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면 다를수록 - 최재천 생태 에세이
최재천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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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사족이지만 이 책은 개인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종이책만을 고집하던 내가 최초로 완독한 e북이기 때문이다.

액정화면으로 보는 책은 아무래도 집중이 잘되지 않아 기피했었는데 더 이상 시대의 변화에 저항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여 쉽고 재밌어 보이는 책으로 도전해 보았다.

(e북 자체에 페이지 정보가 뜨지 않아 발췌문에 페이지 표시를 하지 못했음을 밝힌다.)

​

최재천 교수는 최근에 유튜브 활동도 활발히 해서 책보다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말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쓰기는 어려운 일인데 최재천 교수는 둘 다 뛰어나다는 평이 많아 쉽게 읽을 수 있는 그의 에세이 책을 하나 선택했다.

​

에세이집이라 짧은 글이 여러 편 실려 있고, 다루는 주제도 여러 가지다.

생물학자로서 살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다양한 생물 설명과 함께 표현한 책이라 보면 되겠다.

한 유튜브 강의에서 저자가 누군가 자신의 문장을 허락 없이 수정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문장에 자부심이 있어 보였는데, 이 에세이집 역시 인상적인 문장들이 많았다.

읽으면서 기억에 남았던 문장들을 소개하고 내 소감을 간단히 곁들이고자 한다.

​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

그걸 모르고 우리는 농사를 짓는답시고 한곳에 한 종류의 농작물만 기른다.

해충들에겐 더할 수 없이 신나는 일이다.

구제역이나 광우병이 일단 발발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까닭도

우리가 가축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 놓고 기르기 때문이다. - 중략 -

정말 심각한 문제는 바로 유전적 다양성의 고갈이다. - 중략 -

앞으로 이런 전염성 질병이 몰고 올 재앙은 점점 더 빈번해지고

그 규모도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책의 제목이 '다르면 다를수록'인 이유가 담긴 구절이다.

이 책이 2017년에 나왔으니 작가가 코로나19를 예상했을 리도 없었을 텐데 자연은 마치 우리에게 보란 듯이 전염성 질병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었다.

자연은 늘 다양하려고 애쓰는데 인간은 다 똑같은 모습으로 바꾸려 노력한다.

유전자를 개량할 수 있는 기술이 인간에게까지 적용될 수 있는 시점이 다가오는데 저자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유전적인 다양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신의 고유한 유전자를 남들이 다 좋다는 유전자로 바꾸기 시작하면 우리 스스로를 가축이나 농작물처럼 만드는 셈이다.

모두가 똑같은 가방을 메야 하고, 모두가 똑같은 구두를 신어야 하고,

모두가 똑같은 춤을 춰야 하는 우리나라는 특별히 큰 재앙을 맞이할 것 같아 걱정이다.

복제 인간 몇 명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

유전자 종교'를 신봉하는 인간 교인들이 스스로 자연 앞에 무릎을 꿇을 일이 더 무섭다.

​

또한 진화생물학자로서 그가 사회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도 엿볼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많은 원인이 유전자의 대물림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 또한 생물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동물을 관찰하며 그가 얻은 통찰은 인간사회에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하다.

진화생물학자인 나는 늘 삶과 죽음을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생물이 탄생하는 것도 결국은 유전자가 더 많은 유전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기계를 제작하는 과정이고, 우리가 그토록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는 죽음도

유전자가 더 이상 기계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폐기 처분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N포세대가 등장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는데 아래와 같은 구절을 보면 사실상 우리 사회는 죽은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싶다.

진화학적으로 보면 자기 번식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은 없다.

생물이 무생물과 다른 근본적인 차이점이 자기 증식일진대,

자기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지 못한다는 것은 진화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실상 죽음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저자는 사회학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래와 같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펼쳐낸다.

죽은 사회를 생기 넘치는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더불어 사는 삶이 중요하다고, 우리보다 훨씬 더 열등하다고 믿는 생물들조차도 더불어 살 줄 안다고 말이다.

생태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네 관계들 중 경쟁과 포식 그리고 기생이 가장 흔하며 '성공적인' 관계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난 수십여 년간의 연구로 이들 못지않게 수많은 생물들이 공생의 지혜를 터득하여 성공을 거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악의에 의한 관계는 자연계의 그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했다. 인간 사회를 제외하고.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동물 사회가 우리가 생각하듯 매 순간 약육강식의 법칙으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그들보다 훨씬 더 고등한 존재라 주장하는 우리는 더욱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

지금까지 예로 든 것처럼 딱딱한 주제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아래처럼 재미난 글도 많아 읽는 재미가 충분한 편이다.

우리 인간이 언제부터 사랑의 증표로 꽃을 주고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주 가끔 아내의 가슴에 꽃다발을 안겨 줄 때 사실 머릿속으로는 꽃의 생물학적 의미를 떠올린다. 화려한 성기를 선물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

워낙 다루는 주제가 광범위해 모두 소개하긴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그의 태도가 잘 보이는 글들이었다.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이 어디서 나오는지도 이 책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의 전문 지식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꼰대스럽지 않게 자신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고심해서 쓴 흔적이 책 구석구석에서 충분히 느껴졌다.

​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속담이 있지만 자연 보존에는 전혀 약이 되지 않는 속담이다.

자연은 알아야 보존할 수 있디.

대학에서 근무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학자들이 이렇게 일반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전문 지식을 알릴 수 있는 시도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자연과학처럼 일반 대중들이 느끼기에 거리감이 좀 있는 학문에 투신하고 있다면 더욱 일반적인 교양서 수준의 저작물을 많이 써주었으면 좋겠다.

독자들도 그런 책들을 많이 읽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누구에게라도 선뜻 추천해 줄 만한 책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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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인형 살인사건 ㅣ 봉제인형 살인사건
다니엘 콜 지음, 유혜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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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른 은퇴를 하신 뒤 소설을 읽는 취미를 가지셔서 과거의 나라면 거들떠도 안 봤을 소설들을 요즘 자주 읽고 있다.

추리나 미스터리 소설들은 볼 땐 재미있는데 보고 나면 이런 걸 봐서 뭐하나 싶어서 잘 보지 않던 장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쓰여진 소설들은 한번 책장을 넘기면 끝까지 읽게 되는 매력이 있는건 분명한 것 같다.

이 책 역시 그런 강점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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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봤을 땐 뭔 봉제인형으로 사람을 죽이나 했었는데 알고 보니 사람 여섯 명을 죽인 후 시체의 일부를 모아 봉제인형처럼 기워놓은 시체가 발견된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범인은 담대하게도 사건을 뒤쫓을 형사를 지목하고 언론에 다음 살해 타켓들을 공개한다.

당연히 경찰은 타켓들을 보호하려 혈안이지만 영리한 범인은 경찰의 보호하에서도 예고된 사람들을 하나 둘 살해하기 시작한다.

​

시작 자체도 매우 엽기적인 시체에서 시작하는데, 이후에 이어지는 범행들도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범인이 단순히 물리적인 힘만 강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이나 심리적 전술에도 능해 경찰이 번번이 당하게 되면서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높아진다.

결말 즈음에는 나름의 반전도 있어서 읽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던 작품이다.

​

400페이지 정도의 평균적인 분량이지만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를 보듯 사건의 전개가 매우 빠르다.

피해자가 많은 만큼 새로운 살인 사건 혹은 사건의 전말들이 하나씩 하나씩 빠르게 제시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범으로 가는 길은 극 후반부까지 비밀스러움을 잘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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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웠던 점이라면 결말이 약간 찜찜하다는 것이었는데 검색을 좀 해보니 이유가 있었다.

진범이 밝혀지지 않거나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것은 아닌데 뭔가 뒷이야기가 더 있을 것만 같은 엔딩이라 의아했는데 이후에 같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이 세 권이나 더 발간된 시리즈 작품이라 한다.

후속작들은 꼭두각시 살인사건, 조각상 살인사건, 엔드게임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다.(살인사건 유니버스)

아예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작품들도 모두 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

등장하는 경찰들의 캐릭터도 영상화하기 딱 좋을 정도로 캐릭터들이 분명하다.

발암 캐릭도 있고 조력자도 있고 뒤를 캐는 자도 있고 통수치는 자도 있어서 미드를 자주 보는 사람이라면 꼭 있어야 할 역할은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역시나 이런 작품은 영상화가 빠른지, 검색하다 알게 된 사실인데 이미 미드로 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쿠팡 플레이를 통해 볼 수 있단다.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기 전에 미드를 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것 같다.

"하지만 그동안 '착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끔찍한 짓을 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봤어.

바람피우는 아내를 목 졸라 죽인 남편, 학대하는 배우자에게서 여동생을 보호하려는 오빠.

결국은 깨닫게 되지..."

"뭘요?"

"'착한' 사람은 없다는 것, 아직 지나치게 몰아붙여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야."

(pg 332)

전반적으로 재미는 충분히 보장되는 작품이므로 추리나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후회하지 않을 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면 스포를 당할 경우 재미가 상당히 반감될 수 있으니 스토리에 대한 검색은 최대한 자제하라는 조언을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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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유리 - 그래픽노블로 만나는 AI와 미래 ㅣ 탐 그래픽노블 3
피브르티그르.아르놀드 제피르 지음, 엘로이즈 소슈아 그림, 김희진 옮김, 이정원 감수 / 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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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야흐로 인공지능의 시대가 오고 있다.

관련 기술이 갈수록 더 발전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알파고의 등장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도 상당히 높아졌다.

나 역시도 관심이 가는 분야인데 인공지능을 주제로 한 그래픽 노블이 발간되어 기쁜 마음으로 읽어보았다.

​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야 보편적인 것이라지만,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미국의 한 미술 대회에서 AI가 그린 그림을 출품한 작가가 수상을 한 것에 대한 논란이 있었기에 본 작품에 더욱 관심이 갔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역시 '음악을 만들 줄 아는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

'유리'가 바로 그 인공지능의 이름이다.

작품 속 소개로는 AI가 스스로 선택한 많은 단어 중 사람 이름과 가장 유사해 보이는 것을 골랐다고 한다.

책 소개에 나오듯이 한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해 랩 음악을 들려준 것을 계기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당연히 위의 미술 대회에서처럼 AI가 만든 음악이 음악으로서의 가치가 있느냐는 논쟁이 따라붙는다.

처음에는 아래와 같은 의견이 설득력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pg 13)

하지만 위의 미술대회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 대부분은(더 솔직하게는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조차도) AI의 작품과 사람의 작품을 더 이상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 작품 속 유리를 만난 심사위원들도 음악만 들을 때는 유리를 통과시켰다.

이때 과연 AI의 작품을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을지, 또 그 작품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귀속되는지가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AI 역시 인간이 활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 논리를 위의 논쟁에 그대로 적용해 보면, 사람이 AI를 시켜 그린 그림은 포토샵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려낸 그림과 논리적으로 동일하다.

그렇게 본다면 현재 포토샵 결과물의 저작권이 해당 작가에 귀속되지 어도비에 귀속되지는 않듯이, AI가 그린 작품 역시 해당 AI에게 지시를 내린 사람에게 귀속될 것이고 AI의 개발자는 해당 AI의 사용료 정도만 청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용자와 개발자가 같은 인물이라면 논란이 안되겠지만 대체로는 그 둘이 다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작품이 온전히 작가의 역량으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의견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

AI가 다른 도구와 다른 점은 스스로 계속 진화하는데 그 진화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이다.

처음의 유리는 누가 봐도 이상한 대답을 하는 불완전한 AI였지만, SNS를 통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답변을 하도록 했더니 점점 더 진짜 사람 같은 대답들을 하기 시작한다.

답변이 어찌나 뛰어난지 심지어는 자식을 잃은 부모가 아이의 생전 SNS 기록을 모두 넘겨줄테니 자식처럼 SNS에 글을 써 줄 AI를 만들어줄 수 있는지 의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

여기에서 AI를 둘러싼 또 다른 논쟁거리가 등장한다.

AI가 인격을 구성하는 어느 부분을 대체해도 괜찮은지에 대한 논란이다.

저자는 아래와 같이 윤리적으로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작품 속 인물은 픽션이므로 저자 본인은 물론 아니겠지만, 저자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pg 126)

작품 속 인물은 위와 같이 단호한 입장을 취했지만 내 생각에는 이런 분야로도 언젠가는 활용되지 않을까 싶다.

AI가 인격의 일부분을 대체하는 느낌이라 윤리적으로 옳지 않아 보일 수도 있겠으나, 달리 보면 그것이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으로도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예컨데 죽은 가족에게 차마 전하지 못한 말이 있는데 마치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했을 법한 대답을 들려주는 AI라면 사용자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을까.

​

물론 그 선을 유지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긴 할 것이다.

이 책에서도 반쯤은 냉소적인 유머로 넣은 장면일 것이라 생각하기는 하나, 한 사람이 AI에게 애정을 느낀다면서 자신을 새로운 성소수자로 소개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미 영화 'Her'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비슷한 역할을 연기했었으니 과한 상상력도 아닌 셈이다.

​

하지만 저자는 우리가 AI를 마치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 듯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학습하는 존재처럼 생각하지만, 실제 AI는 그저 인간이 반복적으로 쌓아놓은 거대한 데이터를 습득해 일정한 패턴을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AI에게 무슨 데이터를 입력시키느냐가 AI의 퀄리티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자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인공지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있습니다.

도로 교통을 조절하고, 구매 제안을 하고, 테러리스트를 색출합니다.

그리고 유리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우리 사회의 거울이자 확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단순한 행동만을, 그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과 결정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머지않아 인공지능에 통합되어 미래 세계를 만드는 데 이용될 것입니다.

(pg 91)

되게 덤덤한 말 같지만 생각해보면 매우 무서운 이야기다.

내가 무심코 올린 SNS 게시글, 답글, 인터넷 포스팅들이 AI의 학습 기초 자료가 된다.

물론 '내가 ' 썼다는 기록이 남지는 않는다고 하지만(솔직히 못미덥기도 하고) 내가 남긴 흔적이 나보다 더 오랜 수명을 가진다는 것을 잘 생각해봐야 한다.

​

작품 속 유리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사람들이 그를 대통령 후보로까지 추천하기에 이른다.

물론 최근에 있었던 대한민국 대선에서 '차라리 허경영이 낫지 않나?' 정도의 느낌을 주는 장면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후보는 작은 의미가 아니다.

저자는 인터뷰 형식을 빌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정교해질수록 그들이 살아 있다고 느끼는 우리의 환상은

더욱 공고해질 거에요.

그들이 지적이며 주체적인 인격을 가진 존재라고 믿게 되겠죠.

완벽한 환상과 현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죠."

"바로 그겁니다. 제가 오늘 카메라 앞에서 유리의 인격에 의문을 제기한다면,

저는 이 영상을 빌미로 40년, 혹은 50년 뒤에 비난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종족 차별주의자였군요.'

물론 지금으로서는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지만요."

(pg 128)

저자의 마지막 문제 제기는 유리가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냐는 것이다.

유리를 인격으로 부를 수 있다면 우리의 정신 역시 AI로 복제해 불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이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답한다.

개인 정보의 유출을 두려워하던 사회가

이제는 개인 정보를 퍼뜨리는 것이 불멸의 열쇠라고 생각하게 된 거야.

물론 기계를 통해 오래 살아남을 수도 있어.

하지만 우리의 존재 가치는 타인과의 교류 속에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

우리의 박제된 버전이 살아남게 되겠지만, 그건 모든 위대한 종교가 약속했던,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내세의 모습은 아니잖아.

(pg 160-161)

​

책 전체를 통틀어 저자가 하고 싶던 말은 아래와 같다.

결국 AI도 인간의 필요로 만들어진 도구 그 이상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유리 안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요.

여러분의 머릿속에서나 존재할 뿐이죠. 소설 속 주인공처럼요. - 중략 -

인공지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 중 가장 훌륭한 도구죠. - 중략 -

그래서 우리가 매 순간 자유를 노래할 수 있게 해 줄 거에요.

(pg 188-189)

물론 자유를 노래할 수 있는 '우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속하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처럼 부가 특정 계층에 몰리는 현상이 지속된다면 AI의 발달로 인한 결실도 결국은 소수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의 잘못이지 AI의 잘못은 아니다.

러다이트 운동으로 직장을 잃은 원망을 기계에게 풀 것이 아니라 기계의 소유자에게 돌려야 옳았을 우리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사실 작품 자체는 흥미 위주로 읽으면 금세 읽을 수 있는 쉬운 책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AI에 관심이 많다 보니 작품에서 던져주는 문제들에 내 나름의 생각을 많이 덧붙이게 되었다.

어렵지 않게 쓰여 있기 때문에 어린 학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AI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봄직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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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꽃
이곤 지음 / 종이로만든책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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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이름에 예쁜 표지를 가진 만화 작품이다.

요즘 보기 드문 주제인 일제강점기를 다룬 작품이라고 해서 꼭 읽어보고 싶었다.

배경이 일제 치하이기는 하지만 등장인물과 사건은 모두 픽션이다.

따라서 실제 역사와의 비교나 고증 등을 따질 필요 없이 그저 스토리를 따라가면 된다.

​

주인공은 김애정이라는 젊은 여성으로 본 것을 정확히 기억해 그려내는 능력을 가졌다.

자신의 능력이 독립운동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한 김애정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러 경성으로 가는데, 가는 열차에서 우연히 조선 총독의 아들을 만난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독립운동가들은 그녀의 세세한 그림을 토대로 조선 총독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조선 총독 아들과의 인연이 닿은 애정은 계획에 추진력을 더해준다.

​

이하의 스토리는 스포가 될 수 있어 생략하지만, 엄청난 반전이 있다거나 너무 만화처럼 허황된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대략적인 줄거리를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라면 감동을 느끼는 포인트가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또한 만화 작품이니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흑백으로 된 만화라 그런지 묘하게 수묵화 느낌이 난다.

등장인물들의 외형은 상당히 요즘 만화 같은데 전체적인 느낌은 요즘 만화보다는 어릴 적 읽던 옛날 작품 느낌인데 이 느낌이 일제강점기라는 배경을 그려내기엔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읽으면서 이 작품 속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아래의 페이지를 꼽을 것 같다.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결국 이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언급하면 그렇게 스포가 될 내용은 아니다.)

(pg 163)

​

210페이지 정도의 한 권짜리 만화책인지라 서사가 길지는 않지만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나름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있어서 읽고 난 뒤 찜찜함이 남거나 아쉬운 느낌은 없었다.

등장인물도 많지는 않지만 각각 특색들이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

이 작품 속 인물들이야 물론 픽션이기는 하겠으나 실제 독립운동 당시에 여성과 학생의 역할도 상당했으리라 생각한다.

역사 기록의 한계로 지금 우리에게 기억되지 못한 수많은 영혼들께 새삼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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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한 이유 ㅣ 워프 시리즈 1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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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긍정의 힘을 믿는 사람이 쓴 에세이 같은 제목이지만 그렉 이건이라는 작가가 쓴 SF 단편 소설집이다.

수상 경력도 화려하고 추천사도 많아서 호기심에 읽어 보게 되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 SF 소설에도 '하드' SF라는 하위 장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드 SF라 하면 과학적 사실 및 이론에 상충되지 않는 SF 소설을 말하는데 이 책의 작가가 그 분야에서 꽤 유명한 편이라 한다.

​

총 520페이지 정도로 살짝 두꺼운 책 안에 11편의 단편이 알차게 실려있다.

각 단편마다 다루는 주제들이 상이해서 한 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여러 권의 책을 읽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내가 행복한 이유'는 중병으로 뇌에서 행복감을 담당하는 부분이 모두 손상되어 일말의 행복감도 느끼지 못하던 남자가 최신 치료기법의 임상시험 대상자가 되어 그 부분을 회복해가는 이야기이다.

기술의 도움으로 얻는 행복감이 과연 진짜 자신의 행복이라 할 수 있는지, 또 이를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행복이 없는 인생은 견딜 수 없지만, 행복 그 자체는 목표가 되지 못한다.

나는 행복의 이유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또 그런 선택에 만족해할 수도 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자력으로 만들어 낸 나의 새로운 자아가 어떤 감정을 느끼든 간에,

나의 모든 선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상존한다.

(pg 119)

그러나 언제든 머릿속의 버튼 몇 개의 위치를 움직이기만 하면

그런 감정들을 사라져 버릴 수 있게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줄리아에 대한 내 감정이 진짜라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pg 132)

​

개인적으로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등장하는 '도덕적 바이러스 학자'이다.

종교에 광신적인 신념을 가진 한 남자가 '신의 섭리를 거스르며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는' 자들만 노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바이러스를 만들어 유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읽은 후 코로나19도 인간관계가 넓은 '인싸'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던 한 미친놈의 작품은 아니었을까 하는 공상에 잠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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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파이어'라는 작품 역시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을 다루고 있는데, 책을 다 읽은 후 이 작품의 집필 시기가 1995년이라는 점을 알게 되어 소름이 돋았다.

하드 SF가 생각보다 과학적 전망에 기반을 크게 두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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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작품에 더해 책의 마지막 작품인 '체르노빌의 성모'까지 읽어 보면, 주제는 각기 다르지만 작가가 종교에 대한 신념, 특히 광신적으로까지 빠지는 신념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과학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보기에 비이성의 극치라고 느꼈기 때문일까, 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가와 비슷한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블랙 코미디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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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에게 중요한 것들은 모두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학, 역사, 문학, 예술을 손가락으로 한 번 누르기만 하면

방대한 정보의 보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힘들게 얻은 진실을 자식들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도덕은 오로지 우리의 내면에서 오며, 의미 역시 오로지 우리의 내면에서 오고,

우리의 두개골 밖에 존재하는 우주는 우리에게 아예 관심이 없다는 진실을.

(pg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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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흥미로운 주제들을 풀어내고 있긴 하지만 '하드'라는 장르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소설이지만 내용이 조금 어려운 작품들도 있었다.

특히 수학적 공리를 주제로 한 '루미너스'라는 작품은 문체는 꽤 긴박하고 박진감 넘치는데 소재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왜 긴박해야 하는지 공감이 잘 안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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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식과 현재의 경험으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세계들도 등장한다.

'100광년 일기'라는 작품은 시간의 흐름이 선형적이지 않고 반복되는데 등장인물들이 그 반복을 인지할 수 있으며, '무한한 암살자'라는 작품은 공간이 멀티버스인데 이 멀티버스가 모두 한 인물을 중심으로 수없이 중첩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최선을 다해 정리했지만 위의 문장을 읽는 사람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될까 싶을 정도로 직관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배경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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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자는 시간에 대한 관념 자체가 변한다 하더라도(미래의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진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존재인지를 묻고 있는 작품이고 후자는 마블 영화에서나 맛보기로 등장하는 멀티버스의 개념을 훨씬 더 집약적이고 급진적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어서 읽은 뒤 여운이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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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유전자 공학이나 뇌과학 측면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를 기술적으로 모방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하는 '행동 공리'나 '내가 되는 법 배우기' 등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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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작품들을 담은 단 한 권의 책이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SF적 상상력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어서 마치 '블랙 미러'나 '러브 데스 로봇' 같은 시리즈물을 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SF작가들의 작가'라는 수식어가 과장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작가의 명성 대비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된 작품은 별로 없는 것 같아 다소 아쉽다.

이 책이 많이 팔려서 다른 작품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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