공사관에 수위병을 둔다. 조선에 일본군이 있게 된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런데 우리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정치적인 상식이 전혀 없었다. 악한 정치를 개혁하여 어지러움의 근원을 다스리지 못했고, 모질고 사나우며 방자하게 함부로 대하여 그 군주와 백성의 원망을 샀다. 때문에 기세 왕성한 신진 무리로 하여금 일본과 결탁하여 우리 나라를 막을 생각을 하게 했다(갑신정변). 이에 조선에는 중국당, 일본당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124쪽
갑신정변->톈진 조약

강화도 조약은 조선으로 하여금 우리(중국)의 속국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게 했고, 텐진 조약은 우리로 하여금 조선이 우리의 속국이 아님을 인정하게 했다.
톈진 조약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일본과 평등함을 명확히 했다.

129쪽
시모노세키 조약
이로부터 우리(중국)은 조선에서 다시는 발언권이 없게 되었다.

141쪽
한국을 멸망시킨 것은 일본이요, 일본을 도와 한국을 멸망시킨 것은 한국의 일진회다.
일진회의 영수는 송병준이요, 이용구인데, 병준이 특히 주동이었다.

145쪽
공정한 입장에서 논하자면, 일진회가 아니었다면 일본은 사실 아직 한국을 멸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일진회가 있었기에 일본은 한국을 멸망시키는 데 더 힘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진회의 성립은 한국을 망하게 한 일대 사건이라고 해도 안될 것이 없다.

152쪽
순종 황제는 마침내 황태자에게 일본 유학을 명했으며, 이토에게 태자태부를 맡겼고, 곧이어 태사로 올려 이끌고 다니게 했다. 이토는 이날부터 한국 황태자를 좌지우지하기를 마치 보모와 같이 했다.

155쪽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물으으니, 자신은 광복군의 한 장관으로서 의는 도망칠 수 없다고 답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으니, 자신은 이미 자신의 원수를 섬멸하여 자신의 일이 끝났으니 한 번 죽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구할 것이 없다고 답했다. 일본인들도 그에게 존경심이 생겼다.

156쪽
이토가 암살당하고 9일 뒤, 이용구는 회원 30만을 거느리고 연서하여 한일합방청원서를 그 정부 및 통감부에 바쳤다.
이용구와 그 회원들은 매일 각 고을로 유세를 다니며 합병의 이로움을 찬양했다.

157쪽
그 말이, ˝합벼이 되면 우리 한국 백성은 이제부터 드디어 일등 국민이 된다˝고 했다. 이렇게 서로 호소하자 한국 백성 중 이를 믿는 자들이 더욱더 많아졌다.

일본이 합병의 공을 찬양한다면, 송병준, 이용구가 마땅히 이토 히로부미 위에 있어야 할 것이다.

159쪽
한국 수상 이완용은 도쿄의 홍수를 위문하는 명목을 빌려 통감 관저를 방문했으며, 합병협약의 내용이 마침내 이때 결정되었다.

160쪽
(이완용) ˝우리 집안은 백성에게 원망을 들은 지 오래되었다. 이제 매국의 이름을 피하려고 하는 게 더구나 어찌 가능하겠는가? 일본의 덕을 입으면 그래도 그럭저럭 유지할 수 있다. 자리를 잃느니 앉아서 고깃상을 받겠다.˝

165쪽
열강들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행위에 대해 모두 예상했던 일로 보고 의아해하지 않았으며, 다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했따.

167쪽
조선이 멸망함에 군현의 장관이나 해외 유학생들 가운데는 순국자가 꽤 있었다. 그러나 한국 조정의 고관들은 한 사람도 순국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168쪽
무릇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정벌한 연후에 남이 정벌한다.
40년 동안 일본이 했던 바를 하고자 했던 나라는 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열매를 획득한 나라가 어째서 오직 일본이었는가?

177쪽
이 조약문(톈진조약)을 국제 법리로 해석하면, 조선이 중일 공동보호국임을 명확히 인정하는 것이다.

184쪽
아! 자연도태되어야만 할 자들이여, 조선의 귀족이로다. 중국의 가장 고귀하면서도 일없이 놀고먹는 어느 계급의 국민이여, 이것을 볼지어다.

251쪽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천하라는 세계질서와 화이라는 그 안의 조화 구도를 적절히 유지해오다가 천하와 화이로 포괄할 수 없는 타자인 서구와 충돌하면서 자연히 그간의 질서와 구도에 균열을 초래하게 되었다.

255쪽
사회진화론은 한말부터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조의 하나라ㅗ, 특히 1900년대 초 일제에 국권을 유린당하는 상황 속에서 지식인들은 민족의 실력 양성, 즉 계몽운동을 위한 논거로서 이를 적극 받아들였다.

260쪽
종합적으로 말해서 량치차오는 복고적 고증학에서 벗어나 금문공양학을 위주로 하는 경세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유학 기반하에 망명기간을 중심으로 일본을 통해 서구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또 먼저 근대화한 일본 학술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 한말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 상당수는 다분히 의식적이고 주동적으로 중국인 량치차오를 매개로 서구 및 일본을 학습하고, 아울러 량치차오 사상의 영향도 받았다.

261쪽
량치차오에게 있어서 조선은 동지보다는 서구와의 대비 속에서 중국을 비춰볼 수 있는 또 다른 특수한 타자였고, 또 아쉽게 잃어가는 속국이었다.

269쪽
량치차오의 조선에 대한 인식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조선 망국의 근본적인 원인이 조선, 조선인에 있다는 것으로, 이는 결국 중국의 계몽을 위한 논거가 되었으며 그 논조는 동정적인 데서 나아가 사뭇 비판적이고 비관적, 냉소적이었다.

량치차오는 조선은 총체적으로 부실한 가운데 특히 정치의 부재를 큰 문제로 제기했다.

272쪽
한일병합 발표를 앞두고도 황제 즉위 4주년 기념연회를 자연스럽게 치른 조선 군신들의 어이없는 행태는 당시 개인주의와사대주의가 팽배했던 데 비해 국가의식과 주권의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매국은 원래 값없는 일임에도, 이름을 적어 책공까지 하는구나. 엎어진 둥지에 어찌 알이 있겠는가? 아! 가련한 벌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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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위해 어떤 책이 좋을지 알아보고 주디스 버틀러란 작가가 유명하다기에 책 읽기를 시도했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옮긴이 해제부터 도저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페미니즘, 젠더 문제를 철학적 이론을 이용하여 이야기하다보니 책은 고사하고 단어 하나 하나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 우에노 치즈코의 책을 읽어야겠다. 공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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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조선과 일본
조경달 지음, 최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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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사건과 사건의 비어있던 연결고리를 채울 수 있는 책. 고등학생의 경우 근현대사 교과서를 1독 후 이 책을 읽고 다시 교과서를 보면 그 흐름을 좀 더 자연스럽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개화파는 갑자기 어디서 등장했고 청나라와 일본만 등장하던 조선 후기 역사에 갑자기 아관파천이니 친러파니 하는 건 왜 나온 것이며 하는 등의 전후 사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후기 조선의 통사이자 일본과의 관계사이기 때문에 내용이 어렵지는 않다. 근대사를 가볍게 복습해본다는 느낌으로 읽으면 좋을듯.

동학과 동학농민군의 자치 시기에 대한 평가는 왜 이리 미미한 것일까. 동학농민군이 전라도를 해방구로 만들어 스스로 개혁해가며 통치한 것을 보면 파리 꼬뮨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이리 근현대사 교육에서 비중이 낮은가. 동학은 인내천 평등사상을 주창하였는데 왜 이는 우리나라의 근대화 역사에 아무런 족적을 남기지 못한 것일까. 그것이 성과로 이루어지지 못해서?

밑줄, 생각

6쪽
한국의 국민 국가화는 그리 용이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재빨리 근대화한 일본이 한국의 국민 국가화를 저해했다는 것이 종래의 견해인데,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에는 일본처럼 간단하게 서구화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한국에는 문명 의식 차원에서 일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우월 의식이 있었으며, 유교적 민본주의라는 정치 문화가 각계각층에 널리 침투해 있었다. 단순히 위정척사파의 사상뿐만이 아니라, 개화파의 사상도 유교적 민본주의에 구속당하면서 근대화를 구상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 세계도 공유하는 정치 문화였다.

10쪽
두 나라는 마주 보고 있는 거울처럼, 조선은 일본의 그늘이 되었고, 조선이 그렇게 될수록 일본은 양지로서 빛났다.

11쪽
오늘날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은 식민지 근대성론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좋아지거나 그렇지 않거나에 상관없이 조선인은 나쁜 근대의 가치를 내면화하였다는 것이다.

13쪽
부탄 정부가 필요 이상의 GDP 발전을 추구하지 않고, 주민 총행복량의 증진에 정책의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부탄의 전통적 정치 문화 양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양자는 각각 어떠한 사회를 전제로, 어떻게 근대 세계로 돌입하였으며, 그 결과 어떠한 국가를 만들어 내었는가? 이 책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정치 문화의 문제를 단서로 삼아 밝혀 보려 한다.

27쪽
서리는 역이었기 때문에 봉급이 없었으므로, 행정 수수료 등을 명목으로 해서 급여를 스스로 조달하는 식의 수탈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따.

32쪽
요컨대 주자학에 기초한 인정 이데올로기는 조선에서도, 일본에서도 확실히 기능하였지만 조선에서는 통치 원리 그 자체였던 데 비해, 일본에서는 통치 수단이었다는 측면이 강하다. 원리를 가진 사회란 그리 용이하게 스스로를 바꾸기가 어렵다. 이와 같은 점은 양국이 서구의 충격에 대응한 방식에 중요한 차이를 초래하였다.

34쪽
세도 정치에 대한 불만은 우선 정권에서 배제당한 양반의 불만을 일으켰다. 1811년 홍경래의 반란이 그것이다. 평안도의 가산에서 시작한 반란은 우선 가산 군수를 살해하고 일거에 평안도 각지로 세력을 확장했다. 반란은 몰락 양반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지방 차별타파와 안동 김씨 타도를 기치로 내걸었다.

민중의 최대 반란은 1862년의 임술민란이었다.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민란 발생지는 전국 71개 읍에 이르렀다. 임술민란은 이러한 민란의 총칭이다.

35쪽
임술민란에서는 수령과 향리, 향임 등이 주요한 공격 대상이었지만, 사족이 이끄는 민중은 향리 등을 몇 명 살해하였으나 수령을 살해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국왕이 직접 임명한 수령은 국왕의 신분이었고, 살해는 역성 혁명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수령은 기껏해야 쫓겨나는 데 그쳤다. 민중은 국왕이 파견한 선무사나 안핵사 앞에 엎드려 국왕의 인정을 애원했다. 민란에서도 법과 규율이 있었다.

36쪽
1821~1822년에 크게 유행하였던 콜레라 재앙에서는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

38쪽
동학은 1860년 5월 경상도 경주에서 몰락 양반 출신의 최제우가 창건하였다. 최제우는 유교, 불교, 도교의 세 종교를 통합하여 <천심이 곧 인심>이라고 하며, 만인은 선약의 복용과 주문의 암송을 통해 쉽게 <시천주>, 즉 천령에 감응할 수 있다고 하였다. 거기에는 일신교적 우주관이 있었고, 신비주의적 천인합일 사상이 있었다. 동학은 만인에게 군자화, 신선화, 더 나아가 진인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인간 평등의 논리 또한 가지고 있었다.

동학이란 서학(천주교)에 대항하는 동방(조선)의 배움을 의미

41쪽
일본형 화이 의식이라고 불러야 할 우월의식이 존재했다. 일본은 신국이며, 무위에서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의식이다. 조선은 그러한 시각에서 융국이었다.

명-청 교체를 통해 황(문명과 야만)를 뒤바꾼 중국은 더 이상 중화가 될 수 없었따.
조선은 작다고는 하더라도, 이제이 세계에서 유일하게존재하는 중화라고 하는 문명 의식이었따. 이른바 소중화사상으로, 일본은 어디까지나 문명적 척도에서 동이였다.

: 일본은 무위를 기준으로, 조선은 소중화사상을 기준으로 서로를 오랑캐 국가로 멸시하고 있었다.

조선 외교를 독점적으로 담당하고 있던 쓰시마 번

막부도 애초부터 있었던 조선 멸시관에 더하여, 재정상의 이유에서 조선 통신사의 에도 초빙을 허례로 생각하게 되었다.
막부 말기의 조일 관계는 삐걱거리고 있었다.

42쪽
조선을 향한 침략을 노골적으로 언명한 선구자는 사토 노부히로였다.
이러한 정략은 하시모토 사나이나 요시다 쇼인이 계승하였는데, 근대 일본의 팽창주의를 생각하는 선상에서 중요한 인물은 쇼인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요시다 쇼인의 밑에서 수학하였다.

요시다 쇼인은 <취하기 쉬운 조선, 만주, 지나를 무력으로 평정하고, 교역에서 러시아에 잃어버린 것을 조선과 만주에서 토지로 보상받아야 한다>라고 함.

43쪽
일본에서는 (조선의 유학과 달리) 지켜야 할 절대적인 <도>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구의 충격>이라는 위협에 대항하기 위하여 지켜 내야 할 무언가를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국체>였다.

국체란
1. 천황의 일계 지배
2. 천황과 만민의 친밀성
3. 만민의 자발적이고 끊임없는 봉공심
이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 권력이다. 여기에 심취한 자가 쇼인이었다.

<국체>는 메이지 헌법에서 근대 일본의 국가 원리로서 확립되었다.

44쪽
도쿠가와 막부에 <정한>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은 쓰시마 번이었다. 재정난에 빠졌던 쓰시마 번은 열강의 침략이 구체화되면 우선 조선이 위기에 빠지고, 그 경우에 쓰시마도 화를 입게 되므로, 막부의 원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정한>의 언설은 이러한 문맥에서 나왔다.

메이지 유신으로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1869년 1월 31일, 신정부는 쓰시마를 통하여 왕정복고의 사실을 조선에 고지하였는데, 그 서계가 일방적으로 구례를 배척한 것이었고,
이건은 조선 국왕을 격하하고 천황을 상위에 두는 것과 같은 문서였따. 조선은 이 서계의 수리를 당연히 거부하였다. 여기서 국교가 사실상 단절.

신정부는 조선이 이 서계를 거부할 것을 확신하면서 사절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53쪽
양민만이 부담하고 있던 군포를 호포나 동포란 명칭으로 바꾸어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주인인 사족으로부터도 징수했다. 이것은 조선의 신분제 역사상 획기적인 의미를 가졌따.
군역을 부담하지 않는 것은 사족의 중요한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우리나라가 종래부터 해왔던 양반 상인의 제도를 폐지하였던>인물이라고 평가.

55쪽
경복궁 재건 공사는 대원군 실각을 부른 최대의 원인

대원군은 대외 정책으로 쇄국양이 정책을 완강하게 관철. 그 시초는 천주교 탄압.

1866년 2월부터 탄압에 착수했다.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이 처형당했고, 조선인 신도의 경우 일설에 따르면 1만 명 가까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제까지 없었던 조선 역사상 최대의 종교 탄압이었다. 이것을 병인박해라 한다.

60쪽
일본에서는 <국체> 사상의 대두를 통해 <국가>가 절대화되었기 때문에 <도>는 부차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서구화로의 전환이 용이할 수 있었다. 서구에 대한 철저한 항전은 <국가>를 멸망시키는 것일 뿐이다.

61쪽
그에 반해 조선에서는 <국가>가 멸망하더라도 <도>에 따라 죽는 것이야말로 인륜의 올바른 행위라고 여겼다.

67쪽
조선 측의 접견대관 신헌과 부관 윤자승은 <만국공법>에 대하여 아무런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고, 조약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강화도 조약 당시)

68쪽
이러한 조약(강화도조약, 조일수호조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수호조규 제1관에서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라고 당연한 사실을 명기한 점이다.
이어서 일본의 치외 법권이 인정되었고, 조선의 관세 자주권은 부정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본은 일본 환폐의 유통권까지 획득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미곡 무역의 자유, 부산 이외에 원산과 인천을 개항할 것, 개항장 주변 4킬로미터 이내에서의 내지 통행권, 조선 연해의 측량권 등도 획득했다. 이로써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었다.

70쪽
(일본 내 정한파와 반대파의) 논의는 <정한> 그 자체의 도덕성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사족 반란을 방지하는 데 <정한>이 유효한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따.

77쪽
조선의 개화사상은 예상치 못한 탄생 양상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실학을 기반으로 서구 사상을 수용하였고, 거기에 불교가 그 촉매의 역할을담당함으로써 내재적으로 생성되었다.

85쪽
김옥균은 일본을 모델로 한 조선의 근대화와 대국화를 꿈꾸었고, 이후 동지들에게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86쪽
민씨 정권의 탄생 이후 국비가 낭비되었고, 매관매직의 풍조가 다시 성행하였따. 그 때문에 대원군 시대에는 완화되었던 가렴주구가 다시 심해졌다. 또한 민비는 무당이나 점쟁이들을 중용하여 기도나 점을 치는 데 막대한 포상금을 쏟아부었다. 국가개정은 궁핍해져 갈 뿐이었따.

88쪽
고종은 <지금부터 크고 작은 공무는 대원군이 결정하도록 명한다>라 고전교를 내려 대원군에게 정권을 위임하기에 이르렀다.(임오군란 당시)

90쪽
김윤식,어윤중, 김홍집 등의 온건 개화파와, 김옥균, 박영효, 홍역식, 서광범 등의 급진 개화파.

제물포조약(임오군란의 결과)
군란 주모자의 체포와 처벌 이외에, 피해자에 대한 배상금 5만 엔, 국가 배상 50만 엔, 일본 공사관의 일본군에 의한 경호 등을 합의하였다. 또한 이 조약과 동시에 일본수호조규속약도 조인되어 부산, 원산, 인천에서 일본상인의 활동 영역이 50리(20킬로미터)로 확장됨과 동시에 한성 근교의 양화진 개시와 일본 외교관원의 내지 여행권을 인정하였다.

99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죄사로 박영효를 정사로 하는 수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국기인 태극기는 이때 배 안에서 제작하여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101쪽
개혁은 민씨 정건과 알력을 초래했다. 민씨 정권도 분명하게 근대적 개혁에 반대했던 아니었으나 그것이 개화파 주도로, 게다가 급진적으로 실시되는 것에 대해서는 척족, 문벌 정치는 추진하는 입장에서 몹시 거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개혁의 추진은 어느 방향이든 자파 세력의 후퇴, 부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개혁의 추진은 어느 방향이든 자파 세력의 후퇴, 부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07쪽
애초부터 조선에서는 <부국강병>은 권력주의적 패도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어서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전통이 존재하였따. 그것을 대신하여 주창한 것이 <자강>이었다.

108쪽
갑신정변이 왜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라는 형태를 취하고, 더욱이 일본에게 전면적으로 의존하려 했는가, 그 본질은 전적으로 개화파의 우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민중의 이반은 개화파 정권 붕괴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109쪽
갑신정변에 깊이 관여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경우 좀 더 노골적이었다. 그는 애초부터 국권주의자였지만, 1885년 3월 16일 [지지신보]에 게재한 [탈아론]에서 조선과 청국을 <악우>라고 하며, 서구 문명국과 같은 태도로 양국을 상대해야 한다고 하였다.

122쪽
일본 화폐가 유통되는 것에 덧붙여 금은동의 비가가 국제 기준과 동떨어져 있던 상황을 이용함과 동시에, 사기적인 물물교환 등을 통해서 이루어진 약탈적인 금 수출은 1897년 일본이 금 본위제로 이행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메이지 첫해부터 청일 전쟁 전년까지 여러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금의 총액은 1,230만 엔 정도였는데, 그 가운데 68퍼센트는 조선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또한 가격이 싼 조선의 미곡이나 대두의 수입은 일본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고용하는 데 기여했다. 오사카나 고베의 노동자는 통상적인 쌀값의 3분의 1 정도로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38쪽
농민군 중에는 일부 부민이나 일본 소농민이 다수 참가하고 있었는데, 이들 대다수는 농번기였기 때문에 귀향해 버렸다. 그 가운데 농민군의 주체로 빈농층이나 무산자층, 천민 등의 존재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자치의 급진화는 이러한 요소가 원인이었다.

139쪽
종래의 집강소라고 하면 농민군 자치 기구라고 하여 상당히 유명하였는데, 이것은 착오이다.
일반적으로 집강은 촌장(풍헌, 약정, 존위 등)과는 별도로 촌정이나 풍교를 감찰하는 임원을 말했다. 자치기구는 어디까지나 도소였고, 양자는 원칙적으로 구별되었다.

152쪽
8월 24일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 내각에서는 이범진, 이완용, 안경수 등 정동파가 진출했따. 정동파란 한성의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 미국 공사관 등에 출입하고 있던 관료들을 말한다.

갑오개혁은 갑오농민전쟁에서 나타난 농민의 제반 요구를 국정 전반에 걸쳐 근대적 여러 개혁을 통하여 응하려 한 것이었다.

155쪽
민비 암살의 기도는 같은 해 9월 1일 부임함 퇴역 육군 중장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를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164쪽
러시아는 다른 열강의 조선에 대한 간섭을 방어하기 위해서 칭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고

칭제는 조선 왕조의 비원이었다. 여진족인 청에 복속하는 예를 행한 이래로 사대 지향의 한편으로 자립 지향도 끊임없이 존재하였다.

166쪽
그렇다면 왜 <조선>이라고 하는 국호를 폐지하여 <대한>으로 해야만 했는가? 그것은 <조선>이 고조선에서 유래하는 것이지만 국초에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을 때 명명된 국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은 제국에 어울리는 국호가 아니었다. 제국의 논리로서는 복수의 국가를 복속시킨 결과로서 탄생한 국가라고 하는 명분이 있어야만 했는데,그 결과 채용된 것이 <한>이었다. 고종의 조칙에 따르면 신화, 전설상의 단군과 기자에 의한 개국 이래로 고조선은 영토가 분할되어 <서로 다투도>있었는데, 고구려 당시 마한, 변한, 진한을 통합하여 <삼한>으로 삼고, 지금의 조선에 들어와 북쪽으로는 말갈, 남쪽으로는 탐라(제주도)를 정복하여 4,000리에 이르는 <일통의 업>을 이룬 것이 된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잘못된 것이나, 세분화된 <한>이 고구려 때를 계기로 서서히 확대하여 제국이 되었고,그 때문에 <대한>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논리이다.

173쪽
독립협회가 정력적으로 조직한 운동은 우선 열강에 대한 이권 양도를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활기를 띠고 있던 독립협회에서는 이권 양도 조사를 실시하려는 급진파가 대두하였고, 그들은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의 이권 양도에도 반대하였다. 다만 영국, 독일 일본에 대한 경계는 약하였고, 독립협회는 독특한 세력 균형관을 가지고 러시아와 그 동맹국인 프랑스를 특히 위험하게 보았다.

210쪽
조선인 가운데는 예외적으로 자진하여 인부에 나서는 자가 있었다. 일진회였다. 일진회는 원래 러일 개전 이후인 1904년 8월 18일 일본 군부의 지원을 받은 송병준이 창립한 친일 단체이다.

동학의 정통인 교단 중앙은 갑오농민전쟁 이후 서서히 개화주의로 방향을 틀었고, 러일 전쟁 시기에는 친일화하였다.

일진회 회원이 100만이라고 하였는데, 10만 명 내외의 세력을 과시하였고, 한말 최대의 정치,사회 단체가 되었따.

235쪽
최익현은 일본군과 싸우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나타난 적은 한국군이었다. 동족상잔의 전투를 그만두려 호소하였으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최익현은 의병의 해산을 결의했다.

:을미늑약에 항거하여 일어난 최익현은 그들 앞에 선 한국인 진위대를 보고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236쪽
최익현은 적의 쌀은 받지 않는다고 하여 절식하다가 얼마 후 사망하였다.

243쪽
일진회 송병준은 양위하지 않는다면 자결하든가, 천황에게 직접 사죄하든가, 아니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고종을 다그쳤다.

250쪽
<도>는 문명이었고, <국가>의 상위로 설정하였는데, 조선 왕조, 대한제국이 소중한 것은 <도>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주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의병장에게 문명을 위해 죽는 것은 나라를 위해 죽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 이인영의 행동이 이해는 가지만 단결된 13도 창의군이 일본군과 맞붙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긴 하다.

256쪽
대한 내셔널리즘을 적극적으로 고취하였던 인물이 바로 박은식과 신채호였따. 양자의 사상적 특징은 당시 사회 진화론은 <진보>를 중시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강한 와중에, 반대로 철저하게 <경쟁>을 중시하여 이해하였다는 점에 있따. 그 결과 양자는 현실 세계에는 가혹한 경쟁이 있을 뿐, 보편적 도의 등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국가는 도의보다도 무겁다고 주장한 것이다.

257쪽
주자학적 사유에 젖어 있었던 조선의 지식인은 이러한 사유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었는데, 박은식과 신채호는 도덕과 정치를 분리시킴으로써 진정한 국가주의를 정립하였다.

260쪽
보안법(1907년)을 실행하고, 이 법률로 내부대신은 안녕 유지를 위하여 결사를 해산하고, 경찰은 집회나 <다중 운동>을 제한, 금지할 수 있게 되었다.

언론 통제로서는 신문지법(1907년) 중요하다. 내부대신은 <안녕 질서>를 방해하는 신문을 압수하고, 발행 정지, 발행 금지 등이 가능하도록 했다. 반일 기사의 엄격한 금지였다.

게다가 통감부는 출판법(1909년)에 기초하여 출판을 허가제로 하여 검열을 엄격하게 하였고, 다수의 출판물을 발행 정지시켰다. 언론 탄압은 여기서 극에 달한 느낌이었다.

: 이미 나라가 강탈 당한 바 언론 탄압은 대수롭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261쪽
통감부는 베델을 공사 양면으로 감시함과 동시에 두 차례에 걸쳐 영국 영사관에 고발하였다. 영국은 치외 법권에 기초한 영국범의 적용과 일본과의 우호 관계 사이에서 고민하였는데, 결국은 준거로 삼아야 하는 추밀원령을 수정하였고, 영국인 발행 신문은 우호국의 관헌과 한국 신민 사이를 이간질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베델을 처벌하였다. 즉, 베델은 1907년 10월 6개월의 근신 처분을 받았고, 다시 1908년 6월에는 3주간의 금고형과 6개월의 근신 처분을 받았다. 금고형이란 한국으로부터의 추방이었다. 베델은 그래도 되돌아왔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불행하게도 3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하도록 하여 대한국 동포를 구출하라>가 유언이었다. 제국주의가 풍미하던 시대에 피억압 민족에게 일신을 바쳤던 보기 드문외국인이었다.

: 허버트와 베델에 대해서는 추후에 더 공부를 해야겠다. 조선인은 세계에서 제일 비능률적인 민족이라며 경멸했던 잭 런던과는 달랐다.

264쪽
선교사들은 <문명의 사도>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조선의 문명화를 부르짖는 이토 히로부미의 평판은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베델의 반골 정신과 일본 혐오는 두드러진 것이었다.

270쪽
<우리들은 죽을 수밖에 없겠지요. 괜찮아요. 그걸로 됐어요.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죽는 편이 훨씬 낫지요>라고 말하였는데, 죽음을 각오한 의병의 비장한 심정이 강하게 전해져 온다.

292쪽
병합조약과 동시에 조선귀족령을 실시하여 76명의 조선인이 귀족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한규설과 유길준을 비롯한 6명이 작위 수여를 거부했다. 또 대관을 역임한 김석진은 자결하였고, 궁내부대신으로 고종의 매제였던 조정구는 두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다. 순국자는 전국적으로 줄을 이었다. 양반 유생 9,811명에게는 경로금이 지급되었고, 효자 등 향촌의 모범자에게는 포상을 수여하였다. 또 대사면을 실시하여 부정을 한 지방 관료도 그 죄를 용서받았다. 그리고 일반 민중에 대해서는 미납 세금을 면제하였고, 추수에 한하여 지세를 5분의 4로 감면하였다. 더욱이 13도에는 국탕금 1700만엔을 지출하여 진휼이나 교육 보조금 등에 충당하였다.
이렇게 성대한 대접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의 진수성찬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 민중은 이제부터 어두운 가시나무 같은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막막한 불안감을 품으면서도, 그것을 지워 버리려는 듯 <공포의 보수>를 받아들이며 한순간 안도하는 숨을 내쉬었다.

293쪽
그와 같은 병합 합리화의 언설은 역사학자 기다 사다키치의 논의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다. 병합하던 해 그는 [한국의 병합과 국사]를 저술하여 아득한 고대에 분가하여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조선을 본가인 일본인 인수한 것이 한국 병합이라고 했다. 정체론과 타율성 사관의 입장을 <일선 동조론>으로 보강하면서 병합을 합리화한 논의였다.

295쪽
한편 한국병합조약이 조인된 밤의 연회 석상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득의만만하게 <고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살아 있다면 오늘 밤 달을 어떻게 보았을까?>라고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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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이건희 지음 / 동아일보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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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는 기업의 총수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사람은 변하는지라 20년 전의 그와 지금의 그는 많이 달라졌겠지만 어떤 결을 가지고 있는지라도 느끼고 싶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글을 쓰는지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시던 분이 그렇게 성매매를 하다니.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시지 그러셨나.

사실 이 책에 삼성 그룹의 총수에 걸맞는 대단한 인사이트를 보여주었다고 한들 그의 핏줄만큼이나 그의 성공에 기여한 능력은 없지 않을까.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려고 했다면 면접이나 통과할 수 있었을까. 생각 좀 한다고 해서 재벌 집안에서 태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양자로 입적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라며 충고를 하시다니. 재벌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오죽 답답했나 보다. 생각 좀 하며 세상을 삽시다.


밑줄

사전 준비 부족 안이한 생각 경솔한 행동이 실패의 3요소
위험을 각오하고 선두에서 달려가야 기회를 성점할 수 있다

일을 잘못했다고 해서 벌을 주어서는 안된다. 일을 잘못한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벌을 받으면 사고와 행동이 오그라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상필벌이 아닌 신상필상을 주문한다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권위주의가 아니라 권위이다 진정한 권위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학식이나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남의 인권을 존중하고 겸손할 줄 아는 데서 생긴다.

그렇다고 이미 몸에 밴 평면적 사고의 틀을 단숨에 바꾸기는 어렵다. 주변에서 쉬운 것부터 찾아 사물의 본질을 생각하고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 훈련의 한 방법으로 조금은 특이하게 들릴 영화 감상법을 권하고 싶다.
영화를 감상할 때는 대개 주인공에게 치중해서 보게 된다. 주인공의 처지에 흠뻑 빠지다 보면 자기가 그 사람인 양 착각하기도 하고, 그의 애환에 따라 울고 웃는다. 그런데 스스로를 조연이라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면 아주 색다른 느낌을 받는다. 나아가 주연, 조연뿐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처지에서 보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인생까지 느끼게 된다. 거기에 감독, 카메라맨의 자리에서까지 두루 생각하면서 보면 또 다른 감동을 맛볼 수 있다. 그저 생각 없이 화면만 보면 움직이는 그림에 불과하지만 이처럼 여러 각도에서 보면 한 편의 소설, 작은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보려면 처음에는 무척 힘들고 바쁘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입체적으로 보고 입체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변화란 쉬운 일, 간단한 일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야 한다. 작은 변화라도 지속적으로 실천하여 변화가 가져다주는 좋은 맛을 느껴 보고, 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리를 알고 나서 원리에 의문을 갖고 실제에 응용하는 습관을 들이면 새로운 곳을 만들어내는 힘 즉 창조력도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그러나 앞선 기업은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전에 대비책을 강구해 놓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해도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여유로 보이는 것이다.
초일류 기업이란 앞일을 예측해서 거기에 맞게 준비하는 ‘문제 정의형‘ 기업이다. 이미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급급한 ‘문제 해결형‘ 기업은 결코 초일류 기업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다가올 문제를 사전에 정의하고 대응책을 마련해 두는 기업이라면 초일류 기업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미래의 경쟁은 원가가 아닌 가치의 경쟁이다. 같은 재료로 만들더라도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을 만들어야 더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다. 소비자가 원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한 발 앞서 알아내고 소비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줄 수 있는 물건을 만든다면 그 기업은 원가 부담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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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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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지가 꽤 되었고 책을 읽으며 써놓았던 메모를 옮겨 놓으니 어디까지가 책 내용이고 어디까지가 내 생각인지 구분이 안된다.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할 것이라고, 아니 이 시장에서 쫓겨나 죽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에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성장해야 한다는 채찍질을 스스로에게 하지만 한편으로 나의 성장은 누군가에게는 죽음인 것이다. 성장하려고 하지 말자. 단지 올바르고 재미있고 훌륭한 가치를 추구하려고 하자.

정량적 사이즈에 집착하지 말고 정성적 가치에 몰두하자. 모든 것에 있어서. 몇 권의 책을 읽었나가 아니라,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으며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꼈나에 초점을 맞추자.

최근에 계속 강조되는 (한 물 간 것 같지만) 창의성이나 인문학과 같은 것은 이 세계가 포디즘에서 벗어나 포스트 포디즘 시대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소품종 대량생산을 하던 시기에는 학교에서 사회에서 공장에서 찍어내는 지식과 교육이 먹혀들여갔지만 다품종 소량 생산의 포스트 포디즘 시대에는 학교에서 사회에서 주입하는 지식과 배움이 아니라 다양성이 내재되어있는 스스로 하는 공부, 독서(여기서 인문학이 강조되는 것)가 사회의 요구와 맞닿는 것이다. 마이크로한 소비자들의 욕구와 인문학, 독서가 결합되는 것이다. 인문학과 독서는 다른 말로 학교나 사회에서 일괄적으로 퍼붓지 않는 교육을 스스로 하라는 말과 다름없는 것 같다.

극단적 양극화로 인해 전쟁이 날까 무섭다. 더해 전쟁이 난다 해도 하층민들은 또다시 죽어나가고 10%의 부유한 사람들은 전쟁을 통해 다시 부를 쌓아갈 현실이 더 암담하다.

전쟁 후에 얻는 경제적 효과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배를 채울 수 있다며 위안을 받고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들 중에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전쟁이 좋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절망적이다

‘삼성이 우리나라에 기여한 일자리의 숫자보다, 삼성의 문어발식 경영과 하청 관행이 중소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태가 더욱 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한다.‘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가정한다. 때문에 그 경제의 시합에서 승리한 부자들은 가장 이기적이며 성공적으로 이기적인 성과를 이뤄낸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고 악인과 동일시 시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인류 역사 1만 년의 시간 중에 이기적인 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했건 시절이 어디에 있는가.

‘금전적 이득은 진정한 이득인 인간애의 그림자에 불과‘ 그렇다 돈은 그림자일 뿐이다.

단일민족에 대한 집착은 나치를 불러올 뿐이다. 단군의 자손이라는 환상을 빨리 떨쳐버리고 모두를 수용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믿음은 공산주의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모두가 이제 돈 이외의 것은 인간에게 동기부여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인간에 대한 믿음은 공산주의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나.

인간의 본능은 아마도 자기 생존에 최적화되어 있는 상태로 진화되어 왔을 것이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아마 그 본능은 나만 잘 살거나 공멸을 불러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아주 원초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본능, 이를테면 성욕, 식욕, 수면욕, 이기적 행태, 폭력성 등을 발현시키는 것이 인간의 번식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는 방법인 것인가?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이 그러한 것처럼 인위적인 교육과 법과 제도와 억압이 없는 사회여야만이 인간의 생존과 번식을 최대화할 수 있는 것인가? 혹은 인간은 이미 그 본능에 따르면 멸종하고도 남았어야 할 종인데 법과 교육과 같은 인위적 방법으로 아직까지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인가? 그래서 지구가 이렇게 고통받는 것인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훌륭한 사회와 그것을 억제하는 것이 훌륭한 사회, 둘 중 어느 사회가 옳은 것일까.
논어를 읽으면서 수신 제가 하는 것보다는 힙합을 들으면서 돈과 성과 사치를 우상시하는 시대, 뭐가 옳은 것인가. 이 시대의 성인은 누구인가. 인문학 교수님인가 아니면 힙합 가수인가. 이는 시대에 뒤처진 고민인 것인가 아니면 세계를 올바로 보고 있는 바른 문제 지적인 것인가.

SNS의 발전은 개인 창업자, 프리랜서들이 대기업을 상대로 게릴라 전을 성공적으로 펼칠 수 있는 인프라가 되어줄 수도 있겠다.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는 뇌 과학이나 심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문학책을 읽는 것이 좋을까.

독서에 대한 견해는 피에르 바야르보다는 장정일의 생각에 공감한다. 그러나 책, 독서의 의미를 확장시켜 이해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나중에 도서관을 돌며 제목과 목차만 한참 보는 것을 해봐야겠다.

여행기가 단지 사진과 단순하고 순간적인 감상들, 여행지 정보만 나열해놓는다면 그것은 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의미 없는 정보의 나열일 뿐이며 좋게 봐도 1년만 지나도 바뀌어버릴 정보들을 굳이 옮겨놓은 헛수고일 뿐이다.

그래 맞다, 독서의 목적은 사고의 성숙이다.

종교의 명목 아래 행해지는 모든 악한 일들은 사실 종교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경제적(경제적 욕망)인 이유로 방생하는 것이 거진 전부이다. 종교는 단지 천박한 경제적 욕망을 포장하는 장식일 뿐이다.

독서일기를 읽다가 든 생각, 누군가의 독서 리뷰, 독후감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독후감을 읽었다고 해서 내가 그 책을 읽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는 이유는? 하나, 다독가로 유명한 사람은 어떤 책을 어떻게 읽고 어떤 느낌을 받는지 궁금하다. 둘, 내가 읽은 책에 대해서 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영화를 보고 영화 평론가의 영화 리뷰를 찾아보는 것과 같은 맥락. 셋, 문학 말고 비소설류의 책에 대한 리뷰는 그것을 읽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정보 습득이 가능하다.

사실 이 책은 책이라기보다는 리뷰 모음집이다. 말 그대로 독서 일기.

모든 책에 대한 일기를 다 같은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지는 못하다. 내가 읽었던 책이나 주로 사회, 정치 주제를 다룬 책에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된다. 문학 책에서는 정말이지 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일기는 관심이 안 간다. 갈 수가 있겠나. 내가 보지도 않은 영화 평론을 무슨 재미로 읽겠나.

책을 읽으면 성공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아마 지금도 조금 있는 것 같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독서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책을 많이 읽었을 장정일이나 일본의 다독가로 유명한 사이토 다카시 같은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성공을 하였나..? 흠.. 역시 이 부분에서는 마윈의 지적이 옳은 것 같다. 책을 읽지 않아도 성공을 할 수는 있지만 책을 읽지 않고는 성공한 기업을 유지시킬 수 없다는 것.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 경험 세계를 확장시키는 것. 여러 다른 경험을 충돌시켜 새로운 사고를 만들어 내는 것. 내가 생각할 수 없는 부분까지 사고를 깊이 하는 것. 그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지식을 가지게 되는 기쁨. 세상을 더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 세상의 여러 케이스를 접함으로써 얻게 되는 역사적 사건들의 인과 관계. 그로 인해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일을 점쳐볼 수 있는 능력.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이해.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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