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소녀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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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쯤에 우연히 발견하고 산 책입니다. 처음 보는 작가였지만 훑어보니 재미있을 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화장대 위에 놓인 미니책장에서 여러 후보자들과 함께 저의 간택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손에 쥐게 된 소설입니다.

간단한 작가소개를 읽어보니 마리 유키코는 인간의 어둡고 불쾌한 내면을 가감 없이 그려내는 '이야미스' 장르를 개척하며 기리노 나쓰오, 미나토 가나에 등과 함께 일본의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여성작가라고 하네요. 에? 일단 같이 거론된 분들이 워낙에 유명한 분들이라, 이 작가도 그 정도급의 인지도를 갖고 있나보다, 하고 읽어보았습니다.

제목이 너무나 특이했어요. 중년여성의 한 시기를 지칭하는 '갱년기'와 아직 어린 '소녀'와의 결합이라뇨. 제목에서부터 무언가 확실히 '이야미스'겠구나, 하는 직감이 퐉! 다가왔습니다.

등장인물들은 1976년에서 1977년 사이에 연재된 <푸른 눈동자의 잔>이라는 순정만화 오타쿠들입니다. 만화는 더 이상 연재되지 않지만, 그 만화는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고, 팬클럽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인터넷 팬클럽 사이트에서는 팬픽 소설이나, 동인지 만화, 일러스트 등으로 열기를 띠고 있지요. 그리고 주요 등장인물인 에밀리, 실비아, 마그리트, 미레유, 지젤, 가브리엘 등 30-50대의 중년여성 6명은 그 팬클럽을 운영하는 간사진입니다. 팬클럽 활동을 길게는 20년, 30년씩 해온 사람들이고, 간사진 그룹에 속해있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기모임이 있는 날에는 무리해서라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비싼 레스토랑과 찻집에서 한껏 그 시간을 누립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벗어나 <푸른 눈동자 잔>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거든요.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푸른 눈동자의 잔>이라는 만화는 단순한 취미이상입니다. 거의 광기어린 종교에 가까울 정도의 관심과 숭배의 대상입니다. 그녀들의 집착은 좀 섬뜩할 정도입니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소녀이고 싶은 오타쿠 중년들의 폭주 미스터리' 이 문구가 이 책 소개하는 겉표지에 적혀있네요. 그리고 이 문구는 이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구성은 여섯 명의 등장 인물에게 각각 한 챕터씩 할애하여, 그들의 실제 생활을 보여주고 그들이 서로에게 어떤 엇나간 알력을 행사하는지 보여줍니다. 18세기 프랑스 백작의 딸이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만화주인공 잔의 파란 만장한 삶과는 일도 연관이 없는, 현실의 그녀들의 삶은 저마다 무겁고 위태합니다. 그리고 등장 인물을 묘사하는 대한 작가의 시선은 가차없습니다. 모임에서는 우아하고 고고한 척 앉아 있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피해망상증에, 허언증에.....정상적인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같이 한심하죠. 그나마 가장 괜찮은 인물이 가브리엘인데, 가브리엘은 모임 멤버 중 가장 젊고, 빼어난 외모와 친화력을 겸비한, 모임의 아이돌같은 존재이지요. 그래서 다른 나머지 다섯 명의 멤버는 가브리엘의 애정을 독점하기 위한 묘한 쟁탈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거짓으로 이루어진 현실 속에 쌓아올린 허영심의 탑. 그곳에 그녀들이 위태롭게 존재합니다. 오직 <푸른 눈동자의 잔>만이 그녀들에게 삶의 생기를 주지요.

그리고, 정말 사건이 일어납니다. 모임의 그녀들이 하나 둘 씩 사라지고 죽어나갑니다. 각 챕터별로 한 사람씩 개인 스토리가 등장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챕터별로 중심 내레이션을 다르게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비아의 에밀리의 경우는 에밀리가 중심이 되어 내레이션을 하지만, 마레유의 경우는 마레유의 어머니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마레유의 이야기가, 마그리트의 경우는 마그리트의 어린 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마그리트의 이야기, 지젤의 경우는 계속되는 악몽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갑니다. 작가가 글쓰기 방법에서 약간씩 변주를 주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저는 약간씩 달라지는 이런 글쓰기 방식에도 흥미를 느꼈습니다.

결국 불안한 예감 속에 파국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그녀들, 그 뒤에 이 모든 것의 빅픽처를 그린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누가 결국엔 마지막까지 살아남게 될까요?

작가가 여자들의 미묘한 심리를 잘 잡아내서 가차없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보는 내내 재미가 있었어요. 그리고, 깜짝 반전이 있었습니다. 거의 마지막 페이지 직전까지도 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거든요. 하, 그 반전을 알고 나서야, 그녀들의 행동이 이해되더군요. ^^

하지만 뭔가 중년 여성들의 오타쿠적 열정을 폄하하는 듯한 느낌도 없잖아 있어서 살짝 기분이 나쁘기도 했어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오타쿠인 사람들은 가정에 무언가 문제가 있거나, 성격이 원만하지 못해고 독특해서 그런거야, 라는 듯한 뉘앙스가 살짝 느껴졌거든요.

현 시대는 인류 역사상 수명이 가장 길어진 시대이고, 그러다보니 충분히 중년의 나이에 이르렀으나 여전히 젊은 시절의 삶을 영위하는 첫 세대들이 살고 있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중년이지만 더 이상 중년이 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담론들도 많이 등장하고, 충격받지 말고 자연스럽게 중년을 받아들이자는 담론들도 많이 나오고... 여튼 혼란스러운 상황이지요. 그래서 이런 소설이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하나봅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모습이 정말 궁금해졌어요. 작가의 외모가 궁금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문체로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왠지 기리노 나쓰오처럼 서늘하면서도 강한 인상의 미인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찾아봤는데, 두둥, 아주 푸근한 인상이셨습니다. 이 소설이 그나마 마리 유키코가 쓴 소설 중 가장 읽기 편하고, 친근한 소설이라고 하던데....^^ 다른 작품도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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