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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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이 다 된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를 새로 구입해야 할 시점에서 오래도록 망설여본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관련 분야의 정보(인터넷, 서적등)를 섭렵해 반전문가가 될 때까지도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메뉴판의 음식을 고르는 일부터 외출 시 복장, 진로, 배우자, 출산, 자녀교육등 우리 인생에서 선택을 빼놓고 이뤄질 수 있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책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저자인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 레나다 살레츨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가능한 수많은 '자유'로의 선택지들로 점철된 이 시대의 딜레마와 부작용을 알아보고, 정신분석과 라캉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무한 소비사회에서 소소하게는 제품에서부터 인생의 주요 갈림길, 심지어 감정과 같은 무의식까지도 합리적 선택으로 조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이른 바 선택의 독재를 진단하고 나선다.



선택이란 행위는 정신적 외상을 초래하는데 바로 그 이유는 우리를 지켜봐 주는 '대타자'가 없기 때문이다. 선택은 늘 맹신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옭아매는 기제들에 자족하려고 애 쓸때 우리가 하고 있는 행위란 오로지 대타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 p.94



최근 '~하라', 또는 '~ 하는 법'과 같은 표제를 단 자기계발서들은 예의 선택으로의 결정권을 더욱 실현가능한 것으로 추켜세우고 노력만 하면 누구나 미디어 스타나 성공한 셀레브리티가 될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선택이란 관념 이면에 숨어있는 후회와 상실, 두려움에 대한 부정적 측면은 공공연히 가리워지고 있다. 속칭 '용팔이'에게 당했다는 후기가 올라올 때면 폰을 바꿔야 하는 고객들은 내가 그런 호구가 되면 어쩌나 하는 맘에 더욱 꼼꼼히 사전조사를 열심히 한다. 또한, 책이나 식품같은 걸 주문할 때도 상품리뷰나 별점, 판매지수를 보고 고르거나 구입이 완료된 시점에서도 그 상품평가에 대해 신경을 끄지 못한다. 즉, 타인이 보는 내 선택과, 타자의 욕망이 우리 자신의 선택에 미치는 적잖은 영향을 볼 수 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선택과 자유, 평등은 뗄 수 없는 개념이다. 선택은 우리로 하여금 자본과 능력이 주어지는 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권한를 부여하는 듯 하지만 늘 이상적 선택을 하는 게 불가능한 현실에서 타인은 자신보다 완벽한 선택을 할거라는 환상에 좌절과 죄책감에 빠지곤 한다. 그러한 불안은 결국 선택을 무한 유보하거나 다른이(카운셀러, 코치등)에게 그 권한을 위임하는 것으로서 그 책임을 회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선택의 자유가 추상적인 수준에서는 호소력 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사태가 심각해지면 사람들은 누군가가 대신 선택해주길 바란다. - p.88



많은 선택지는 그것들의 수만큼 많은 그림을 꿈꾸게 한다. 혹시라도 나타날지 모르는 더 나은 이상적 선택지에 대한 기대로 우리 사회엔 만혼남녀가 넘쳐나고 있고 열린 가능성 속에서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실패와 불행은 패배자로 낙인찍히고 마는 세상에서 우리는 늘 최선의 선택을 하려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금지와 소유에 대한 만족을 이어 언급하며 무한대로 늘어난 선택지에 반해 우리 안의 자기 금지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순간 만족도는 제로를 향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극단적 선택과 무한자유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은 우리를 더욱 더 깊은 공포에 빠뜨린다고 덧붙인다.



'심연 앞에 선 개인이 불안한 이유는 자신이 심연으로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심연에 투신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말 인용) - p.69


정신분석가들은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면서 늘 욕망과 금지를 관련지었다. 누군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어서 괴로워할 때 그 해결책은 그것을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제한을 '소중히 하도록', 그리고 욕망의 대상이 매력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손에 넣을 수 없기 때문임을 알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 p.134



사랑과 결혼에 대한 선택은 더욱 어렵고 복잡하다. 즉석만남, 의례적인 인사, 인터넷 만남등은 똑부러진 대답을 원치 않는다. 그런 면에서, 선택에 대한 책임과 결과의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매력이 이런 문화의 확산을 불러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아이를 가지는 것에 있어서도 빈민층과 중산층의 가족계획, 죽은 이의 정자를 이용한 2세출산 문제, 게이커플의 대리모계약, 체외수정의 산아제한등 과학기술과 윤리의 경계에 얽힌 수많은 선택지들이 우리를 딜레마에 빠뜨린다. 선택은 권리와도 직결된 문제이기도 한데 기형아의 태어나지 않을 권리, 고통을 끝맺을 환자의 권리(안락사)는 법과 의료계에서 종종 부딪히는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우리 안의 욕망은 그것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충족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마치 갖가지 의상과 악세사리로 치장한 아바타처럼 상상 속의 내 자신을 이것저것의 선택에 짜맞춰 넣어 보는 것이다.'나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고 내 인생은 내가 꿈꾸는 이상으로 만들 수 있는 의지가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행복에 겨운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강제된 선택은 사회를 결속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 강제된 선택의 사례가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을 통해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합의가 사회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183



랜덤 자판기라는 것이 있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말 그대로 랜덤 음료수 자판기다. 사실 이처럼 선택권이 전혀 없는 기계에 한 때 사람들은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우연과 궁금증에 이것을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그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어 짬짜면과 세트메뉴를 만들어 낸 음식문화는 이제 늘어난 선택지만큼 함께 커진 우리의 욕망을 반영하듯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선택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채, 우리를 조여매는 강제와 자유의 억눌림. 그것에서 벗어나 조금은 쿨하고 아무것도 아닌 듯한 무심한 선택을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역설적으로 후기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조장한 강박적 태도는 사실 선택의 여지를 거의 남겨 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마음을 놓지 못하고, 무질서를 몹시 두려워하며, 죽어간다는 생각에 소스라치는 아주 조심스런 사람들은, 무한하다고들 하는 선택의 가능성 앞에서 거의 향락을 얻지 못한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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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철학자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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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삶이라고 하면 으레 고상하고 품위있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침묵과 고요 속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연구와 집필에만 매달리는 열정적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여기, 생애의 25년을 길위에서 노동과 함께 사색하는 걸 즐겼던 이가 있다. 지독한 독서광에 소박한 삶을 지향했던 미국의 사상가이자 저술가인 에릭 호퍼. 바로 이 책 <길 위의 철학자>의 주인공이다.


유년 시절에 실명위기를 겪고 부모를 일찍 여읜 불우한 시기를 지나는 동안 그의 정신력과 자유의지는 강하고 확고하게 자리잡혀 있었다. 굶주림에 대한 걱정, 내일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그에게서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겐 의미있는 생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의식주 해결은 그 다음문제였다. 과일행상, 품삯일꾼, 사금채취공, 웨이터보조등의 임시직만으로도 돈은 충분했다. 그런 와중에도 쉼없이 사색을 하는 것으로 지적욕구는 항상 충족됐다. 또한 남다른 친화력과 이야기꾼기질은 어딜 가나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만점으로 통했다. 그 중에서도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 헬렌과 농장 부호 쿤제와의 만남은 내게 인상깊게 남았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와 몽테뉴의 <수상록>, 그리고 구약성경에 깊이 탐독했던 그는 꾸준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한 반면,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명예를 얻는 것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좋아지는 것을 느끼기 위해, 순수목적인 글쓰기를 무한 반복했다는 그의 인터뷰에 절로 고개가 숙연해졌다. 


엘센트로 임시수용소에 머물렀던 한달여간은 그에게 적응불능자가 인간 사회에서 맡는 고유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됐고 잠시나마 무리 속에 있으면서 사람을 관찰하고 창조의 정점에 이르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모름지기 인간이란 군중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재능의 발견이 용이하단 걸 깨닫게 된 시점이었다.


그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좋아했는데 그의 입을 통해 전해듣는 많은 이들의 후일담과 에피소드는 유쾌하고 생생하기 그지없다. 한편, 그가 실명했을 때조차도 시도하지 않았던 자살을 뒤늦게 결심했던(비록 미수로 그쳤지만) 이유는 자본이 필요악인 1930년대 당시 미국사회 현실의 도피처로서 앞으로의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없음을 비관한 결과로 보여진다.


잉여된 자본을 축적하고 부와 권력에 탐욕하는 세상에서 호퍼의 자서전은 우리에게 커다란 메시지를 던져준다. 타고난 지적능력에 독학으로 원하는 학문을 공부한 에릭 호퍼를 읽으며 철학자의 모델, 정석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믿지 않으실 테지만 제 미래는 당신보다 훨씬 더 안전합니다. 당신의 농장이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실테지만 혁명이 일어나면 당신은 농장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떠돌이노동자인 저는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죠. 화폐와 사회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건 씨 뿌리고 수확하는 일은 계속됩니다. 물론 그 일은 저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구오. 절대적 안전을 원한다면 부랑자 무리에 섞여 떠돌이 노동자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세요."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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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봤어? - 내일을 바꾸기 위해 오늘 꼭 알아야 할 우리 시대의 지식
노회찬.유시민.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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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관련 팟캐스트를 듣다가 늘 상위에 랭크돼 있는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볼 때면 국민들이 정치와 세상 돌아가는 것에 그리 귀를 닫고 살지는 않는 것도 같고 노/유/진 세 사람의 입담이 대단한가 보다 싶기도 했다. 그런 참에 방송 중 인상깊은 주제들을 책으로 담아낸 <생각해봤어?>는 정치를 막연히 어렵게만 생각해왔던 나에게 꼭 필요한 엑기스만을 추려낸 알맹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초반에 등장하는 내용은 교황의 방한, 남북 관계 개선, 진보와 보수정당의 이념대립같은 논의들로, 딱 봐도 먹고 살기 바쁜 서민들에게 그닥 와닿지 않는 문제같아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 아무리 높은 교황도,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중국등의 열강도 우리의 안보와 평화를 보장해 줄 수 없고 열쇠는 우리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을 노.유.진은 강하게 환기시킨다.


최근 군대 내 폭력 사건과 땅콩회항같은 갑질논란이 이슈로 떠올라 국민들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린데 이어 대기업에게 유리한 '특별맞춤법'과, 무조건적 경영세습관행이 불러온 권력의 횡포가 도를 넘어섰다는 지적은 세 사람의 재치과 울분이 섞여 더욱 공감대를 가지고 읽을 수 있었고, 그것은 곧 21세기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 원인 중 하나인 상속자본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었다.


유전자 변형 식품인 GMO수입과 지난 원전사고에 대해 토론하는 부분에서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 안전에 둔감하게 된 우리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었는데 내가 원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다는 것을 상기시켰고 그 후 무얼 먹더라도 성분표기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유명대학의) 졸업생들이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권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권력의 네트워크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사람들이 그 대학에 들어가는 거거든요. - p.262



오로지 대학입시를 목표로 달려가는 한국의 교육현실은 언제쯤 변화의 새바람이 불어 아이들을 주체적 삶의 주인공으로 이끌 수 있을까. 지난 세월호 참사로 많은 걸 느낀 국민들이 진보교육감을 선택한 것은 여러모로 우연이 아닌 듯 하다. 한편, 사이버 망명 사태로 들끓었던 카톡과 메일검열은 '단속'과 '입막음'으로 대표되던 유신정권의 체제처럼 표현의 자유와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개념이 과거로 후퇴하고 있는 듯한 현실에 절로 심각해지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명예훼손은 형사처벌을 하지 않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민들의 평판을 보호하는 순기능보다는, 권력자가 검찰을 동원해서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법적근거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 p.290



안 줄걸 줄것처럼 얘기하고 줬다 뺏는 등 허술한 노령연금의 실체를 파헤치고 올바른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보며 지금의 젊은 세대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정부와 정당은 어딘지 심도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비로소 나의 한표를 소중히 행사해야 할 진짜 이유와 올바른 정치적 입장을 고수해야 이유 역시 확실해지는 것 같았다.



가장 가난한 사람의 복지는 그대로예요. 복지예산이 절박함의 순위대로 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결국 목소리가 큰 순서인데,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제대로 조직되지 못하고 있는 거죠. - p.313



독자들 중에서도 관심분야가 다르듯이 정치에 대한 시각도 남녀노소, 계급, 소득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30대 여성인 나는 여태까지 정치판과 세태흐름에 대해 부정적이고 무관심한 편이어서 이 책 <생각해봤어?>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평소에 흘려들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노.유.진의 거침없고 속시원한 말빨은 그들의 두루 박식한 지식과 함께 우리 사회의 지탄받아 마땅한 이들에겐 촌철살인과 같은 지적과 서슴없는 비판을 날리며 통쾌함을 선사하고 국민들의 관심을 요하는 건에 대해선 초대게스트와 함께 해당 문제에 대해 다소 깊이있게 다루어 전문지식을 넓힐수도 있었다.

비교적 대중적 관심사가 높은 주제들로 뽑아 평소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고 있던 민감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형식으로 풀어낸 <생각해봤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봐야 할 필독서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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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소년 탐정단 오사카 소년 탐정단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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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다소 가볍고 훈훈한 소설을 읽게 되어 이렇게 서평을 쓰는데도 한결 부담이 없는 것 같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는 내게 특별한 작가다. 비록 요즘에는 추리소설을 읽는 일이 뜸해서 그의 작품을 예전보다 자주 접하진 못하지만 처음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용의자 X의 헌신>의 유가와, 이시가미, 구사나기의 진땀나는 두뇌싸움이 생각날 때면 책장 한켠에 고이 꽂아둔 책을 다시 꺼내보곤 한다.


<오사카 소년 탐정단>은 일본에서 2012년 드라마시리즈로 방영된 바 있는 추리물로, 일단 소년물같은 표지가 독자들의 시선을 확 잡아끈다. 다섯 편의 짤막한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은 오사카 오지 초등학교에 부임한지 5년이 된 다케우치 시노부라는 25살의 미혼교사가 중심 인물이다. 그녀는 비록 형사는 아니지만 번뜩이는 추리력과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발휘하여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에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드는 다소 겁없고 투박한 성격의, 작가의 표현대로 상상을 해보자면 성격 급한 한국의 부산 여자(?)같은 느낌이 물씬 든다. 나 또한 부산사람이지만 그런 이미지를 지울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사건을 몰고 다니는 듯한 시노부 선생을 보고 있자면 예전에 재밌게 읽었던 추리만화 <명탐정 코난>이 생각난다. 여기선 시노부가 예의 코난과 사토형사의 이미지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사토 형사가 있다면 꼭 필요한 캐릭터, 그녀를 좋아하는 후배 다카기 형사가 여기선 '신도'라는 인물로 재탄생되어 등장한다. 말단이지만 항상 맡은 일에 충실하는 신도는 같은 말단 음흉쟁이(?) 우루시자키 형사와 그녀의 말썽꾸러기 애제자 다나카, 하라다, 하타나카의 응원에 힘입어 시노부 선생에게 수줍은 대쉬를 거듭한다. 그러나 좀 진지한 만남이 시작되려 할 때면 어김없이 사건은 터지고 설상가상 그의 라이벌 볼매남 혼마 요시히코의 등장에 선수를 빼앗길까 언제나 전전긍긍한다.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다뤄지는 사건들은 흔히 우리 주위에서 봄직한 사건들로 대개 두 건의 테마가 맞물려 작가의 특색있는 묘사가 돋보이는 주변인물들의 진술로 독자가 자연스레 해결과정을 따라가며 함께 추리해 볼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빵대십 대머리의 교무주임 나카다의 주선으로 시노부 선생의 맞선 자리가 마련되는 3번째 이야기에서 초조한 맘에 몰래 그 만남을 엿보는 형사 신도와 아이들의 모습에서 현실에선 불가능한, 추리 소설만의 매력인 친근한 형사 이미지가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어느덧 그녀가 담임을 맡았던 6-5반의 한 해가 저물고 이윽고 '소년 탐정단'들도 졸업을 맞이하는데 이 날도 역시 순조롭게 넘어가질 못하고 또다시 심상찮은 사건에 휘말리며 발군의 추리본능과 예사롭지 않은 뜀박질로 시노부 선생이 사건해결에 또 다시 한 몫 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장면 장면이 너무 또렷하게 연상되어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특히, 신도 형사와 죽이 짝짝 맞는 탐정단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천진난만하고 재밌었다. 책장의 마지막을 덮었을 때 등장인물 모두에게 정이 들어버려 마치 나도 그들과 영영 이별을 해야 할 것 같은 아쉬움이 밀려왔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고향 오사카를 배경으로 순박하지만 기개있고 당차게 그려진 그들의 모습에서 과거 인상깊게 읽었던 추억의 만화를 떠올렸다는 미야베 미유키의 해설을 읽으며 조금은 그 느낌을 공감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시노부와 중학생이 된 그의 제자들이 등장하는 작가의 다음 작품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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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잠의 종말
조너선 크레리 지음, 김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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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유난히 잠이 많아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다가 선생님들께 딱 걸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닌데, 그때마다 "자기 싫어도 죽으면 평생 자야 하는 게 잠이니 지금은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해!"라는 다소 철학적(?)이면서도 인생무상(?)의 의미가 짙은 꾸지람을 듣곤 했다. 그 시절,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 1위를 당당히 차지했던 비틀즈의 Yesterday가 내 알람시계 미디버젼으로 내장돼 있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한동안 그 노래의 첫 소절만 나와도 치를 떨었던 웃지 못할 기억도 생생하다.


제레미 리프킨의 저서들을 비롯한 수많은 종말 시리즈 대열에 합류한 이 책은 사뭇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눈만 뜨면 새로운 디지털기기가 등장하고, 단명하는 유행의 사이클 궤도안에서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빠르게 적응하고 뒤쳐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불안과 노력은, 의약과 카페인의 힘을 빌어 '의식의 연장'으로 치닫게 되었다. 일주일 내내 24시간 가동되는 이른바, 24/7시장은 이런 우리의 깨어 있는 시간을 이용해 지속적인 노동과 소비를 촉구한다. 인간 본연의 특권인 꿈 꿀 권리는 잦은 철야, 즉각 피드백을 요구하는 항시대기, 그리고 쏟아지는 미디어에 잠식되어 그 입지가 점차 좁아지고 있다.


군사기획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던 불면 연구는 오늘날 잠들지 않는 노동자, 쉼없는 소비자를 생산해 내어 제약회사 및 대기업의 호주머니를 두둑히 채워주고 있으며 언젠가는 잠도 생수처럼 구입해 누려야만 하는 사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나온 지금, 잠은 더 이상 제어 불가능한 '자연적 장벽'이 아니다. 시간이 돈의 가치를 넘어선 이 시대에 휴식과 재생, 회복이란 의미보다 게으름, 태만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잠은 점점 죄악시되어가는 양상을 띠고 있다.



24/7은 무차별의 시간으로, 이 시간과 마주하여 인간 삶의 허약성은 갈수록 부적합하게 된다. 그 시간 속에서 잠은 꼭 필요한 것도, 불가피한 것도 아니다. (...) 24/7은 잠시도 쉬지 않고 무한히 일한다는 관념을 그럴듯한 것, 심지어 정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 p.25


불면상태는 누그러지지 않는 각성 상태와 구별되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고난에 대한, 그리고 우리를 압도해오는 책임의 무한성에 대한 거의 견뎌낼 수 없는 주의가 동반되는 것이다. - p.39



불면은, 인간의 경쟁의식과 24/7체제의 무한 정보획득 가능성에 힘입어 도피불가한 시각경험의 연속성으로 당연시되고, 도시의 야경 속, 환하게 밝혀진 테트리스 블록같은 건물 안 사무실처럼 부지런과 성실의 대명사가 되었다. 금융서비스, 인터넷 상거래, 야식문화와 같이 언제든 필요하면 즉각구매와 처리가 가능한 시스템은, 반면 우리를 잠들지 않는 산업의 노예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일상과 일의 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제도의 권력이 점차 우리의 사적공간과 의식, 기억을 통제하고 포획해나가는 사회속에서 피로란, 늘 등에 업고 다녀야 마땅한 보이지 않는 짐이다.


이 책의 저자 조너선 크레리는 이렇게 부득불 시대와 반체제적 성격을 띠게 된 잠이 역사적으로 그 지위가 하락해가는 과정을 살펴보고 그로 인해 얻어진 대기업들의 전략적 이윤창출, 약물의 오남용문제, 움직임없는 불활성을 배척하는 '테크노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다각도적 비판을 제시하고 나선다. 책에 언급되어진 소설이나 영화, 예술작품 그리고 사상가들의 말은 작금의 현실을 통탄하는 저자의 말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해온(?) 잠 안재우기 고문을,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무언의 강제에 의해서 이젠 스스로 자처해 피로사회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공휴일에도 걱정과 스트레스로 가득찬 머리로 온전한 잠을 청할 수 없다. 잠든 자는 이단이며 도태와 배제의 1순위로 낙인찍히기 충분한 대상이기에 수면 중 받는 전화에도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은 '맨정신인척'해야 하는 괴로운 세상이다.


지금은 치워버리고 없지만 tv가 있을때만 해도 만사 모든 일을 제쳐두고 좋아하는 드라마를 본방사수하느라 아까운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러가도록 방관하고 있었다. 능동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나마 아직 나는 스마트폰의 사용을 거부하고 사방에서 보도되는 세상사 뉴스를 알 것만 알아야 권리를 지키고 있다. 잠을 잉여스런 행위로만 치부하는 사회에 대항하여 숙면을 우선시하는 것이 어쩌면 당장은 이기적이게 보일지라도 우리의 꿈을 컨텐츠화시키고 로봇과 가까운 기계인간을 만들려는 무모한 프로젝트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선 잠의 중요성을 느끼고 지켜내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잠은 개체화로부터의 주기적인 놓여남, 즉 우리가 낮이면 거하고 관리하는 얄팍한 주체성들의 느슨하게 얽힌 타래가 매일밤 풀어지는 것이다. - p.196



인간의 본능인 잠을 고의적으로 조절하려는 이러한 세태는, 항시 대기인 전원 on상태에서 의식적으로 풀려나야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 즉,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시도가 많아질수록 그 힘을 잃기 마련이다. 그것은 잠이 현실과의 단절과 쓸모없는 시간소비가 아니라 의식의 연장선에서 삶의 한부분으로써 영원의 죽음과는 다르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고유한 권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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