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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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가 쪽 큰 고모는 수십년 전, 이름 모를 병을 앓으신 적이 있는데 기독교를 믿고 나서 씻은 듯 나으셨다고 해요. 물론 우연의 일치겠죠. 하지만 그 일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고모께서 독실한 신자 생활을 유지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아요. 사람은 사고나 질병, 경제적 어려움같은 고난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존재에 대한 특별한 의미 부여를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친한 친구의 위로, 지역사회의 복지, 종교단체의 후원일 수도 있겠죠. 오늘 소개할 책인 이언 매큐언의 <칠드런 액트> 속 주인공 애덤 헨리. 그의 부모는 궁핍한 환경에서 그를 낳고 '여호와의 증인'을 알게 된 후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예의 세번째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네요.

 

법조계의 명망 높은 고등법원 여성 판사 피오나 메이. 예순이 내일 모레인 그녀는 판결문과 서류 더미에 종일 파묻혀 사는 완벽주의 전문직 여성의 전형적 인물입니다. 그런데 소설 초반부터 어째 남편과의 사이가 삐걱대며 위기를 맞는 듯하더니 급기야 더 늦기 전에 뜨거운 열락을 맛보고 싶다는 그는 당당히 외도를 허락해 달라는 뻔뻔함을 보이기에 이릅니다. 어이가 없는 그녀는 아파트 열쇠도 바꿔버리고 그가 다시 돌아와 용서를 구하는 척이라도 해주길 바라지만 침묵같은 무소식에 애간장만 타 들어가지요. 이 와중에 그녀가 처리해야 할 사안은 역시 매일같이 밀려드는데요. 그 중 이혼과 위자료 및 양육권 소송을 마주하면서는 비슷한 자신의 처지를 떠올려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얘기는 종교적 신념과 법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앞서 얘기한 애덤이란 소년이 백혈병에 걸려 수혈이 시급한 상황에 그의 식구들 모두는 따르고자 하는 교리에 반하는 행위라며 한사코 거부합니다. 다들 알다시피 이 종교는 타인의 피를 내 피와 섞는 행위인 '수혈'을 절대 금기시하고 있죠. 성인에 준하는 18살 생일을 불과 3개월여 남겨둔 시점에서 애덤은 본인 및 보호자의 의견을 따라 '순교자'가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지, 아니면 누구라도 설득하여 불필요한 희생을 막는게 옳은 것인지 작가는 마치 독자들 모두에게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감동적인 엄숙한 태도로 아이는 바이올린을 턱에 대고 피오나를 쳐다보았다. 애덤이 연주를 시작했을 때 그녀는 높은 음에 수월하게 맞춰 들어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문간에 서서 아연히 바라보는 머리나는 완전히 잊어버린 채 피오나는 더 크게 노래했고, 애덤의 미숙한 활은 더 과감해졌으며, 두 사람은 지난날을 한탄하는 애절한 마음속으로 마음껏 빠져들었다. - p.161

 

그녀는 이례적으로 당사자인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녀 앞에서 즐겨 쓰던 시를 읊고 어설픈 솜씨나마 바이올린까지 켜 보이던 그는, 비록 야위었지만 그녀의 눈엔 사랑스럽고 충분히 본인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피력할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로 보였습니다. 또, 얼떨결에 함께한 공연이 되었지만 그녀의 노랫소리가 얹어진 병실에서의 둘의 교감은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감동적인 대목이었지요. 아쉬운 듯 붙잡는 그의 목소리가 마지막까지 뇌리를 스치더군요. "또 오실 거예요?"

 

이 아이는 후에 자신이 한 선택이 불러올 결과 즉,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어가는 아픔과, 죽음 뒤 그 빈 자리에 채워질 슬픔의 눈물을, 자신이 주인공이 된 낭만적인 어떤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피오나가 다녀가고 내려진 판결문을 접한 뒤 소년의 생각은 바뀌었고 지켜오던 신념에 앞서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 깊음을 부모의 눈물로 확인한 그는 고마움에 판사님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 내용은 다소 황당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보지 못했던 세상을 알려 준 또 다른 존재로써 그녀는 소년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한편, 그 무렵 냉전 중이던 부부에겐 화해의 기류가 흐르고 그레이트홀의 꿈같은 연주를 정점으로 둘은 예전의 화목했던 시절로 돌아가게 됩니다.

 

허나, 마지막에 소년이 내린 뜻밖의 결정과 그로 인한 참담한 결과는, 사건이 종결되었음에도 그녀로 하여금 빠져나올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를 안겨준 채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장중했던 <속죄>만큼은 아니었지만 긴장감 있는 스토리와, 심리 묘사에 달인임을 또 한번 증명해준 이언 매큐언의 섬세하고 간결한 문체가 돋보였던 작품이었구요. 판사라는 특수 직업을 가진 작중의 주인공이, 아이가 없고 노년을 앞둔 위기의 가정 주부라는 또 다른 한 쪽의 입장에 서서 도덕과 신념, 법이라는 잣대를 들고 고뇌하는 상황이 작가가 다루려 하는 폭넓은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다음에는 이 작가가 또 어떤 사건과 배경을 가지고 멋드러진 작품을 써 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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