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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넓고, 스쿠터는 발악한다
임태훈 지음 / 대원사 / 2008년 11월
평점 :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사람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많고 많은 낭만 중의 하나다. 하지만 이 낭만이 꽤 고난이도인 것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보려면 그만큼의 고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도 안 통하고, 치안도 걱정되고, 돈도 문제고, 잠자리와 음식도 걱정되고...... 여행을 가로막는 장벽은 무수히 많다. 이걸 뛰어 넘을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진짜 여행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세계는 넓고 스쿠터는 발악한다>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절반 이상이 제목 때문이다. 스쿠터가 그냥 달리는 것도 아니고 '발악'한단다. 웃으면서 책을 펼치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한국까지 2만 여 Km를 스쿠터로 달려온다는 발상을 한 스물 세 살 청년이 주인공이다. 자동차고 아니고 바이크도 아니고, 스쿠터란다. 계획만 봐도 이 사람 제정신인가 싶을 정도로 걱정이 앞서는 여행 계획이다. 달린다, 무조건 달린다-는 것은 사실 현대에서 통하는 '여행'이라고 부르기엔 뭣하다. 실크로드를 건너 장사를 하던 대상들이 존재하던 시대, 그 시대에 말하던 '여행'에 가깝다. 청년은 짐(자기 몸뚱이)을 목적지(한국)로 보내기 위해서 낙타 대신 스쿠터를 타고 국경과 국경을 넘어 달려간다. 쭉- 달려간다. 주변 풍경을 보기는 하지만,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해 길을 틀고 그 풍경이나 그 사람들을 깊이 관찰할 시간은 없다. 음식도 변변찮다. 굶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은 식사가 이어진다. 잠자리도 마찬가지고.
보통 여행서적을 보면 "이쁘겠다~" 혹은 "멋지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쁘고 멋지고 그럴 듯한 얘기가 많이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헉, 이 사람 괜찮은 거야?" "어떡해? 과연 집까지 올 수 있을까?" 하는 말이 튀어나온다. 전자가 로맨스라면 후자는 스릴러다.
"왜 저런 고생을 하지?"
청년의 여행은 못내 이상해보였다. 옛날에야 이동수단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랬다고 치지만, 지금은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에, 바다도 단숨에 건너는 비행기에, 여러 가지 교통수단이 참 많고도 많다. 하지만 청년은 굳이 스쿠터라는 열악한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시내 한 바퀴 도는 것도 아니고 2만 여 Km를 달려가는 것이다.
청년이 달려가는 길은 우리가 익히 들었던 영국, 독일을 너머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동유럽국가들 그리고 위험하다는 생각만 막연히 가지고 있는 중동 쪽을 넘어 중국을 향한다. 서류가 미흡해서 곤란해지기도 하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기뻐하기도 하고, 청년의 여행은 '그 땅'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잘 알지 못하는 곳까지 구석구석 여행하고 돌아온 청년에게서 색다른 여행기를 자세히 전수받고 싶은 사람들은, 무척 찜찜한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청년은 최대한 빠른 루트로 달리고 또 달렸을 뿐이니 각 나라에 대한 정보는 무척이나 짤막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럴 듯한 관광지 따위는 없다. 풍경도, 멋있다고 소문난 풍경을 찾아 간 게 아니라, 길 옆에 늘어서 있는 풍경을 그저 봤을 뿐이다. 나는 이런 여행수기가 처음이라서 참 인상깊었다. 보고 즐기고 느끼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목적지로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 목표인 여행이라니.
청년은 무사히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책을 냈겠지만;;) 그런데 그의 도전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중국에서 만난 여러가지 문제로 그는 결국 비행기를 타야 했던 것이다. 스쿠터를 중국에 남겨두고.
사진이 책의 절반 이상이고 글은 수첩에 적은 메모마냥 짤막짤막하다.
그래서 책장이 훌렁훌렁 넘어갈 것 같은데, 그게 또 의외로 그렇지 않다. 가만히 사진을 바라보고 있게 되는 것이다. 풍경이 아니라 그의 모습과 그가 만난 사람들을 주로 찍은 그 사진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막연하게 귓가를 울리는 "세계는 하나"라는 구호가 문득 선명하게 다가온다. 여행자에게 대가없는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되는(!) 의사소통, 부딪히면 대부분 열리는 문들.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여행을 하는 것도, 이런 여행이 무사히 끝난 것도, 이런 여행을 하는 청년을 도와주고 지켜본 사람들도.
2008. 1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