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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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형식엔 제한이 없다. 우리가 늘 착각하고 사는 것은 인간의 문명이 진화된 이래 보편적으로 길들여진 독점적 사랑의 단면이 곧 사랑의 모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라고 소설은 얘기한다. 우리는 어쩌면 생의 많은 시간을 남녀간의 애정문제로 인한 스트레스와 갈등으로 심신을 소모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 소설이 다루는 ㄱ과 ㄴ, ㄷ의 이해불가한 덩어리짐에 짐짓 충격을 느꼈다고 하는데 표지를 보고나서 소설의 내용을 짐작하고 자연스레 받아들인 나는 왠지 모를 마음의 불경을 저지른 듯 속이 불편하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은 그닥 잘 읽히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내게 불편하게 다가온 작품이 많았다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의 글을 이따금 찾아 읽는 것은 어렵지만 늘 새롭고 유려한 문장으로 꾸려지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소유, 집착, 욕구는 사랑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가. 결코 '소소'하지 않은 이질적 풍경을 담아낸 이야기 속 세 주인공들은 서로에 대해 극단의 침묵으로써 감정을 싹틔우고 폭발시킨다. 그것은 과해 넘치는 표현과 말, 요구, 물음이 종국엔 파국으로 치닫는 일반적 사랑의 반대편에 서있다. 그들의 첫만남부터 사랑의 방식, 그리고 헤어짐은 분명 우리가 배운 사랑과 본질부터 다르다. 'ㄱ'의 오빠와 부모님의 잇다른 죽음, 5.18의 제물로 형과 아버지를 내어준 'ㄴ', 탈북자 매춘녀 'ㄷ'.  각자의 고통을 짊어진 채 살아가는 'ㄱ','ㄴ'.'ㄷ,은 어딘가 모두 닮아있지만 그것을 위로하거나 함께 나누지는 않는다. 기타리스트였던 꿈과 이혼한 남편의 당연한 사랑의 권리행사, 끔찍하고 진저리쳐지는 어린 날의 잔인한 성폭행 경험. 그들의 기억 한 곳엔 '죽음'이라는 공통 키워드가 있다. 셋을 원형으로 둥글게 묶어주는 고리인 이것은 일반이 두려워하는 '죽음'이 아니다. 마치 그의 무덤과도 같은 우물을 파기 시작한 'ㄴ'은 머리맡 침대에 놓인 그의 더플백이 의미하는 것처럼 떠나온 곳의 여정을 따라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사멸의 예비자같은 존재이다. 이 같은 예측슬픔이 앞에 놓인 순간 우리는 시한부의 생을 살고 있는 환자처럼 주인공의 심리에 그 어떤 미련도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 성(性)의 경계조차 허물어뜨리고 말없이 욕조 속에 하나되는 그 들의 모습은 한편으론 자칫 지나친 상상력의 소유자인 감독이 금기를 깨뜨린 일개 포르노 영화나 외설만화의 난교로 치부되기 쉽지만 작가는 이러한 염려를 뒤로 한채 함께하는 중의 고독을 깊게 그리며 다시 한번 존재의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셋이 뭉쳐지는 순간에 흐르는 'ㄱ'의 눈물, 축제 후 달밤의 'ㄴ'이 벌이는 자위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루키 소설 '상실의 시대'와 맥락은 다르지만 그 표현에 있어선 거부감이 일체 들지 않는 건 내 성향 탓일까 싶기도 하다. 소설을 읽으며 누구나 높은 곳에서의 추락과 죽음에의 묘한 끌림이 있다는 것을, 익숙한 문명의 사랑공식에서 탈피해 존재론적 사랑을 나누고 싶은 원시적 욕구를 잘 그려냈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며 사색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ㄱ','ㄴ','ㄷ'이 겪은 사랑의 옛모습은 폭력이다. 아내인 이유로 모든 걸 처리하고 바쳐져야 했던 'ㄱ', 밴드의 '보컬'은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 한 사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기타'의 야멸찬 목소리, 현재진행중인 '사씨'의 폭력적 행위로써의 사랑. 타인과 잤으니 내것이 아니고 내가 둘의 관계를 엿보고 또한 같이 했으니 음란하다? 전자의 경우 차츰 설득력이 떨어지는 추세지만 후자의 경우 어떠한가. 근원적 쿨해짐에 응답할 자 누구일지 그 대답이 궁금하다. 그것이 정당하다면 그 또한 사랑의 방법일 것이다. 둘이 아닌 셋의 사랑.


작가의 글 속에 종종 등장하는 배롱나무의 정체가 궁금해 검색을 해봤더니 아니나다를까 그의 자택에 꼿꼿이 자리잡고 있는 배롱나무가 레이더에 잡힌다. 내 집에도 그런 든든한 나무 한 그루 심어 놓을 마당 하나 있으면 사시사철 전원의 분위기 맘껏 즐길텐데.. 하는 생각이 소설 끝에 불현듯 들기도 한 긴 여운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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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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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의 인문학적 접근이라니 꽤나 신선한 발상이다. 바야흐로 '1인1닭' 시대에 이보다 맞춤인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전후 한국에 상륙한 서구음식들 중 유일하게 토착화에 성공하여 긴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그 인기 또한 단연 최고였던 것이 근래 들어 더욱 뜨겁게 몰아치는 열풍의 주인공 바로 '치느님'. 국물을 우려 먹는 한국 음식의 특성상 백숙과 삼계탕의 전통에 길들여진 우리의 입맛에 풍요로운 기름진 입맛을 심어준 치킨이란 녀석은, 사실 영양학적으론 빵점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바삭한 식감과 축제의 음식으로 각인되어 전국민이 사랑해마지 않는 대표외식메뉴로 빠르게 자리잡았다. 이제는 국민소득수준이 높아져 특별한 날에만 국한되지 않고 남녀노소를 불문, 입맛없는 주말저녁이나 가벼운 술자리에서도 어김없이 소환되는 치킨은 어느새 우리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치킨을 먹다 보면 문득 드는 생각이 꼭 닭이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비싼 고기를 사먹자니 허락치 않는 주머니사정에, 가성비 최고인데다 요즘엔 입맛대로 후라이드, 양념, 간장, 불닭등등 메뉴개발도 가지각색으로 이뤄지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이겠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치킨에 대한 취향이 갈리는 기준을 보면 정작 주객인 닭은 온데간데 없고 어떤 소스냐 튀김옷의 상태는 어떠하냐로 나뉜다는 것이다. 피자가 토핑이 중요한 이유와 같다고 하기엔 너무나 본질을 벗어나 있는 치킨의 오묘한 세상이다. 최근엔 각종 프랜차이즈점이 우후죽순 생겨나 그 브랜드만도 맛집책자 한켠을 가득 채울 지경인데 대체 그들이 튀겨내는 닭들은 어디서 자라고 유통되며 우리 입까지 들어오게 되는 것일까.


개인점이 아닌 프랜차이즈점이 주류를 이루는 치킨업계는 양계부터 도계, 가공, 유통, 판매까지 국내 대기업 몇몇을 중심으로 수직 계열화가 이루어져 있다. 굴지의 기업 '하림'을 비롯한 육계기업들은 그들과 손을 잡은 농가와의 계약으로 신선하고 품질 좋은 닭으로 발빠른 수급을 약속하는데 여기서부터 시작된 불편한 '갑을'관계는 최종 납품지인 치킨가맹점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갑의 횡포에 더해 최근엔 조류독감과 배달앱 서비스의 등장까지 가세해 점주들의 근심거리는 하루가 다르게 깊어진다고 하니 우리가 즐기는 먹거리 문화의 어두운 단면을 그저 듣고 넘길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치킨업계에서 소스와 염지비법은 결코 만만찮은 가격에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닌 게 되었고 타업종과의 견제도 늦출 수 없는 지경에 말 그대로 전쟁터가 따로 없는 현실인 것이다. 이쯤되면 저자의 말처럼 '이도 저도 안되면 치킨집이나 차리라'는 말은 자칫하다간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로 치부될 판이다. 한편, 치킨하면 맥주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는 KFC가 한국에 건너옴과 동시에 파트너가 된 맥주회사와의 만남, 그리고 느끼함을 달래줄 짜릿한 마실거리의 필요성이 더해져 환상의 궁합 '치맥'이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그 옛날 전기구이통닭에서 후라이드, 매콤달콤한 양념으로, 다시 '치콜'과 '치맥'으로 귀결되는 이시대 먹거리 문화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당당히 한국인만의 것으로 온국민이 불금에 영접하길 원하는 메뉴 1위가 된 것이다.


월드컵과 프로야구 시즌이 되면 북새통이 되는 건 경기장만이 아니다. 거리의 응원과 함께 매장 내 스크린 경기를 보며 뜯는 닭다리가 없으면 왠지 허전할 것 같은, 맨손 응원이 면구스러운 요즘이다.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면 팀과 나라와 국민과 치킨집 사장도 함께 울고 웃는 것이다. 연예인의 인기척도마저 언젠가부터 치킨광고의 출연유무로 판가름나게 된 것이 이젠 직접 치킨사업에 몸소 뛰어들어 짭짤한 부수입을 노리는 연예인까지 제법 생겨난 걸 보니 치킨 열풍이 당분간은 가라앉지 않을 음식문화의 대세가 될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즐거울 때 먹는 음식이라고 해서 반드시 윤리적으로 생산, 유통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주로 읽는 책을 살펴보면 유독 통일되는 키워드가 노동, 도덕, 윤리, 자본, 소비인데 이 <대한민국 치킨전> 역시 이들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돈을 주고 즐기는 외식문화에 노동문제와 윤리, 도덕성이 긴밀하게 얽혀있어 소비자로써 간과하기에는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다가와 있는 사실이란 것이다. 갈 곳없는 퇴직자들의 마지막 선택지가 치킨점 창업이라는 어떤 이의 사례에, 까다로운 고객의 입장에서 물러나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공감되어지는 슬픈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의 미각을 지배하고 회식을 주도하는 닭들의 향연은 좁디좁은 양계장에서 재촉전화에 도로를 질주하는 알바생들을 끝으로, 사연 많고 길고 긴 여정을 지나 오늘 우리의 혀를 즐겁게 해주고 한덩이의 살점이 되었으니 이것 참 살풍경한 과정이라 아니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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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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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작주의자는 아니지만 어떤 작가의 작품을 읽고 딱 feel이 왔다 싶으면 데뷔작을 포함한 여태까지의 작품의 제목이나마 훑어보게 되는 편이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알게 된 박민규 작가는 이번에도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는 꼴찌들만의 세상을 간파, 무조건 달리고 보는 세상에서 일찌감치 탈피하여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문체가 맘에 들었다. 책을 읽으며 시종 웃음기가 가실 줄 몰랐던 지난 밤, 나는 한편으론 그 속에서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고 촌철살인과 같은 그의 사회비판적 코드가 유머 곳곳에 흩어져있음을 또한 느끼고는 자세를 고쳐가며 때론 심각하게 숙독을 반복했다.


삼미 슈퍼스타즈, 내가 미처 태어나기도 전 창단되어 만 두살이 될 때쯤 사라지고 만 비운의 만년꼴찌 야구팀이다. 아니, 였다고 한다. 주인공 화자인 '나'와 그의 친구 '성훈'은 프로야구가 창단되고 '삼미'의 어린이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는데 연일, 시합에서 짜고 쳤다 해도 믿을 수 없는 경기결과에 매번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래도 '프로'의 세계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가입 초기에 주어졌던 삼미의 자랑스런 소품들은 졸지에 그를 꼴찌팀의 팬클럽이라 알려주는 '상징'이 된다. 비록 온갖 비유와 비하로 버무려져 우습게 묘사되어 있으나 '나'의 입장에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삼미'가 눈물의 해산을 하고 슈퍼맨의 위용을 잃게 된 순간부터 뭔지 모를 사회로부터의 부당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최고, 최상, 1등과 우승만을 향해 쉼없이 달려 가는 똑같은 목표를 꿈꾸는 지구인의 모습들이었던 것이다.


시위현장에서 민주주의 단결을 외치던 사람들의 물결이 잦아든 후, 개발구역의 철거농성이 벌어지고 난 후엔 언제 그랬냐는 듯 혁명의 불씨는 꺼져들고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은 유리한 동아줄을 잡고 자본주의에 순응해 살아가기 바빴다. 엘리트 교복을 입고 좋은 중학교에서부터 일류대까지 진학해 졸업장만 따면 되는 쉬운 길을 가면서도 어쩔 수 없이 느껴졌던 다양한 계층들간의 간극들. 인간에게 소속이란 과연 중요하구나. 팝가수와 청바지 메이커를 비롯해서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도 많고 수준에 맞는 사람끼리 어울려야 눈총도 피할 수 있는 피곤한 시대인데다 일류대란 딱지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셀러리맨의 삶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언제나 맘 졸이며 그러나 열심히 개발에 땀나게 뛰어야 본전이나마 찾는 인생. 그러나 구조조정이라는 폭탄을 피하진 못한 패배한 인생. '나'는 가슴 속에 꾹꾹 쌓인 스트레스와 일상의 고독을 느낄때면 어김없이 그 옛날의 '삼미 슈퍼스타즈'를 떠올리곤 했다.  회의감과 무력감에 휩싸여 몸도 마음도 파김치가 되고 주위에 남은 사람이라곤 조르바와 성훈 외 괴짜들뿐이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앞만 보고 죽자고 살아온 것일까. 나름 노력한 인생인데 왜 중간도 가지 못한 낙오된 인생이란 느낌이 드는 걸까. 이른 바 '평범한' 야구팀이었던 '삼미'의 옛 기억에 잠긴 '나'는 이윽고 피곤한 인생을 뒤로 하고 즐기는 삶을 지향하려는 시발점으로 '삼미'의 팬클럽을 결성한다. 중구난방 동네 야구수준인 그들의 야구 경기는 다른 것이 있다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 자연스러운 야구라는 것. 즐거운 건 두말할 나위 없다.


어느새 상류층, 중산층, 서민층이라는 말이 뉴스나 미디어등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말이 됐다. 이것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이건 간에 페어플레이로 상류층에 안착한 사람도, 딱히 죄를 지어 서민층으로 전락한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프로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아마추어는 출발선상에도 서지 못하는 세상. 우리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에 서있고 내가 위치한 곳은 합당한 곳인가. 넘어지고 좌절한 인생에 어깨 두드려주던 것이 미덕이었던 예전이 새삼 너무 그리워지면서 나의 '삼미 슈퍼스타즈'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되는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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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유형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승호 옮김 / 책만드는집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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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여러가지가 있다. 일단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있었고 그 이전에 일본과 한국의 역사적인 관계, 그리고 책 좀 읽는다는 분들에게는 '국화와 칼'이 필독서로 여겨진다는 게 괜한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다. 또,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와 그 국민들의 정서를 이해해 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한데, 종종 일본 문학이나 대중문화를 접할 때에도 흔히들 얘기하는 '일본적'이라는 느낌에 대해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었던 나로서는 그것들을 완전히 이해하기에 다소 역부족이었다는 게 구체적인 이유일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흔히 가슴 속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반일 감정이라는 것을 제쳐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아도 역시 일본은 이상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평소에 내가 생각하던 일본이란 나라는 왠지 모를 모순과 기묘함으로 가득찬 곳이었다. 그것은 정확한 관찰과 예리한 분석으로 이 책을 집필한 루스 베네딕트 여사에 의해 그러한 이질감과 괴리감이 한국인만이 가졌던 감정이 아님을, 세계 속의 일본은 확실히 독특한 나라임을 확인하게 해 준 증거 같은 것으로 내게 다가왔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저자는 일본 땅을 밟지 않고 순수 문헌연구와 재미 일본인의 협조만으로 이 책을 전시중에 연구용으로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문맥상에서 다소 구전으로 전해들었다는 느낌과 추측성이 다분한 문장이 많이 보인다는 점이 아쉽지만 방대한 역사적 사료근거와 인터뷰등을 통해 일본 문화 속 깊이 침투해 있는 정서적 특징을 놀라운 글솜씨로 가독성 있게 잘 풀어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솔직히 일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노골적인 성(性)문화, 다혈질, 전쟁. 순종적인 여성상, 절도있는 예의등인데 좋은 이미지가 별로 없다. 역사적 편견에 휘둘리지 않았다는 장담은 못하겠지만 단점이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일본의 교육 과정은 서구의 다른 나라들와 한국에 비해 특별하다고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달콤한 맛을 먼저 보인 후에 그것을 금기시하며 차츰 속박해나가는, 우리로서는 정말 이해불가능한 방식인데 쾌락과 자유, 예의범절등에 있어서 다소 윤리적으로 관대한 유년기와는 달리 훗날 성인이 되어 그것을 철저한 규칙으로 금하고 다스려서 위반한 자에게는 극한의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한다. 이는 절제와 정신수양을 중시하는 그들의 사상과도 상통하며 한 사람의 전 인생에 걸쳐서 바탕이 되는 가치관과 행동의 토대를 마련하는 기준이 된다. 또한 타인의 시선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고 신중에 자중을 거듭하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는 집단으로부터의 소외, 놀림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으로서 더욱 자세히 나타난다. 어려서부터 남녀 각자의 차이와 역할, 계층제도 및 예의 범절, 주, 고, 기리, 기무, 온 등으로 일컬어지는 사회적 의무에 대해 빈틈없이 주입식 교육을 받는 일본인들에게 가장 당황스러운 건 '메뉴얼'에 없는 돌발 상황 즉, 학습되지 않은 조건에서의 행동 지침일 것이다. 일본인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심하다 싶을 정도로 사소한 것- 수십가지 상황과 대하는 상대방에 따라 -들에도 일일이 정답과 오답을 제시하고 거기에 맞는 올바른 행동이 나오길 기대한다. 이것은 때로는 이상하리만치의 침착함으로도 보여지곤 하는데 바로 지진발생시에 대피요령이 그것이다. 타국민의 입장에서 본 일본인의 지나치게 차분한 질서정연함은 마치 법과 도덕을 너무나도 잘 지켜내는 모범적 시민의 사례로 비춰진다. 하지만 그 곳엔 잦은 지진 발생에 대비해, 철저히 교육받은 '메뉴얼'에 입각한 행동들의 군체만이 있을 뿐이다. 


어디선가 일본인은 이유 모를 과도한 친절에 불편해 한다는 것과 반면, 타인에 대해 지나친 배려심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약간은 모순적이란 느낌을 받았는데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렇다. 우리와는 달리 받으면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민족인 일본은, 받은 친절과 모욕을 수치화하여 정확하게 되갚아주는데 이런 관습은 우리와 비슷한 악습인 '군대문화'를 조장하고 때론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오명을 씻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은 계층적 사회구조가 오랜 세월 이어져 온 나라이다. 그 때문에 국민들 대부분의 머릿 속엔 각자의 신분에 맞는 '제자리를 찾는 것'에 대한 당연한 인식이 깔려 있었다. 부자와 서민, 남자와 여자, 선진국과 후진국등을 엄격히 구분하여 그들의 기준에 맞는 대우를 함으로써 계층 사회는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계층적 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시각이 알맞은 위치 지정의 행위로 받아들여짐으로써 '대동아의 사명'이었던 그들의 외세 침략 또한 정당화되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든지 제국주의의 땅따먹기 싸움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오직 일본만이 세계에서 우뚝 설 수 있다는 그들만의 잘못된 우월의식과 군국주의 사상이 결국에는 패전으로 종식될 운명이었던 2차 대전의 발원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이할 만한 점은 그들 일본인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줏대있게 행동하기 보다 천황에 대한 주를 지키는 것, 이름에 대한 기리를 지키는 것, 부모 자식 간의 온을 다하고 그것을 갚는 것 등 도덕적인 관념에 앞서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것을 우선시하여 행동에 옮김으로써 타국민의 입장에선 가끔 이해 불가한 상황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그야말로 특이한 민족이라는 걸 저자는 강조한다.


물질보다 정신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모든 것에 간섭적으로 통제된 규율은 현지 일본인이 아닌 유학 생활 등으로 잠시 본국을 떠난 일본인에게서 그 진상이 밝혀지곤 한다. 그들을 옥죄고 있는 보이지 않는 온갖 사회 규범이나 윤리적 의무등은 정작 그러한 생활에서 해방된 타국의 일본인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거 자신의 생활에 치를 떨며 돌아가지 못하는 것으로 비정상적인 일본의 제도들과 사고방식이 고발된다. 우리는 이제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일이, 지구편 반대쪽의 이름 모를 미개 부족의 생활 습관과 전통적 문화를 이해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수도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 역사에 식민지라는 불운한 과거의 참상을 남긴 것 만으로도 그 민족에 대한 혐오와 환멸로 가득찰진대, 가해자였던 일본이라는 민족은 이렇게, 평범하지도 않은 독특한 문화를 가진 나라였으니 그 불 붙은 감정에 석유을 끼엊은 결과로 나타난게 아닌가 싶다. 패전 후의 일본인과 지금의 일본인은 세대가 바뀌었고 그 생각과 이데올로기 또한 예전처럼 극단적이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잔재는 아직 여전히 일본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또한 곱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한 일간 국민들의 관계 및 간극들을 좁히려면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일본인의 장점 즉,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상대를 존중하며 외래의 문물과 사상을 적절히 일본적인 것으로 융화하여 고유한 자신들만의 것으로 받아들인 점 등은 단기간에 선진국이라는 대열에 합류하는 위엄을 이룬 업적의 초석이자 여러 나라가 본받아야 할 교훈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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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캐스카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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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학. 생소한 것도 같지만 이 엉뚱하고도 잔인한 사고실험의 내용을 듣다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 기시감마저 든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의 서두에서 보았던 기억과, 누군가 내게 했던 "XX와 내가 물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할거야?"라는 다소 유치한 질문이 겹쳐 떠오른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전차가 직선으로 달려오는 선로 앞에 인부 다섯명이, 지선엔 한 인부가 작업중이다. 당신 앞에 있는 레버를 돌려 전차의 방향을 틀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럴 수 있겠는가. 단, 당신은 철도직원도 무엇도 아닌 행인이므로 방관해도 상관없다. 당연한 질문을 왜 하냐며 레버를 돌리겠다는 대다수의 대답이 채 그치기도 전에 촌각을 다투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몇가지 변수가 더해진다. 지선의 인부가 자신의 가족 중 한 명 혹은 이웃이나 지인일때, 또는 남녀노소, 지위, 학력, 빈부격차의 변화에도 심지어 당신이 희생될 그 인부라도 결심을 굳힐 수 있는지 말이다. 수많은 도덕적 딜레마를 안고 있는 이 문제에 선뜻 답을 내긴 쉽지 않다. 50년동안 윤리학, 철학, 심리학자들에게  두루 회자되고 연구되었던 이 전차학은 현재도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라고 한다.


저자는 제러미 벤담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원리가 보통 일반인들이 쉽게 생각하는 윤리적 관점이라고 한다면, 제시된 또다른 상황인 레버 대신 육교 위에서 거구 한명을 떠밀어 전차를 세우거나 곡선 지선에 있는 뚱보 인부를 희생시켜 다섯명을 구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으레 반감을 갖는 현상을, 사고를 막는 '수단'으로서 목숨을 이용했다는 면에서 칸트의 원리에 위배되며 언제 누구라도 뚱보의 입장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에 사회적 공포가 야기될 것이라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우리가 느끼기에도 직접적 접촉으로 인한 살인 유발 행위는 어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살인이기에 더 꺼림칙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살인교사죄에 해당하는 범죄자들이 행동대장들보다 죄책감을 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이러한 윤리적 갈등에 대한 유비상황을 의료계나 재난현장에서 종종 접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기선 가톨릭 신자인 임산부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궁적출술(암)을 받는 행위와 의사가 한명의 목숨을 이용해 다섯 명의 교통사고 피해자를 살린 경우가 대표적으로 나온다. 멀쩡한 한 사람을 난도질해 위태로운 생명들을 구한 이 의사는 앞서 말한 뚱보가 등장하는 전차사고와 흡사한데 역시 '수단'으로 인간의 목숨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윤리적이지 못한 선택이라 지탄받아 마땅할 것이다.

줄기세포 연구가 한창일때 생명윤리에 대해 왈가왈부 논쟁이 끊이질 않았고 안락사가 허용되는 나라에서 시행되는 조력 자살 행위에서조차도 가타부타 말이 많은 현실이다. 우리는 어떤 도덕적 결정을 내릴 때 감정이나 이성 혹은 법이나 윤리 어느 것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을까. 그리고 그런 도덕적인 잣대는 인간 외 동물이나 자연 전체에 대해서도 공평히 주어져야 하는 것일까. 예의 전차사고의 피해자는 반드시 1명이어야만 할까. 책에서는 살아남은 5명의 인부들이 사회적으로 끼칠지 모르는 부정적인 영향과 희생된 인부가 장차 대단한 인물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는 극단의 논리를 펼치며 그 어떤 것도 정답은 없다며 결론을 내린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명의 목숨을 구하고자 물과 불 속에 뛰어든 인명구조대, 혹은 소방수등은 직업적 사명 외에 그 어떤 계산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개인적 판단에 몸을 내맡겨야 하는 우리로써는 그러한 딜레마에 합당한 선택을 요구받을 땐 그저 직관에 몸을 내맡기고 나중에 그 행동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다만 우리 몸이 합리적 도덕 판단에 더 가까운 쪽으로 쏠리기를 기대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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