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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필름이 남아 있을 때 - <스트로보> 개정판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2003년 늦가을 즈음인가, 지인에게 초보자가 쉽게 다룰 수 있으면서도 성능 면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카메라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여 디지털 카메라 한 대를 장만하였다. 이유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사진 속에 담기 위해서였다. 디지털 카메라를 손에 쥐게 된 후부터 외할머니의 모습을 찍는 일이 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웃고 찡그리고 하품하는, 순간순간 변하는 모습,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놓칠 새라 디지털 카메라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는 내게 그와 같은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단 1년만 느끼게 해 주시고 떠나셨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한동안 디지털 카메라를 놓고 지냈다. 찍을 대상이 사라졌으니 자연스럽게 찍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 버린 것. 그 후 시간이 흘러 미니홈피에 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잠시 나와 주위 사람들을 찍기도 했었다. 그러나 외할머니의 사진에서 느꼈던 - 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 그러나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너무나도 따뜻했다는 것 - 감정을 다른 사진에서는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인물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대상을 찍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올 초가을에 코스모스와 잠자리를 찍은 사진을 보며 나는 나에게 변화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주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어쩌면 누군가의 사진을 찍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필름이 남아 있을 때>의 주인공 기타카와 고지의 직업은 사진가이다. 이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쉰 살이 된 현재의 기타카와로 부터 시작하여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는 형식으로 마지막에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스물두 살 젊은 청년의 기타카와를 만날 수 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지만 각 장의 시점은 현재이다. 각 장마다 사진을 통해 과거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사실과 감정들을 알아가게 되는 이야기로서 과거는 단지 잊혀진 감정의 찌꺼기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기타카와가 느끼는 사진의 의미는 20대와 30대 그리고 50대 모두 다르게 표현된다. 열정만 앞서서 중요한 것은 빠트린 적도 있었고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보여주는 사진의 의미는 한결같다. 사진은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만 찍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찍는 사람의 의식과 마음가짐까지 드러난다. p209 지금까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판단해 버리는 실수를 한 적은 없는지 그리고 그 판단을 정정할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옹졸함을 보인 적은 없는지 과거를 거슬러 생각해 본다.
이 소설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 더구나 자극적이지도 않다. 그러면 이 책의 매력은 무엇일까. 큰 흔들림 없는 잔잔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진이라는 매개체의 선택도 탁월하다고 보여 진다. 소설 속에서 기타카와가 셔터를 누를 때마다 번쩍하며 밝은 빛을 내는 느낌에 빠지게 만든다. 소설 전체가 한 권의 사진집처럼 느껴진다.
나는 훗날 지금 가지고 있는 디지털 카메라보다 더 좋은 카메라를 소유하게 될 지도 모른다. 요즘 부쩍 카메라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비싸고 성능 좋은 카메라를 갖게 되더라도 지금 사용하고 있는 그것을 대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내게 처음이라는 의미와 함께 더 큰 의미, 지울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카메라로 찍었던 모든 대상과 그의 결과물인 사진 또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내 과거를 말해주고 있으며 또한 현재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