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행복한 이유 워프 시리즈 1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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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긍정의 힘을 믿는 사람이 쓴 에세이 같은 제목이지만 그렉 이건이라는 작가가 쓴 SF 단편 소설집이다.

수상 경력도 화려하고 추천사도 많아서 호기심에 읽어 보게 되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 SF 소설에도 '하드' SF라는 하위 장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드 SF라 하면 과학적 사실 및 이론에 상충되지 않는 SF 소설을 말하는데 이 책의 작가가 그 분야에서 꽤 유명한 편이라 한다.

총 520페이지 정도로 살짝 두꺼운 책 안에 11편의 단편이 알차게 실려있다.

각 단편마다 다루는 주제들이 상이해서 한 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여러 권의 책을 읽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내가 행복한 이유'는 중병으로 뇌에서 행복감을 담당하는 부분이 모두 손상되어 일말의 행복감도 느끼지 못하던 남자가 최신 치료기법의 임상시험 대상자가 되어 그 부분을 회복해가는 이야기이다.

기술의 도움으로 얻는 행복감이 과연 진짜 자신의 행복이라 할 수 있는지, 또 이를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행복이 없는 인생은 견딜 수 없지만, 행복 그 자체는 목표가 되지 못한다.

나는 행복의 이유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또 그런 선택에 만족해할 수도 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자력으로 만들어 낸 나의 새로운 자아가 어떤 감정을 느끼든 간에,

나의 모든 선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상존한다.

(pg 119)

그러나 언제든 머릿속의 버튼 몇 개의 위치를 움직이기만 하면

그런 감정들을 사라져 버릴 수 있게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줄리아에 대한 내 감정이 진짜라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pg 132)

개인적으로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등장하는 '도덕적 바이러스 학자'이다.

종교에 광신적인 신념을 가진 한 남자가 '신의 섭리를 거스르며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는' 자들만 노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바이러스를 만들어 유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읽은 후 코로나19도 인간관계가 넓은 '인싸'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던 한 미친놈의 작품은 아니었을까 하는 공상에 잠길 수 있었다.

'실버파이어'라는 작품 역시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을 다루고 있는데, 책을 다 읽은 후 이 작품의 집필 시기가 1995년이라는 점을 알게 되어 소름이 돋았다.

하드 SF가 생각보다 과학적 전망에 기반을 크게 두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었다.

위 두 작품에 더해 책의 마지막 작품인 '체르노빌의 성모'까지 읽어 보면, 주제는 각기 다르지만 작가가 종교에 대한 신념, 특히 광신적으로까지 빠지는 신념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과학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보기에 비이성의 극치라고 느꼈기 때문일까, 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가와 비슷한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블랙 코미디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에게 중요한 것들은 모두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학, 역사, 문학, 예술을 손가락으로 한 번 누르기만 하면

방대한 정보의 보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힘들게 얻은 진실을 자식들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도덕은 오로지 우리의 내면에서 오며, 의미 역시 오로지 우리의 내면에서 오고,

우리의 두개골 밖에 존재하는 우주는 우리에게 아예 관심이 없다는 진실을.

(pg 447)

전반적으로 흥미로운 주제들을 풀어내고 있긴 하지만 '하드'라는 장르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소설이지만 내용이 조금 어려운 작품들도 있었다.

특히 수학적 공리를 주제로 한 '루미너스'라는 작품은 문체는 꽤 긴박하고 박진감 넘치는데 소재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왜 긴박해야 하는지 공감이 잘 안되는 작품이었다.

우리의 상식과 현재의 경험으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세계들도 등장한다.

'100광년 일기'라는 작품은 시간의 흐름이 선형적이지 않고 반복되는데 등장인물들이 그 반복을 인지할 수 있으며, '무한한 암살자'라는 작품은 공간이 멀티버스인데 이 멀티버스가 모두 한 인물을 중심으로 수없이 중첩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최선을 다해 정리했지만 위의 문장을 읽는 사람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될까 싶을 정도로 직관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배경들이다.

하지만 전자는 시간에 대한 관념 자체가 변한다 하더라도(미래의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진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존재인지를 묻고 있는 작품이고 후자는 마블 영화에서나 맛보기로 등장하는 멀티버스의 개념을 훨씬 더 집약적이고 급진적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어서 읽은 뒤 여운이 오래 남았다.

그 밖에도 유전자 공학이나 뇌과학 측면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를 기술적으로 모방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하는 '행동 공리'나 '내가 되는 법 배우기' 등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한 작가의 작품들을 담은 단 한 권의 책이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SF적 상상력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어서 마치 '블랙 미러'나 '러브 데스 로봇' 같은 시리즈물을 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SF작가들의 작가'라는 수식어가 과장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작가의 명성 대비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된 작품은 별로 없는 것 같아 다소 아쉽다.

이 책이 많이 팔려서 다른 작품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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