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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구할 것인가?
토머스 캐스카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전차학. 생소한 것도 같지만 이 엉뚱하고도 잔인한 사고실험의 내용을 듣다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 기시감마저 든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의 서두에서 보았던 기억과, 누군가 내게 했던 "XX와 내가 물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할거야?"라는 다소 유치한 질문이 겹쳐 떠오른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전차가 직선으로 달려오는 선로 앞에 인부 다섯명이, 지선엔 한 인부가 작업중이다. 당신 앞에 있는 레버를 돌려 전차의 방향을 틀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럴 수 있겠는가. 단, 당신은 철도직원도 무엇도 아닌 행인이므로 방관해도 상관없다. 당연한 질문을 왜 하냐며 레버를 돌리겠다는 대다수의 대답이 채 그치기도 전에 촌각을 다투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몇가지 변수가 더해진다. 지선의 인부가 자신의 가족 중 한 명 혹은 이웃이나 지인일때, 또는 남녀노소, 지위, 학력, 빈부격차의 변화에도 심지어 당신이 희생될 그 인부라도 결심을 굳힐 수 있는지 말이다. 수많은 도덕적 딜레마를 안고 있는 이 문제에 선뜻 답을 내긴 쉽지 않다. 50년동안 윤리학, 철학, 심리학자들에게 두루 회자되고 연구되었던 이 전차학은 현재도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라고 한다.
저자는 제러미 벤담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원리가 보통 일반인들이 쉽게 생각하는 윤리적 관점이라고 한다면, 제시된 또다른 상황인 레버 대신 육교 위에서 거구 한명을 떠밀어 전차를 세우거나 곡선 지선에 있는 뚱보 인부를 희생시켜 다섯명을 구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으레 반감을 갖는 현상을, 사고를 막는 '수단'으로서 목숨을 이용했다는 면에서 칸트의 원리에 위배되며 언제 누구라도 뚱보의 입장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에 사회적 공포가 야기될 것이라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우리가 느끼기에도 직접적 접촉으로 인한 살인 유발 행위는 어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살인이기에 더 꺼림칙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살인교사죄에 해당하는 범죄자들이 행동대장들보다 죄책감을 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이러한 윤리적 갈등에 대한 유비상황을 의료계나 재난현장에서 종종 접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기선 가톨릭 신자인 임산부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궁적출술(암)을 받는 행위와 의사가 한명의 목숨을 이용해 다섯 명의 교통사고 피해자를 살린 경우가 대표적으로 나온다. 멀쩡한 한 사람을 난도질해 위태로운 생명들을 구한 이 의사는 앞서 말한 뚱보가 등장하는 전차사고와 흡사한데 역시 '수단'으로 인간의 목숨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윤리적이지 못한 선택이라 지탄받아 마땅할 것이다.
줄기세포 연구가 한창일때 생명윤리에 대해 왈가왈부 논쟁이 끊이질 않았고 안락사가 허용되는 나라에서 시행되는 조력 자살 행위에서조차도 가타부타 말이 많은 현실이다. 우리는 어떤 도덕적 결정을 내릴 때 감정이나 이성 혹은 법이나 윤리 어느 것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을까. 그리고 그런 도덕적인 잣대는 인간 외 동물이나 자연 전체에 대해서도 공평히 주어져야 하는 것일까. 예의 전차사고의 피해자는 반드시 1명이어야만 할까. 책에서는 살아남은 5명의 인부들이 사회적으로 끼칠지 모르는 부정적인 영향과 희생된 인부가 장차 대단한 인물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는 극단의 논리를 펼치며 그 어떤 것도 정답은 없다며 결론을 내린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명의 목숨을 구하고자 물과 불 속에 뛰어든 인명구조대, 혹은 소방수등은 직업적 사명 외에 그 어떤 계산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개인적 판단에 몸을 내맡겨야 하는 우리로써는 그러한 딜레마에 합당한 선택을 요구받을 땐 그저 직관에 몸을 내맡기고 나중에 그 행동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다만 우리 몸이 합리적 도덕 판단에 더 가까운 쪽으로 쏠리기를 기대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