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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평점 :
최근 "피로사회"라는 책을 내었던 철학자 한병철의 저서이다. 이것 역시 독일어로 저술된 것을 다른 분이 번역하였다. "시간의 향기"는 "피로사회" 보다 먼저 출간되었던 책이다. 12개의 작은 논문들의 모음으로 구성된 책 같아 보였다. 길이는 짧으나 내용은 만만치 않다.
'시간의 향기'라는 은유를 통해서 저자는 현대 사회의 가속화의 원인이 무엇이며, 이의 해결책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간단하게는 가속화의 원인이 향기를 잃은 시간에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색적 삶과 머무름의 기술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간단해 보이는 이 명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실존주의적 역사 개념에서 대안을 찾는다. 이제 역사적 장력은 자기의 강조에서 나온다." (p107)
"자기의 실존적 동원을 통해 시간에 대한 잃어버린 주권을 다시 확립하기 위한 시도이다." (p108)
하이데거의 연구 초기의 전략으로서 '자기'를 강조하고 있다. 시간의 중력으로서 자기 자신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는 현대인이 가장 쉽게 택하는 전략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답안은 아니다.
이제 책의 주제인 하이데거의 후기 전략에 대해 알아보자.
"하이데거의 후기 저작에서는 역사적 시간 모델에서 벗어나 반복의 이미지들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p108)
"하이데거는 거듭 왕복의 이미지로 회귀한다." (p109)
"이러한 반복을 통해 들길은 반복과 수확의 이미지가 된다. ..... 들길은 영원한 반복이 일어나는 고요한 장소이다." (p110)
현대철학이 찾아가는 다음 전략의 전형이다. 순환적 세계관을 통해 안정을 찾고자 한다. 윤회론이 일어나는 공간에 다름 없다.
<떡갈나무의 냄새>
앞에서 본 사고흐름은 이 장에서도 반복된다. 하이데거는 일반적 철학흐름을 따라가는데 초기에는 실존으로의 자기를 찾아 시간에 대한 주권을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뻔한 결론, 즉 절재적 절망에 빠질 뿐이다.
하이데거는 후반기에 이를 극복하고자 '받침대'를 새로 고안해 내어야 했다고 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의미'는 목적론적이지도 절망적이지도 않다. ..... 여기에는 방향이 없다. ..... 그것은 말하자면 원을 그리면서 존재 속으로 깊이 침잠해가는 의미이다." (p124)
앞 장에서 본 바와 같이 순환적 세계관으로 들어간다.
이는 인간이 결국에 찾아가는 공허한 순환적 세계인 것이다.
또한 "'들길이 건네는 위로와 격려의 말'이 신의 언어로서 들리게 될(p125)"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위안을 찾는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하이데거의 후반기 사고를 기반으로 사색적 삶이 있어야 깊은 권태의 저주를 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책의 각 장은 하나의 논문 같은데, 마지막 '사색적 삶'은 가장 길다. 4개의 소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저자는 사색적 삶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다. 마지막 단락에서 "노동의 민주화에 이어 한가로움의 민주화가 도래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의 민주화가 만인의 노예화로 전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저자가 말하는 사색적 삶이란 무엇일까.
"오직 사색적 삶을 되살릴 수 있는 것만이 인간을 노동의 강제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노동하는 동물은 또한 이성적 동물과도 근친관계이다. 이성의 활동 그 자체는 일종의 노동이기 때문이다." (p176)
즉, 노동과 사색을 분리하고 있으며, 노동인 이성과 다른 차원의 사색이 인간 해방에 필수라고 말한다.
"인간이 그래도 동물 이상의 존재인 것은 바로 사색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색하는 능력을 통해서 인간은 지속적인 것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p176)
동물과 그 반대에 위치하는 지속적인 것. 이 두가지 상징은 마치 '이성 혹은 노동'과 그 반대에 위치하는 사색과 대비된다. 인간의 절망을 그는 사색이라는 방법으로 헤쳐나가려 한다.
저자가 말하려는 요점은 사색의 신비적 차원이다.
"사색이란 신의 애정어린 관심 속에 머무름으로서, ..... 오히려 신비로운 합일 속으로 분리선과 울타리가 완전히 해체된다." (p177)
신비주의가 그의 최종적 방법론인 것이다. 이의 구체적 수단으로 사색을 사용함으로 머무름의 기술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책 뒷면의 서평들이 말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속화의 시대에서 멈춘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사색이란 '들길이 건네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신의 언어로 삼아 신비로운 합일 속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색적 머무름이 그가 속한 순환적 세계에서, 시간을 늘리고 존재를 넓히는 것이 될지 아니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게 될지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