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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이반일리치의 죽음 ㅣ 펭귄클래식 2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앤서니 브릭스 서문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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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 분들에겐 아무래도 '죽음'이란 단어가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테죠. 예전에 제가 느꼈던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관과 그 위에 뿌려지는 흙, 검은 상복같은 파편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요즘 제게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그것은 '나'라는 자체가 사라진다는 '무(無)'가 주는 공포입니다. 내가 사라진 세상, 내가 두고 가야 할 것들, 다시는 못 볼 사람들. 생각하기조차 싫지만 책이란 걸 읽으면 읽을수록 이 '죽음'이란 키워드는 일정한 간격으로 제게 찾아오더군요. 오늘 다룰 책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우리가 살면서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던 것과 성공의 기준들이 '죽음'이란 거대한 그림자를 만나면 그 빛이 얼마나 덧없고 쓸쓸하게 퇴색해버리는지를 경고하는 '메멘토 모리'의 대표격 문학 작품입니다.
사실 러시아 문학을 거의 접한 적이 없었던 터라 등장인물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발음도 어렵고 거기서 거기인 듯한 이름들이 초반엔 누가 누군지 많이 헷갈렸답니다. (표트르와 표도르가 뭐가 다른건지;;) 하지만 곧 작가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다가오는 죽음을 향한 주인공의 분노와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 같아, 이름이고 뭐고 신경 쓸 겨를 없이 빠른 속도로 소설에 몰입되더라구요.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반일리치는 자신과 남이 느끼기에 전혀 남부러울 것이 없는 듯한 인생을 산 인물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죽음의 기운은, 여지껏 살아온 그의 삶 전체를 의심해 보게 하고 반추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두려움 그 자체였죠.
이반일리치의 모습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산층 가정의, 가장의 그것과 별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의 탁월한 업무능력과 적절한 인성은 빠른 승진가도를 타게 한 밑거름이 되었고 그렇게 높아가는 연봉으로 집을 꾸미고 식구들의 만족을 채워주며 자신 또한 카드놀이 등으로 동료들과 소소한 취미를 즐김으로써 목표였던 '고상한 삶'의 정석을 유지해나가는 듯 보였지요. 허나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확신은, 익숙치 않고 멀게만 보였던 '죽음'이 자신에게 곧 닥쳐올 거란 걸 직감한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날이 커져가는 통증에 가족과 그의 동료들은 공감하며 함께 걱정해 주긴 커녕 이반일리치가 죽음으로써 자신들 각자에게 미칠 영향을 계산해 보기만 급급했습니다.
그는 절망합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너무나 빨리 와버린 생의 마지막은, 그 자신의 지나온 과거 모두를 들춰 가며 속으로 질문하게 만들었지요. '내가 잘못 산 것인가?" 독자인 저의 시선에서 봤을 때 가정에 소홀했으며 지나치게 일에만 몰두하고, 판사인 자신의 직책에 남모를 우월감을 지녔던 것은, 비록 추켜 세울만한 부분은 아니지만 현대 남성 누구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는 점이었는데요. 그래서 더욱 이 소설이 대중적 교훈을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고의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르거나 중차대한 대역 죄인이 될 만한 원한을 살 일이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고 느끼니까요.(실제로도 그렇게 살고 있구요.)
한 때 그를 둘러쌌던 주변인들 모두가 돌아섰을 때 그는 죽음의 문 앞에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들이 바라보고 행복을 느낀 것은 자신의 존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돈이나 권력등의 배경이었단 것을요. 그리고 계속 이어질 삶을 향한 자들과 죽음을 향하고 있는 자신의 대비된 모습을 보며, 헛된 욕망과 성공에 대한 집착에 젖어 살았던 지난 날 본인의 행동을 뉘우치며 깊은 회한과 허망함에 빠지게 되죠. 한편, 힘없이 늘어진 그의 육체와 정신을 위로해 준 이는 뜻밖에도 평소 그가 관심조차 두지 않던 하인 게라심이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섣불리 경시하는 것들에 대해 '죽음'이라는 되돌릴 수 없는 경험이, 비로소 올바른 그 기준을 바로 세워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드라마 얘기를 좀 해 볼께요. 2011년에 방영된 <49일>이란 드라마는 판타지한 요소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저에게도 인상깊게 다가온 작품이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식물 인간이 된 주인공 지현(남규리)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 세 방울을 받아야만 새 삶을 얻을 수 있다는 스케쥴러(정일우)의 조건 혹은 그 세계 나름의 원칙에 따라 이경(이요원)의 몸을 빌려 눈물을 받으러 돌아다녀 보지만 녹록찮은 그녀의 고군분투는 저로 하여금 당시에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과연 내가 죽는다면 순수한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리고 나는 그런 눈물을 받을 수 있는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인간은 후회도 쉽지만 그걸 잊는 것 또한 금방이라는 걸 소설은 강조합니다. 군대를 가서 아무리 혹독한 훈련을 받고 깨우친 뭔가가 많더라도 민간인이 되는 순간 지독한 회복성은 무섭게도 빨리 가동된다는 공공연한 사실이, 고통과 죽음에서도 변함없이 적용되더란 얘기죠. 하지만 누구도 이것을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하라'. 어느 영화에도 등장했고 처세술 서적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명언인데요. 이 말은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니 각자의 삶에 기준이 되는 가치와 걸어온 발자취를 다시금 되돌아 보는 입장에서 매일의 반성과 깨달음을 쉬지 말고 이어가라는 '메멘토 모리'의 또 다른 말로도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승리를 놓쳤다는 사실보다 더욱 그를 절망스럽게 한 것은, 미하일 미하일로비치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기란 더욱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 p.87
(...) 이반일리치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이 거짓말 때문에 사람들이 이반일리치 자신이 바라는 만큼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반일리치는 사실대로 고백하기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아픈 아이 대하듯 그렇게 가엾게 여겨 주기를 그 무엇보다 간절히 소원했다. - p.111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이 지난 삶에서 가장 좋았던 그 모든 순간들이 이제는 그 당시에 만족스럽게 여겼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시절 행복을 느꼈던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마치 다른 누군가를 추억하는 것과 같았다. - p.130
"임종하셨습니다!" 누군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들었고 그 말을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죽음은 끝났어.' 그는 그 자신에게 말했다.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 p.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