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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속, 발기하는 사물들 - 미술과 철학의 공통먹이, 사물 이야기
조광제 지음 / 안티쿠스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읽기가 수월하지 않고 그 안에 쌓인 작가의 내공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 역시 만만치 않다. 만만치 않은 것은 우선 제목에서 드러난다. "발기하는 사물들이라니" 드러나는 사물들이나 나타나는 사물들이라고 표현해도 좋을텐데 굳이 발기라는 성적인 암시를 집어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도발적인 제목속에  숨겨진 의미는 무엇일까?

내용에 들어가면 더 숨이 막혀온다. 사물을 온갖 사유와 추상의 세계로 재단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사물들 가령 꽃, 책, 의자, 핸드폰, 돌..... 그 하나하나에 의미와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저자는 왜 이렇게까지 치열한 것일까?

그 이유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밝혀진다. 저자는 세잔의 <과일그릇, 유리잔, 사과가 있는 정물>이라는 그림을 보여준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정물화.... 그러나 저자의 치열한 분석은 무섭기까지 하다. 세잔의 그림은 사물과 사물사이에 가로놓인 색의 경계를 허물어 뜨린다. 빨간 사과위에 덧 입혀진 푸른빛, 그리고 물컵의 투명함을 통과해 뿌려지는 조화로운 색의 배치..... 마찬가지로 세잔의 <대수욕도>라는 여자들이 목욕하는 그림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에서는 인간과 사물사이에 놓인 경계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다. 작가는 왜 이렇게 사물과 사물, 사물과 인간과의 사이에 놓인 경계를 무너뜨린 것일까? 그것은 저자가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철학적으로 독자들에게 되묻기 위함이다.

우리가 사물이라고 통칭해 부르는 것의 실질적인 실체는 존재하는 것일까? 모든 것은 변한다. 자연도 인간도 영구적일 수 없다. 이러한 존재와 비존재, 영속성과 비영속성에 대한 만만치 않은 삶의 질문을 그림의 화폭속에 담아내 그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리는 저자의 솜씨가 놀랍기만 한다.

그런데 세상은 이처럼 사물과 사물사이의 경계만 허물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물이 이리저리 비틀리고 쪼개지며 분리되기도 한다. 이제 저자는 우리를입체파 화가이ㅡ 대명사인 피카소의 세계로 안내한다.

책에 소개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칸바일러의 초상화> <등나무가 있는 정물> 작품을 보면 사물이 여지없이 조각조각 해체되고 인물과 배경의 구분도 무너지며 거기다가 다중적인 시각과 구조를 하나의 화폭에 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사물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에서 더 발전되어 사물이 조각조각나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천재들은 자고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것을 예술작품속에 녹여 놓았던 것이다.

뒤이어 마르셀 뒤샹 또한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라는 작품을 통해 사물을 갈기갈기 조각내었다.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나체의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이 작품에 대해 마르셀 뒤샹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실제 인물이 실제 계단을 내려오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필요가 없다. 근본적으로 운동을 그림에 삽입한다는 것은 관객의 눈이다"

그림속에 움직이는 운동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바라보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 놓았다는 말이다. 관객의 참여가 작품의 한 구성이 되는 작품..... 이는 사물과 인간과의 또 다른 조우가 아닐까?

자, 여기서 잠깐 정리를 해 보고 넘어가자. 과연 사물이란 무엇일까? 저자가 그토록 집착한 사물이란 무엇이며 그것과 연계한 미술작품, 철학.... 그 심연의 세계속에서 독자들은 무엇을 발견한 것인가? 그것을 찾기 위해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책 제목이기도 한 <발기하는 사물들>이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화장실의 변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작품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변기를 그대로 옮겨 놓다니.... 아니, 그런것도 작품이 되는 것일까?

<샘>이라는 변기의 작품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특정 예술작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우리 주변에 있는 핸드폰, 책상, 의자, 자전거는 작품이 될 수 없는가? 마르셀 뒤샹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작품의 세계를 조롱하면서 동시에 사물의 무너진 경계속에 진정한 예술은 그냥 우리 주변에 있는 평이함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앤디 워홀의 <이백 개의 캠벨 수프 깡통들>같은 작품에서처럼 대량생산, 대량소비되는 시대속에서도 그 하나하나의 의미에 주목해 보는 것이다. 익명의 버림받은 사물들 또한 똑같은 사물이 아니던가? 그 사물들도 주목받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수프 깡통들 하나하나 말이다. 그리고 주목받고 있을 때 바로 발기하는 사물들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발기하는 사물들은 결국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가 주목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제목은 아니었을까?

이 어려운 책을 덮으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평범한 속에 깃든 비상함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된다.



 

 

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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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줘
기욤 뮈소 지음, 윤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재미있는 소설이다. 로맨스와 판타지, 그리고 추리와 반전까지 적절히 버무려 놓았다.  잘 만들어진 영화한편을 보는듯한 속도감과 긴장감, 그리고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약간의 여운까지 지녔다.  삶의 양태들이 만들어낸 실타래들은 우연과 인연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사슬의 구조속에 얽매여 살아간다. 이야기는 이처럼 사람들 사이의 행위(원인)가 여러 결과를 파생시키면서 운명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애초에 주인공의 방아쇠가 특정인에게 당겨지지 않았다면, 모든 미래가 다 다른 방향으로 변했을 것이다. 나비이론처럼 나비의 날개짓이 폭풍우를 몰고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또 모순되게 인간의 행동으로 인해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위에 운명이라는 굴레를 덧씌우고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우연과 인연, 자유의지와 운명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심각한 질문은 아니다. 작가가 이 책에서 철학적인 사유를 독자에게 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에서 관통되는 우연과 인연, 자유의지와 운명이라는 설정은 소설의 재미를 위한 장치에 가깝다.

그러나 참,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자유의지를 말하면서도 운명을 예감해야하고, 우연을 이야기하면서도 인연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이러한 알송달송한 문제들을 작가는 튼튼한 소설적 배경과 기반위에 판타지적인 요소를 추가해 흥미로운 소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또 소설은 결말부분을 통해 원인은 해결되어야하고 끝맺음지어져야 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업보라고 해야하나? 행위는 반드시 결과로 언젠가 어떠한 형태로든 나타난다는 논리 말이다. 소설속의 사건들을 열거해가며 더 리뷰를 이끌어나가고 싶지만 앞으로 읽게 될 독자들을 이해서 더 구체적인 내용은 삼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비소설의 리뷰는 맘껏 책의 내용을 인용해도 좋겠지만 이런 흥미진진한 반전이 들어있는 소설은 이쯤에서 리뷰를 마치는 것이 좋겠다. 어쨌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는 말과 함께 약간 어리둥절케 하는 저승사자에 대해서 한마디만 하고 넘어가자.

저승사자의 행동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이미 죽은 마당에 권총을 지니고서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아니나 다를까? 총을 맞고 죽은뒤 다음날 버젓히 살아난다. 그런 불사신이 왜 권총을 소지하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는듯한 행동을 해야 하나? 이런 저승사자, 유령은 처음 보았다. 정말 웃기는 유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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