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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지음, 이희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전쟁은 인간의 삶에 많은 변화를 준다. 긍정적인 면은 단 한 가지도 없고 모두 부정적인 면으로의 변화다. 삶의 현장에서 전쟁의 흔적이 사라졌더라도 그 사건 자체를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된다. 이 소설 《브로덱의 보고서(2010.4.20. 미디어2.0)》는 전쟁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는 한 마을에서 발생한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주인공 브로덱의 말에서 뿐만 아니라 분위기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은 분명한데, 그 사건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어서 보여 달라고 거칠게 책장을 넘겨봤자 아무 소용없다. 진득이 한 줄씩, 한 장씩 읽어나갈 수밖에.
소설은 브로덱의 현재와 과거를 번갈아 보여준다. 늙은 페도린과 아내 에멜리아, 딸 푸셰트와 함께 살아가는 현재와 전쟁 중 수용소에 끌려가서 생활하는 과거를 교차시키며 보여준다. 그리고 브로덱이 수용소에 있었을 때, 전쟁 중 마을에서 발생한 끔찍하고 잔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까지 전쟁이 마을에 안겨 준 잊을 수 없고 치유될 수도 없는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상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사건이라고 변명하는 듯 들린다.
원래 우리 마을 사람들은 천성이 개방적이지 않다. 아마도 분지, 산맥, 숲, 절벽에 둘러싸인 협곡이라는 자연환경과 비, 안개, 서리, 눈보라, 혹서 등이 교차하는 기후가 약간이나마 그런 성격을 해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쟁도 한몫 거들었다. 대문을 닫고 영혼을 걸어 잠그고 자물쇠를 꽁꽁 채워 빛에 노출되지 않도록 숨긴 것이 다 전쟁 때문이다. p189
《브로덱의 보고서》의 등장인물 중에서 마을 사람이 아닌 인물이 딱 한 사람 등장한다. 그의 이름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안더러, 즉 타인이라고 부를 뿐이다. 안더러가 갑작스럽게 마을로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숨죽여 지켜본다. 고립되고 폐쇄적인 마을에 전쟁 중 군인들이 찾아왔을 때를 생각나게 한 것이다. 전쟁의 두려움, 전쟁의 끔찍함이 마을 위로 내려앉았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남자가 몇 해 동안 아무도 찾아온 적 없는 우리 마을에 순식간에, 아무 거리낌 없이, 그보다 더 자연스런 일이 어디 있냐는 듯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약간이나마 두렵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됐겠는가? p122
그런데 안더러가 마을 사람들이 애써 감추고 있던 진실, 모두 지워버렸다고 믿고 있는 진실을 파헤쳐 놓기에 이른다. 그가 대체 무엇이기에 마을을 불안하게 만들고 위험하게 만든단 말인가. 마을 사람들 모두는 한 마음으로 안더러가 사라지길 원한다.
그림은 모두 파괴됐다! (...) 그림이 나름의 방법으로 절대 말하면 안 되는 것을 말하고 덮어 놓은 진실을 폭로했기 때문에, 조각조각 찢기고 흩어지고 재로 변한 것이다. p319
이 소설은 브로덱이 쓴 보고서이다. 브로덱은 마을 사람들의 강요에 의해 그들 행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내용의 보고서를 써야만 했다. 즉, 누군가에게 보여 지는 보고서 말이다. 브로덱은 어쩔 수 없이 진실을 숨긴 보고서를 쓰지만 또 하나의 보고서를 쓴다. 우리가 읽는 이 소설이 또 하나의 보고서, 진실만을 적은 보고서인 것이다.
나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아니라서 전쟁의 잔인함, 끔찍함을 모른다. 전쟁이 인간의 본성마저도 변하게 만들 수 있음을 책이나 영화 등을 통해서 익혔을 뿐이다. 《브로덱의 보고서》는 전쟁이 순박했던 마을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급기야 어떤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더욱 놀랄 일은 자신들의 행동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과거 마을에 들어왔던 타인이 저지른 만행과 똑같은 만행을 현재 마을에 들어온 타인에게 했으면서도 자신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말한다. 나는 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죽음은 말이야, 어느 누구의 희생으로도 보상할 수 없어. 그게 가능하다면 모든 게 너무 간단해지겠지. 그리고 너를 심판할 사람은 제가 아냐. 그렇다고 나도 아니고. 인간은 서로를 심판할 수 없어. 사람은 그런 일을 할 수 없게끔 생겨 먹었어. p255
《브로덱의 보고서》는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작가 필립 클로델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궁금증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책읽기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