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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평점 :
사랑의 형식엔 제한이 없다. 우리가 늘 착각하고 사는 것은 인간의 문명이 진화된 이래 보편적으로 길들여진 독점적 사랑의 단면이 곧 사랑의 모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라고 소설은 얘기한다. 우리는 어쩌면 생의 많은 시간을 남녀간의 애정문제로 인한 스트레스와 갈등으로 심신을 소모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 소설이 다루는 ㄱ과 ㄴ, ㄷ의 이해불가한 덩어리짐에 짐짓 충격을 느꼈다고 하는데 표지를 보고나서 소설의 내용을 짐작하고 자연스레 받아들인 나는 왠지 모를 마음의 불경을 저지른 듯 속이 불편하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은 그닥 잘 읽히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내게 불편하게 다가온 작품이 많았다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의 글을 이따금 찾아 읽는 것은 어렵지만 늘 새롭고 유려한 문장으로 꾸려지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소유, 집착, 욕구는 사랑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가. 결코 '소소'하지 않은 이질적 풍경을 담아낸 이야기 속 세 주인공들은 서로에 대해 극단의 침묵으로써 감정을 싹틔우고 폭발시킨다. 그것은 과해 넘치는 표현과 말, 요구, 물음이 종국엔 파국으로 치닫는 일반적 사랑의 반대편에 서있다. 그들의 첫만남부터 사랑의 방식, 그리고 헤어짐은 분명 우리가 배운 사랑과 본질부터 다르다. 'ㄱ'의 오빠와 부모님의 잇다른 죽음, 5.18의 제물로 형과 아버지를 내어준 'ㄴ', 탈북자 매춘녀 'ㄷ'. 각자의 고통을 짊어진 채 살아가는 'ㄱ','ㄴ'.'ㄷ,은 어딘가 모두 닮아있지만 그것을 위로하거나 함께 나누지는 않는다. 기타리스트였던 꿈과 이혼한 남편의 당연한 사랑의 권리행사, 끔찍하고 진저리쳐지는 어린 날의 잔인한 성폭행 경험. 그들의 기억 한 곳엔 '죽음'이라는 공통 키워드가 있다. 셋을 원형으로 둥글게 묶어주는 고리인 이것은 일반이 두려워하는 '죽음'이 아니다. 마치 그의 무덤과도 같은 우물을 파기 시작한 'ㄴ'은 머리맡 침대에 놓인 그의 더플백이 의미하는 것처럼 떠나온 곳의 여정을 따라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사멸의 예비자같은 존재이다. 이 같은 예측슬픔이 앞에 놓인 순간 우리는 시한부의 생을 살고 있는 환자처럼 주인공의 심리에 그 어떤 미련도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 성(性)의 경계조차 허물어뜨리고 말없이 욕조 속에 하나되는 그 들의 모습은 한편으론 자칫 지나친 상상력의 소유자인 감독이 금기를 깨뜨린 일개 포르노 영화나 외설만화의 난교로 치부되기 쉽지만 작가는 이러한 염려를 뒤로 한채 함께하는 중의 고독을 깊게 그리며 다시 한번 존재의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셋이 뭉쳐지는 순간에 흐르는 'ㄱ'의 눈물, 축제 후 달밤의 'ㄴ'이 벌이는 자위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루키 소설 '상실의 시대'와 맥락은 다르지만 그 표현에 있어선 거부감이 일체 들지 않는 건 내 성향 탓일까 싶기도 하다. 소설을 읽으며 누구나 높은 곳에서의 추락과 죽음에의 묘한 끌림이 있다는 것을, 익숙한 문명의 사랑공식에서 탈피해 존재론적 사랑을 나누고 싶은 원시적 욕구를 잘 그려냈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며 사색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ㄱ','ㄴ','ㄷ'이 겪은 사랑의 옛모습은 폭력이다. 아내인 이유로 모든 걸 처리하고 바쳐져야 했던 'ㄱ', 밴드의 '보컬'은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 한 사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기타'의 야멸찬 목소리, 현재진행중인 '사씨'의 폭력적 행위로써의 사랑. 타인과 잤으니 내것이 아니고 내가 둘의 관계를 엿보고 또한 같이 했으니 음란하다? 전자의 경우 차츰 설득력이 떨어지는 추세지만 후자의 경우 어떠한가. 근원적 쿨해짐에 응답할 자 누구일지 그 대답이 궁금하다. 그것이 정당하다면 그 또한 사랑의 방법일 것이다. 둘이 아닌 셋의 사랑.
작가의 글 속에 종종 등장하는 배롱나무의 정체가 궁금해 검색을 해봤더니 아니나다를까 그의 자택에 꼿꼿이 자리잡고 있는 배롱나무가 레이더에 잡힌다. 내 집에도 그런 든든한 나무 한 그루 심어 놓을 마당 하나 있으면 사시사철 전원의 분위기 맘껏 즐길텐데.. 하는 생각이 소설 끝에 불현듯 들기도 한 긴 여운의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