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 릴라 - Lila, Lil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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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고편을 봤을 때부터 마음에 담아두었던 영화. 10월 2일인가가 개봉이었지, 하고 표시해두었는데 그 전에 시사회에 당첨되어 보러 갔다. 독일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줄거리 : 

  다비드는 일하는 가게의 단골손님인 마리를 좋아한다. 그러나 마리의 관심은 온통 문학에 쏠려있다. 다비드는 마리와 친해지고 싶어서 얼마 전 구입한 협탁 서랍 안에 있던 원고를 타이핑해서 자신의 소설이라 속이고 마리에게 읽힌다. 그걸 계기로 둘은 사귀게 된다. 그걸로 끝난 줄 알았지만 마리는 그 원고를 몰래 출판사에 보내고, 결국 출판까지 하게 된다. 다비드의 책은 유래없는 히트를 쳐 다비드는 단숨에 인기작가가 된다. 그러나 다비드 앞에 소설의 진짜 작가라며 재키가 나타나고, 재키는 다비드의 매니저를 자청하며 사고를 치고다닌다. 그로 인해 다비드와 마리 사이는 점점 멀어지는데.......   

   다비드의 고민은 이거다. "사람들은 나를 왜 좋아할까?" 마리의 사랑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다비드는 사람들의 호감에도 의구심을 가진다. 왜냐면 사람들이 열광하도록 만든 소설 <릴라, 릴라>는 사실 다비드의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비드는 꽤 잘 해낸다. 낭독은 엉망이고 인터뷰도 엉망이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그의 세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재키가 나타나자, 순식간에 그 세계는 시한폭탄이 된다. 다비드는 마리가 떠날까 전전긍긍한다. 

  마리는 마리대로 고민이 많다. 마리는 다비드의 소설을 사랑하고, 그래서 다비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이름은 '마리'가 아닌 '다비드의 애인'이 되어간다. 그리고 다비드는 점점 거짓말을 한다(둘의 시작이 다비드의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아이러니다). 다비드의 다음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게 자신이 가장 마지막이라는 걸 안 마리는 둘의 관계에 의구심을 가지고 힘들어한다.

  여기서 가장 즐거워보이는 것은 재키이다. 그는 소설의 작가라고 하면서도 소설의 권리는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비드보다 더 적극적으로 다비드를 홍보하고 나선다. 상당한 민폐 캐릭터인데도 아주 밉지는 않고, 심지어 가끔 귀여워보이기까지 한다는 게 놀랍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 삼각관계가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영화가 진행되면 될 수록 조마조마했다. 대체 이 거대한 거짓말이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가? 내 감상을 말하자면, 영화의 마무리는 상당히 잘 된 것 같다. 남의 소설을 가지고 작가 노릇을 할 때는 어색하기만 했던 다비드도, 자신의 소설을 가지고는 유머러스하게, 꽤 잘 해낸다. 마리가 돌아오는 부분은 중간에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다비드가 쓴 이야기가 마리가 의구심을 가졌던 부분을 해결해 주었다고 생각한(하기로 했)다.

  예고편을 보고서 <릴라, 릴라>에게 가진 느낌은 가벼운 로맨틱 코메디에 가까웠다. 아마 할리우드라면 이 이야기를 다양하고 우스운 에피소드와 발랄한 음악과 엮어 가볍게 조리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릴라, 릴라>는 로맨틱 코메디이지만 상당히 무겁다. 음악도 꽤 묵직하고 우아해서 마치 클래식이나 재즈를 듣는 듯 하다. 존재감이 확고한 음악이 장면과 어우러져서, 꽤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이 영화가 꽤 묵직한 이유는,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왜 나를 좋아할까?"하는 의문은 살면서 한 번쯤 가져봤음직하다. 영화 내내 다비드는 그런 의문과 당혹에 휩싸여 있다. 그는 거짓말을 잘 하는 성격이 아니고, 자신의 것이 아닌 성공을 소화하기 버거워한다. 차라리 소설이 실패했다면 그는 아주 가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고민을 심각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의 중심에 있는 것은 다비드와 마리의 사랑이나 다비드의 성공이 아니라, 다비드의 의구심이라고 생각한다. "왜 나를 좋아할까?" 다비드가 마리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때때로 진실을 말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은, 가짜가 아닌 진짜 자신을 마리가 봐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다비드가 읽어준 '다비드의 소설'의 구절이 더 가슴에 와 닿았던 것 같다.

  이렇게 쓰니 <릴라, 릴라>가 굉장히 심각해서 내내 미간을 찌푸리고 보게 되는 영화 같은데, 사실 이 영화는 로맨틱 코메디가 맞다. 다비드가 마리를 사랑하며 시작되고, 마리가 진짜 다비드를 받아들이면서 끝난다. 그리고 코메디도 맞다. 다비드가 처한 상황은 가끔 웃음을 터트리게 만든다. 단지 보통의 코메디처럼 빵 터지는 게 아니라 킥킥에 가까운 웃음이 터져서 그렇지.

  영화를 보며 나라색이라는 것이 진짜 있구나 싶었다. 이 이야기가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졌다면 줄거리는 같아도 느낌은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책을 읽을 자유>에서 소개한 책 [번역 이론]에서 각 나라별 문체의 속도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독일인들은 장중하고, 엄숙하고 둔중한 모든 것, 느리고 지루한 온갖 종류의 문체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발달시켰지만, 부포나 사티로스는 그들의 감각에 잘 맞지 않고 낯설다는 것이다. 즉 익살스러우며 해학적인 세계는 그들에게 이질적이며, 따라서 독일어로는 아리스토파네스나 페트로니우스를 번역하기가 힘들다는 게 니체의 주장이다.(책을 읽을 자유, 158p에서 인용)" 

  두 시간 동안 매우 즐거웠다. 배우들도 귀염성 있는 얼굴이고(특히 재키 아저씨), 이야기가 천천히 진행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소설이 원작이라고 하는데, 소설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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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트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비스트>를 읽기 전, 이 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는 복수극이었다. 사랑하는 딸을 연쇄강간살인범에게 잃은 아버지가 연쇄강간살인범을 살해하는, 그런 복수극. 몇 년 전에 개봉한 영화 <테이큰>의 이미지가 조금 개입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프레데리크의 행동은 단순히 마리를 죽인 놈에 대한 개인적 복수가 아닌, 사회 구성원이 사회를 위해 행한 '위험요소 제거 작업'에 가까웠다.

  책을 다 읽은 지금, 뭐라고 이 책을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신문기자와 전직 범죄자라는 조합은 굉장히 실감나는, 바로 옆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그래서 마치 현실처럼 무엇이 옳고 어떻게 행동해야 했는지 판단하기 까다로운, 그런 괴물같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래서인지 읽으면서 계속 가슴이 먹먹했다.

   <비스트>가 괴물같은 이유는 어떤 생각 하나를 쉽게 편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을 보고도, 단순하게 '성범죄자는 모두 죽여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래도 모든 생명은 소중해. 사람 몇을 죽인 범죄자라고 해도.'라고 초지일관 말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사항은 명확하다. 룬드는 개자식이다. 짐승이고, 짐승은 바뀌지 않는다. 그는 아주 위험하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사회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개인적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한 부분. 극중에 등장하는 유능한 변호사는 프레데리크의 정당방위와 무죄방면를 주장하기 전에 룬드와 같은 급으로 논 아동성폭행범의 형량을 고작 1~2년으로 줄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식으로 모순된, 아이러니한, 그런 상황과 인물이 끝없이 이어진다.

  <비스트>는 '프레데리크가 룬드를 살해'하는 부분보다 그 일의 앞과 그 일의 뒤를 더욱 치밀하게 보여준다. 연쇄강간살인범을 피해자 아버지가 살해했다는 사건이 한 가지 사건으로 단순히 끝나지 않고 수없이 많은 여파를 사회에 미치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인다. 그 여파의 어디에나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할지 판단하는 일은 아주 까다롭다. <비스트>가 보여주려는 건 어떤 개인이나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전체 사회인 듯 하다. 그리고 이제 범죄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는 듯 하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묵직한 내용을 가진 소설이었다. 그런데도 읽기가 버겁지 않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손을 떼지 못하고 보게 된다. 한 번 잡고 끝까지 읽어버렸다. 비스트에서 이어지는 시리즈가 몇 권 더 있다고 하는데, 얼른 한국어로 번역되어 들어왔으면 좋겠다.

 

  덧붙임.

  역자의 말을 읽고 기분이 상했다. 편집자와의 상의 끝에 반복되는 잔인한 묘사와 강한 욕설을 잘라냈다고 한다. 어쩐지, 이상하게 묘사가 있을 것 같은 부분에 묘사가 없더라. 그런 부분을 삭제했기에 불편한 기분은 확실히 덜했겠지만(하기야 그런 묘사를 읽지 않아도 충분히 상황은 '엿같아'보인다), 작가가 의도한 게 바로 그 불편한 기분은 아니었을까. 

 

2011.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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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병기 활 - War of the Arrow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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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것은 8월.

  영화를 봐야겠다 생각을 하고 찾아봤는데 별로 확 끌리는 영화가 없어서 고민하다가, 당시 막 개봉한 <최종병기 활>을 보기로 했다. 여동생을 구하러 만주까지 간 오빠의 활 액션이라는데, 활이라는 것은 본디 원거리 무기니까 어떻게 액션이 성립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총은 원거리 무기인데도 액션에 어울리는데 활은 액션이 어색한 이유는 뭘까? 단거리에서는 무력해져서 그런가? 생각해보면 옛날에 봤던 영화 <로빈 후드>도 활보다는 검을 더 많이 쓰는 로빈 후드였다).

  뚜껑을 열어본 <최종병기 활>은 구출극이라기보다는 탈출극에 가깝다. 구출하는 장면이 상당히 앞에 위치한다. 여동생의 캐릭터가 아쉬웠지만(좋게 말해도 민폐다...), 굉장히 흥미진진한 영화였다. 여동생을 구하러 사지에 들어가는 오빠, 라고 하면 굉장히 애절한 느낌이 들지만, <최종병기 활>은 그런 면에서 담백하다. "구해야 하기 때문에 구한다."라는 느낌이다(설명하기 미묘한데 나는 오빠고 걔는 내 동생이니 구해야 해, 라는 느낌. 둘 사이의 우애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그 관계라 구해야만 하는 책임감?). 따라서 감정선보다는 행동에 더 시선이 쏠리고, 등장인물이 취하는 행동은 줄곧 시선을 붙잡아 흥미진진해하며 결말까지 지켜보도록 만드는 데 충분하다.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즐겁지는 않았다. 추적씬 내내 <아포칼립토>가 떠올라서 찜찜했기 때문이다. <아포칼립토>를 단 한 번, 대충 본 나도 기억이 새록새록 날 정도로 비슷한 구도와 흐름이 많다(굳이 어디가 그런지 따지자면 추적씬 전체가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 좋은 평점을 줄 수가 없다. 영화는 영화를 볼 때의 기분 뿐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온 뒤의 기분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1.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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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퍼씨네 펭귄들 - Mr. Popper's Penguin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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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펭귄 귀엽다! 

  <파퍼씨네 펭귄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최종병기 활>을 보고 나오다가 포스터를 보고 나서였다. 보기만 해도 유쾌하고 귀여운 펭귄들 때문에 관심을 가졌는데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되었다. 펭귄이 나오면 아무래도 좋아, 하고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더 즐거운 영화였다. 

  펭귄 여섯 마리의 귀여움은 말할 것도 없고, 여배우들의 미모도 돋보여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짐 캐리의 연기야 말할 것도 없고. 코미디고 가족영화다 보니 어딘지 익숙한 흐름을 따라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유쾌하고 잔잔하면서 억지감동이라는 느낌은 없어서(남극 부분의 배경이 좀 어설프긴 했는데) 좋았다. 모두모두 해피엔딩. 요즘은 이런 게 좋다.

  CG인줄 알았던 펭귄들이 실제 펭귄이었다는데 깜짝 놀랐다. 펭귄들은 안전한 환경에서 촬영에 임했지만 짐 캐리는 그다지 안전한 환경에서 촬영하진 못한 듯 하다. 수도 없이 깨물렸다니. '뭐 물 만 하니까 물었겠죠'라는 마지막 자막을 보고 극장을 나다가 웃음이 빵 터졌다.

  영화의 배경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끼어있는, 말하자면 겨울이다. 그런데 왜 지금 개봉될까, 하고 생각했더니 추석이 있었다. 추석에 온 가족이 보기에도 좋고 동물을 좋아하는 연인이 보기에도 좋고 즐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보고 싶을 때도 좋은 영화다. 다시 말하지만, 펭귄이 정말 귀엽다.

 

  덧붙임. 

  내가 보기에 제일 불쌍한 것은 전처의 남자친구. 가나에는 잘 도착했을까. 

 

2011.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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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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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내가 이 시리즈를 전혀 읽지도 보지도 않았다는 데 다소 원인이 있다), "그 영화 정말 괜찮다더라"는 소리를 전해들었다. 한 달 쯤 전에 들은 이야기라서 이미 내렸을까봐 걱정했는데, 과연 좋은 평 때문인지 아직 상영하고 있었다. 과연 명절이라서 신신신나나나나하고 몰려온 가족 관객이 많았다. 어린 아이들도 많고 해서 좀 걱정했는데, 다들 매너가 아주 좋았다. 그런데 그 매너가 이해가 될 정도로 또 좋은 평이 이해될 정도로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이 재미있었다.

  시작은 유인원들을 사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잡혀온 침팬지는 치매를 치료하기 위한 약 A-112를 주입받고 부작용으로 눈동자 색이 변하고, '반짝이는 눈'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A-112를 만든 과학자 윌이 A-112의 임상실험을 시작하기 위해 브리핑하던 때 '반짝이는 눈'은 탈출 시도를 하며 난동을 피우고, A-112는 사장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을 비롯해 A-112의 실험에 동원된 유인원들은 모두 안락사당한다. 그러나 윌은 '반짝이는 눈'의 아기를 발견하고 집에 데려와 키우게 되고, 시저라는 이름을 받은 이 유인원은 놀라울 정도로 높은 지능을 보인다. 그리고 8년 후, 시저는 유인원보호소에 보내지고 자신이 인간과 다름을 깨닫는데....... 

  이야기는 단순하다. '영리한 유인원들이 나타나고 인류는 멸망의 기로에 선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혹성탈출>의 프리퀄이기 때문에 어떻게 진행될지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시리즈를 보지 않은 나 조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은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내 감상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유인원의 시작도 윌, 인류의 끝도 윌에게서'라고나 할까. 둘이 같은 흐름이 아니라는 것이 놀랍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아무리 지능을 가진 유인원들이 있어도 인류에 비해 턱도 없이 적은 수인데 무기로 무장한 엄청난 수의 인간을 어떻게 지배할 수 있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는데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 완벽하게 해소되었다.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암시를 한다는 점이 더욱 좋았다.

  그와 동시에, 이 영화는 인간의 오만에 대해서 지적한다. 윌의 여자친구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 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어떤 자연?" 윌의 여자친구가 말하는 자연은 철창 우리에 유인원을 가둬놓고 시시때때로 제약회사의 실험동물로 끌려가는 자연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관리하는 자연'인 것이다. 그리고 시저를 보면서 인간이란 자신을 뛰어넘는 지적 생명체를 인정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시저는 뭐냐"는 시저의 질문이 떠오른다. 

  영화는 탄탄하다. 앞에 자연스레 스쳐지나간 장면이 뒤의 기반이 된다. 시저가 윌의 집에 처음 왔을 때, 윌의 아버지가 '줄리어스 시저'의 한 대목을 읊었다. 그의 발 앞에 무릎꿇고... 하는 부분이었을 거다. 그 대목이 영화 마지막에 그대로 재현된다. 

  그래서일까. 아주 극적인 사건이 있다기보다는, 천천히 잠식당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다음에 올 어떤 것'을 기대하게 만들고, 그래서 '거대한 프롤로그'라는 생각이 든다. 그 때문인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혹성탈출> 시리즈를 전편 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원작인 소설 <혹성탈출>도. 

 

2011.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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