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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철학자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철학자의 삶이라고 하면 으레 고상하고 품위있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침묵과 고요 속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연구와 집필에만 매달리는 열정적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여기, 생애의 25년을 길위에서 노동과 함께 사색하는 걸 즐겼던 이가 있다. 지독한 독서광에 소박한 삶을 지향했던 미국의 사상가이자 저술가인 에릭 호퍼. 바로 이 책 <길 위의 철학자>의 주인공이다.
유년 시절에 실명위기를 겪고 부모를 일찍 여읜 불우한 시기를 지나는 동안 그의 정신력과 자유의지는 강하고 확고하게 자리잡혀 있었다. 굶주림에 대한 걱정, 내일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그에게서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겐 의미있는 생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의식주 해결은 그 다음문제였다. 과일행상, 품삯일꾼, 사금채취공, 웨이터보조등의 임시직만으로도 돈은 충분했다. 그런 와중에도 쉼없이 사색을 하는 것으로 지적욕구는 항상 충족됐다. 또한 남다른 친화력과 이야기꾼기질은 어딜 가나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만점으로 통했다. 그 중에서도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 헬렌과 농장 부호 쿤제와의 만남은 내게 인상깊게 남았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와 몽테뉴의 <수상록>, 그리고 구약성경에 깊이 탐독했던 그는 꾸준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한 반면,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명예를 얻는 것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좋아지는 것을 느끼기 위해, 순수목적인 글쓰기를 무한 반복했다는 그의 인터뷰에 절로 고개가 숙연해졌다.
엘센트로 임시수용소에 머물렀던 한달여간은 그에게 적응불능자가 인간 사회에서 맡는 고유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됐고 잠시나마 무리 속에 있으면서 사람을 관찰하고 창조의 정점에 이르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모름지기 인간이란 군중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재능의 발견이 용이하단 걸 깨닫게 된 시점이었다.
그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좋아했는데 그의 입을 통해 전해듣는 많은 이들의 후일담과 에피소드는 유쾌하고 생생하기 그지없다. 한편, 그가 실명했을 때조차도 시도하지 않았던 자살을 뒤늦게 결심했던(비록 미수로 그쳤지만) 이유는 자본이 필요악인 1930년대 당시 미국사회 현실의 도피처로서 앞으로의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없음을 비관한 결과로 보여진다.
잉여된 자본을 축적하고 부와 권력에 탐욕하는 세상에서 호퍼의 자서전은 우리에게 커다란 메시지를 던져준다. 타고난 지적능력에 독학으로 원하는 학문을 공부한 에릭 호퍼를 읽으며 철학자의 모델, 정석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믿지 않으실 테지만 제 미래는 당신보다 훨씬 더 안전합니다. 당신의 농장이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실테지만 혁명이 일어나면 당신은 농장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떠돌이노동자인 저는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죠. 화폐와 사회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건 씨 뿌리고 수확하는 일은 계속됩니다. 물론 그 일은 저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구오. 절대적 안전을 원한다면 부랑자 무리에 섞여 떠돌이 노동자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세요." - p.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