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사는 곳에는 5일장이 열린다.  운 좋게 장날이 휴일이나 주말과 맞아 떨어지는 날에는 장에 가시는 엄마를 따라 나선다.  장이 열리는 곳까지는 약 20분가량 걸어야 하는데 중간에 장바구니를 들고 걸어가시는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장에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  한 공간에서 어울리지 못 할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한다.  평소에는 소음으로 느껴 신경에 거슬리는 시끌벅적한 소리도,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생선 비린내도 장에서 만큼은 모두 허락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이다.  수많은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 중 단 한 사람도 같은 옷을 입거나 같은 목소리를 내는 이는 없다.  길에 앉아 소쿠리에 이것저것 잔뜩 담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씩 하시는 할머니들.  가끔 마음이 짠해지는 할머니를 만나게 될 때도 있다.  그런 날은 집에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머리가 복잡하다.  강아지들이 있는 곳에는 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다.  강아지들, 너무 귀엽고 예쁘다.  지나가면서 조그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싫어하시는 눈치여서 언제부턴가 눈으로만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눈으로만 느끼는 것도 나름 신선한다.  장에 가면 꼭 들르는 곳은 화초를 파는 곳이다.  온갖 종류의 식물들이 제각각의 자태를 뽐내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먼저 화려한 빛의 꽃에 눈이 머문다.  하지만 눈이 가장 오래 머무는 것은 꽃이 아니다.  특별할 것도 없이 초록빛으로만 자신을 표현한 식물에 마음의 눈이 더 오래 머문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좋아해 온 배우가 있다.  멜 깁슨.  내가 이 배우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하나, 눈빛 때문이다.  진지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소년 같은 장난스런 눈빛으로 변하는 마법 같은 눈빛을 지닌 배우.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 볼 것만 같은 투명한 눈빛에 마음을 빼앗긴지 오래되었다.  어느 해 그의 영화가 1월에 개봉한 적이 있다.  눈이 내리는 장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겨울이 많을 정도로 따뜻한 남부지방에 그 날,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가 개봉하는 그 날, 폭설이 내렸다.  그 날 하루 종일 우울했다. 

 

할머니, 강아지, 화초 그리고 영화배우, 이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시간을 내어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적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잊고 있었던 것들이다.  머리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미소 짓게 만드는, 내게 소중한 기억들을 왜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이 책 <끌림>은 이런 책이다.  내가 좋아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며 기억하게 만든다.  내게도 소중한 것이 있다고 깨닫게 하고 행복한 추억을 회상하게 만드는 이상한 힘을 지닌 책이다. 

 

이 책은 여행의 기록도 아니며 더더군다나 여행의 지침서도 아니라 저자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이미 읽은 여행책과는 달리 내게 익숙한 곳이 아닌 특별한 장소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진 않는다.  대신 구수하고 따뜻한 사람 냄새를 느끼게 한다.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그곳에는 어김없이 희로애락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서 저자가 느낀 진실함과 슬픔, 욕심을 나 또한 느낀다.  그리고 저자가 유독 강하게 느끼는 고독까지도 어렵지 않게 공감하게 된다.  정호승 님이 <수선화에게>란 시에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 했듯이 외로움과 고독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므로.  여행을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했던가.  이 책에는 눈물이 있고 땀이 있다.  삶이 있다. 

 

저자가 끌림을 느낀 모든 것들과 비교해 내 마음에 있는 할머니, 강아지, 화초 그리고 영화배우 등이 초라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내가 끌림을 느끼는, 내게 소중한 것들이므로.  내게 소중한 것들이 삶에 대한 애착과 열정을 주므로.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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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 Free 러브 앤 프리 (New York Edition) - 개정판
다카하시 아유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에이지21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읽기를 마친 후 러브 앤 프리 (LOVE & FREE) 라고 인쇄되어 있는 표지를 유심히 보았다.  개인적으로 풍경사진 보다는 인물사진을, 인물사진 중에서도 특히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과 카메라 앞에서 짐짓 점잖은 척하지만 장난기를 숨길 수 없는 천진한 표정이 담긴 사진을 좋아하기에, 이 책의 표지는 참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제목 러브 앤 프리 (LOVE & FREE).  사랑과 자유라는 테마는 유독 손길이 가는 오래된 물건처럼 이미 빛바래고 낡았지만 친숙함과 포근함 그리고 간절함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파고드는 힘을 가졌다고 믿고 있었기에, 어떤 다른 단어보다 이 책을 표현하는 제목으로 안성맞춤이라고 느꼈다.

 

이 책은 원래 저자가 한창 여행 중에 써둔 메모와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까, 여행 중에 느끼는 저자의 여러 감정 - 두려움과 욕심, 부끄러움, 나약함 - 들이 아주 솔직하게 담겨져 있는 짧은 글들은 어떤 명언보다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여행을 하면 사소한 것에서도 감탄하게 되고 기쁨을 느끼게 되는 걸까.  여행은 가끔, 아니 자주 안락함과 편안함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을 가져온다.  하지만 여행은 그것을 누릴 때 잠시 느끼는 감정보다 더 얻기 힘든 '사랑과 자유'라는 감정을 선물로 준다.  불편하고 힘들지만, 더 여유로워지고, 더 따뜻해지고, 더 평안해지고, 더 뜨거워지고.  사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느낄 만큼 감성적이고 열린 가슴을 가진,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는 길, 그게 바로 여행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저자는 러브 앤 프리 (LOVE & FREE), 한 권의 책에 오스트레일리아를 시작으로 총 6개국을 여행하면서 써놓은 단상들을 담고 있다.  이 책에는 여행지의 아름다움이나 여행지에서의 일정 등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대신 지금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좀 더 유쾌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삶은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담은 사진과 메모지에 아무렇게나 쓴 것 같은 느낌의 짧은 글은 행동하고 싶게끔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더 사랑하기 위해서,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행동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든다.  기분 좋은 충동, 이 설렘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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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이 이어진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너의 처지를 이해한다, 너의 말을 이해한다 등 '이해'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한다.  내가 그를 이해하고 그가 나를 이해한다면 그보다 가슴 벅찬 일이 어디 있을까.  세상에서 나를 이해해주는 이가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해'라는 단어를 믿지 않는다.  내가 그와 똑같은 상황에 부딪혀 보지 않고서는 그의 고통도 그의 슬픔도,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해'라는 단어보다 '짐작'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새의 선물>에서는 '나는 모든 사람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하는 열두 살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삶과 죽음, 즉 인생에 대해 너무 일찍 깨달아버려 '나는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망설임 없이 말하는 소녀는 이제 열두 살이지만 총명하고 조숙해서 마치 어른과 같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을 모두 초월한 듯 행동하며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은 어린 소녀일 뿐이다.  '이해'라는 단어를 믿지 못하는 나는 어쩌면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 마음을 감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인 <새의 선물>은 우물을 중심으로 살림집 두 채와 가겟집 한 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 진희는 외할머니, 삼촌, 이모와 함께 생활한다.  진희는 자신의 눈에 비친 이웃들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며 그들의 내면까지 꿰뚫어본다.  그들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법한 비밀이 가지고 있는데, 진희는 어른들이 자신을 귀여워하는 이유를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 생각하는 맹랑함을 보인다.  누군가를 골탕 먹이려고 다짐하는 아이다운 발상은 구체적이고 치밀한 계획에서 더 이상 어린 열두 살로만 바라보지 않게 만들며 , 자신의 의도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결과에 내심 통쾌하지만 짐짓 놀라는 척하는 영악함도 보인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와 '죽음이란 육체적인 고통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인 공포 때문에 더욱 두려운 것이다'고 말하는 조숙함도 보인다.  
 

철없는 이모, 남편이 죽은 뒤 외아들만 바라보며 사는 장군이 엄마, 병역기피자이며 바람둥이인 광진테라 아저씨, 신분상승의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 교태를 부리는 미스 리 언니, 여자들 곁눈질하기에 바쁜 최 선생님 등 주위 인물들 사이에서 진희의 시선은 예리하게 움직인다.  그들을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거짓과 위선으로 얼룩진 더러운 삶의 이면을 알게 된다.  열두 살 소녀 옆에 -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 그의 고독과 슬픔을 짐작이라도 하는 이가 곁에 존재하였더라면, 미래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들을, 좋은 것만 보고 행복한 것만 생각할 나이에 깨달아 버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 하나 미워할 수는 없다.  그들 모두 나 자신이며 또한 내 이웃이기에. 

 


진희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을 표현하는 작가의 문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하게 독자의 마음을 두드린다.  때론 웃음 짓게 만들며 때론 안쓰러워 눈길을 돌리게 만들고 때론 놀라서 가슴을 쓰러내리게 만든다.  <새의 선물>의 등장인물들은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인물들이지만 작가의 완벽한 묘사에 힘입어 특별하게 탄생되었다.  작가는 그들을 통해 내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운명이라는 쇠사슬과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조그만 희망을 찾으려 노력하는 삶, 진짜 삶을 표현해 냈다.  진지한 열두 살 소녀와 삶의 애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을 창조해 낸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계속 나의 열두 살 시절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나이가 어리다고 고통을 모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시절의 고통은 성인이 되었을 때 고통의 크기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나리라 생각한다.  나는 열두 살 시절에 무엇으로 고통스러워했을까.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나 다른 상처로 덮여져서 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이어지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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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란 책을 보았을 때 머리 속에 큰 물음표 하나가 그려졌다.  이 책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로 존재하게 될까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순간의 갈등도 없이 이 책을 선택하였고 기대에 부풀어 첫 장을 넘겼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관점의 차이를 보인다.  제각각 살아온 환경이 다르듯이 생각과 느낌의 차이도 발생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의 정도는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책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리 악평이 많은 책이라고 할지라도 나에게는 그들과 달리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 책도 있을 것이며 내게는 생각하기도 싫은 나쁜 책이지만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른 느낌으로 기억하는 책도 있으리라.  처음 

 

총 9편의 단편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있다.  9편 모두 책을 소재로 하여 쓴 글이며 책은 누군가를 위해 존재 이유가 있다는 소주제를 담고 있다.  이 소설은 책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를 기본적인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지만 모두 다른 이미지의 책을 그리고 있다.  헌책방에 팔아버린 후 기억에서 지워진 책을 몇 년 후 네팔에서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다시 만나게 된 사람에게는 책은 인연의 의미를 갖게 되며 태국으로의 여행에서 다른 여행자가 두고 간 책을 읽고 난 후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떠올린 사람에게는 책은 상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남자친구와 헤어질 때 그동안 함께 공유했던 책을 정리하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에게는 책은 추억의 의미를 갖게 되며 사랑을 모르던 이가 우연히 헌책방에서 만난 이와 함께 전설의 고서를 찾으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처음으로 느끼게 된 사람에게는 책은 사랑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처럼 저자는 책이라는 하나의 이미지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시키며 독자에게 책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아가 책을 통해 변하는 삶을 보여준다.   

 

존재의 의미는 태어나면서 부터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 또한 어린 시절에 읽은 어린왕자와 성인이 된 후에 읽은 어린왕자 사이에서 같은 책이지만 전혀 다른 책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듯 상황에 따라, 장소에 따라, 시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나에게 소중하지 않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될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따라 책의 존재 이유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책은 어떤 존재일까.  머리 속에 물음표를 갖고 읽기 시작한 이 책은 내게 끝없는 질문을 쏟아낸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쉽게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책은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인식, 소중하다는 생각, 이것만으로도 존재의 의미는 이미 충족되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어떤 책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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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필름이 남아 있을 때 - <스트로보> 개정판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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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03년 늦가을 즈음인가, 지인에게 초보자가 쉽게 다룰 수 있으면서도 성능 면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카메라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여 디지털 카메라 한 대를 장만하였다.  이유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사진 속에 담기 위해서였다.  디지털 카메라를 손에 쥐게 된 후부터 외할머니의 모습을 찍는 일이 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웃고 찡그리고 하품하는, 순간순간 변하는 모습,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놓칠 새라 디지털 카메라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는 내게 그와 같은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단 1년만 느끼게 해 주시고 떠나셨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한동안 디지털 카메라를 놓고 지냈다.  찍을 대상이 사라졌으니 자연스럽게 찍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 버린 것.  그 후 시간이 흘러 미니홈피에 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잠시 나와 주위 사람들을 찍기도 했었다.  그러나 외할머니의 사진에서 느꼈던 - 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 그러나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너무나도 따뜻했다는 것 - 감정을 다른 사진에서는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인물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대상을 찍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올 초가을에 코스모스와 잠자리를 찍은 사진을 보며 나는 나에게 변화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주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어쩌면 누군가의 사진을 찍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필름이 남아 있을 때>의 주인공 기타카와 고지의 직업은 사진가이다.  이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쉰 살이 된 현재의 기타카와로 부터 시작하여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는 형식으로 마지막에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스물두 살 젊은 청년의 기타카와를 만날 수 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지만 각 장의 시점은 현재이다.  각 장마다 사진을 통해 과거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사실과 감정들을 알아가게 되는 이야기로서 과거는 단지 잊혀진 감정의 찌꺼기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기타카와가 느끼는 사진의 의미는 20대와 30대 그리고 50대 모두 다르게 표현된다.  열정만 앞서서 중요한 것은 빠트린 적도 있었고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보여주는 사진의 의미는 한결같다.  사진은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만 찍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찍는 사람의 의식과 마음가짐까지 드러난다. p209  지금까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판단해 버리는 실수를 한 적은 없는지 그리고 그 판단을 정정할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옹졸함을 보인 적은 없는지 과거를 거슬러 생각해 본다. 
 
이 소설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  더구나 자극적이지도 않다.  그러면 이 책의 매력은 무엇일까.  큰 흔들림 없는 잔잔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진이라는 매개체의 선택도 탁월하다고 보여 진다.  소설 속에서 기타카와가 셔터를 누를 때마다 번쩍하며 밝은 빛을 내는 느낌에 빠지게 만든다.  소설 전체가 한 권의 사진집처럼 느껴진다.    
 
나는 훗날 지금 가지고 있는 디지털 카메라보다 더 좋은 카메라를 소유하게 될 지도 모른다.  요즘 부쩍 카메라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비싸고 성능 좋은 카메라를 갖게 되더라도 지금 사용하고 있는 그것을 대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내게 처음이라는 의미와 함께 더 큰 의미, 지울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카메라로 찍었던 모든 대상과 그의 결과물인 사진 또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내 과거를 말해주고 있으며 또한 현재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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