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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9월
평점 :
수명이 다 된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를 새로 구입해야 할 시점에서 오래도록 망설여본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관련 분야의 정보(인터넷, 서적등)를 섭렵해 반전문가가 될 때까지도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메뉴판의 음식을 고르는 일부터 외출 시 복장, 진로, 배우자, 출산, 자녀교육등 우리 인생에서 선택을 빼놓고 이뤄질 수 있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책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저자인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 레나다 살레츨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가능한 수많은 '자유'로의 선택지들로 점철된 이 시대의 딜레마와 부작용을 알아보고, 정신분석과 라캉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무한 소비사회에서 소소하게는 제품에서부터 인생의 주요 갈림길, 심지어 감정과 같은 무의식까지도 합리적 선택으로 조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이른 바 선택의 독재를 진단하고 나선다.
선택이란 행위는 정신적 외상을 초래하는데 바로 그 이유는 우리를 지켜봐 주는 '대타자'가 없기 때문이다. 선택은 늘 맹신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옭아매는 기제들에 자족하려고 애 쓸때 우리가 하고 있는 행위란 오로지 대타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 p.94
최근 '~하라', 또는 '~ 하는 법'과 같은 표제를 단 자기계발서들은 예의 선택으로의 결정권을 더욱 실현가능한 것으로 추켜세우고 노력만 하면 누구나 미디어 스타나 성공한 셀레브리티가 될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선택이란 관념 이면에 숨어있는 후회와 상실, 두려움에 대한 부정적 측면은 공공연히 가리워지고 있다. 속칭 '용팔이'에게 당했다는 후기가 올라올 때면 폰을 바꿔야 하는 고객들은 내가 그런 호구가 되면 어쩌나 하는 맘에 더욱 꼼꼼히 사전조사를 열심히 한다. 또한, 책이나 식품같은 걸 주문할 때도 상품리뷰나 별점, 판매지수를 보고 고르거나 구입이 완료된 시점에서도 그 상품평가에 대해 신경을 끄지 못한다. 즉, 타인이 보는 내 선택과, 타자의 욕망이 우리 자신의 선택에 미치는 적잖은 영향을 볼 수 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선택과 자유, 평등은 뗄 수 없는 개념이다. 선택은 우리로 하여금 자본과 능력이 주어지는 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권한를 부여하는 듯 하지만 늘 이상적 선택을 하는 게 불가능한 현실에서 타인은 자신보다 완벽한 선택을 할거라는 환상에 좌절과 죄책감에 빠지곤 한다. 그러한 불안은 결국 선택을 무한 유보하거나 다른이(카운셀러, 코치등)에게 그 권한을 위임하는 것으로서 그 책임을 회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선택의 자유가 추상적인 수준에서는 호소력 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사태가 심각해지면 사람들은 누군가가 대신 선택해주길 바란다. - p.88
많은 선택지는 그것들의 수만큼 많은 그림을 꿈꾸게 한다. 혹시라도 나타날지 모르는 더 나은 이상적 선택지에 대한 기대로 우리 사회엔 만혼남녀가 넘쳐나고 있고 열린 가능성 속에서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실패와 불행은 패배자로 낙인찍히고 마는 세상에서 우리는 늘 최선의 선택을 하려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금지와 소유에 대한 만족을 이어 언급하며 무한대로 늘어난 선택지에 반해 우리 안의 자기 금지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순간 만족도는 제로를 향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극단적 선택과 무한자유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은 우리를 더욱 더 깊은 공포에 빠뜨린다고 덧붙인다.
'심연 앞에 선 개인이 불안한 이유는 자신이 심연으로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심연에 투신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말 인용) - p.69
정신분석가들은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면서 늘 욕망과 금지를 관련지었다. 누군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어서 괴로워할 때 그 해결책은 그것을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제한을 '소중히 하도록', 그리고 욕망의 대상이 매력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손에 넣을 수 없기 때문임을 알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 p.134
사랑과 결혼에 대한 선택은 더욱 어렵고 복잡하다. 즉석만남, 의례적인 인사, 인터넷 만남등은 똑부러진 대답을 원치 않는다. 그런 면에서, 선택에 대한 책임과 결과의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매력이 이런 문화의 확산을 불러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아이를 가지는 것에 있어서도 빈민층과 중산층의 가족계획, 죽은 이의 정자를 이용한 2세출산 문제, 게이커플의 대리모계약, 체외수정의 산아제한등 과학기술과 윤리의 경계에 얽힌 수많은 선택지들이 우리를 딜레마에 빠뜨린다. 선택은 권리와도 직결된 문제이기도 한데 기형아의 태어나지 않을 권리, 고통을 끝맺을 환자의 권리(안락사)는 법과 의료계에서 종종 부딪히는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우리 안의 욕망은 그것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충족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마치 갖가지 의상과 악세사리로 치장한 아바타처럼 상상 속의 내 자신을 이것저것의 선택에 짜맞춰 넣어 보는 것이다.'나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고 내 인생은 내가 꿈꾸는 이상으로 만들 수 있는 의지가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행복에 겨운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강제된 선택은 사회를 결속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 강제된 선택의 사례가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을 통해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합의가 사회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183
랜덤 자판기라는 것이 있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말 그대로 랜덤 음료수 자판기다. 사실 이처럼 선택권이 전혀 없는 기계에 한 때 사람들은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우연과 궁금증에 이것을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그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어 짬짜면과 세트메뉴를 만들어 낸 음식문화는 이제 늘어난 선택지만큼 함께 커진 우리의 욕망을 반영하듯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선택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채, 우리를 조여매는 강제와 자유의 억눌림. 그것에서 벗어나 조금은 쿨하고 아무것도 아닌 듯한 무심한 선택을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역설적으로 후기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조장한 강박적 태도는 사실 선택의 여지를 거의 남겨 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마음을 놓지 못하고, 무질서를 몹시 두려워하며, 죽어간다는 생각에 소스라치는 아주 조심스런 사람들은, 무한하다고들 하는 선택의 가능성 앞에서 거의 향락을 얻지 못한다. - p.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