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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길
베르나르 포콩 사진, 앙토넹 포토스키 글,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2월
평점 :
요사이 서점을 자주 가게 된다. 예상치못한 연애처럼, 어떤 책은 급작스레 내게 말을 걸어오지만,
어떤 책은 늘 내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아주 더듬더듬, 어눌하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청춘. 길> (사진:베르나르 포콩, 글:앙토넹 포토스키)이라는 책이 그러하다.
한 페이지 전체를 결코 넘지않는, 정갈한 문장들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주 여린 눈물이 나려했다.
무슨 사이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두 남자(한 사람은 50년생, 또 한 사람은 74년생, 부자관계는 아닌듯 하다)가 낯선곳을 여행한다.
그들이 가는 곳은 결코 친숙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미얀마, 말리, 사헬 지역으로, 실려있는 사진들 역시 조금 낯선 방식으로 찍혀있다.
( 인위적으로 조작되어 멈춰진 아름다움이 아닌,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사진들 같다)
문장들은 투명하고 나른한 슬픔으로 부드럽게 감싸져 있는 듯 했다.
"이날 저녁,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고 지나간 정원에서 신선한 공기와 나무들의 냄새를 음미한다. 나는 새끼 고양이를, 그리고 녀석의 머리를 때린 두 개의 돌멩이를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행복한 슬픔을 느낀다. 나는 그 새끼 고양이도 좋고 녀석에게 돌은 던지는 이 사회도 좋다. 이 저녁에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어린 시절의 큰 슬픔이 떠오른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때때로 동물들의 가련한 삶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우리의 눈물을 다정한 그 무엇에 고정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날 저녁의 아름다움은 병든 고양이의 머리에 부딪친 돌멩이를 닮았고, 너무 많이 울고 난 뒤에 찾아드는 감미로운 느낌을 닮았다."
낯선 이국 땅에서 느껴지는 슬프고도 감미로운 느낌은,
그 순간 자신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감동과 더불어, 자신의 역사를 반추하는 가운데 느껴지는 삶의 애뜻함이다. 나 역시 홀로 했던 여행 속에서 느껴야했던 여행의 정점 아니었던가.
"더운 계절 아침 10시경에 사헬의 거리로 나간다는 것은 현기증 나는 열기와 눈부신 빛 가운데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거리의 메마른 흙 위를 걸으면서 나는 이곳의 높은 기온과 너무도 강렬한 빛에 짓눌리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온전히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고, 그러자 견디기가 별로 힘들지 않았다. 난 이제 덜 더운 곳에서는, 살기가 편한 곳에서는 살지 못할 것 같다. 다른 어느 곳도 이곳보다는 살기가 편할 것이다. 검은 아프리카를 보고 나면 북아프리카의 온화함이 그렇게 쾌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헬로부터 멀어져서 안락하게 사는 것은 세계의 표면에서 산다는 느낌을 준다. 내면은 여전히 나 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육신이 편안한 곳에서는 더이상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없다. 내 육신이 견뎌낸 혹독한 삶이 이젠 존재규범이 된 듯하다. 아주 뜨거운 열기가 정상적인 규범을 녹여버리기라도 한 듯이...."
미친 무더위와 비상식적인 풍경들, 그러나 어느 틈엔가, 이 낯선 것들에게 애정을 품고 있는 생의 에너지야말로 청춘인 것이다. 편하고 안락하게 산다는 것, 그것에서 느껴지는 삶의 무기력함, 느껴지지 않는 존재감, 무의미.... 이 모든것을 아주 조용하고 담담하게 거부하며, 고요한 열정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채워가려는 문장의 주인공이 몹시도 사랑스럽다. 더이상 낯설고 불편한 것들에게 애정을 느낄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 그리하여 더이상 길 떠나기가 내켜지지 않는 때가 온다면, 그대, 이젠 편안히 쉬어라, 그대는 이미, 미련없이 쉬어도 좋을만큼 충분히 '늙어버린' 사람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