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적으로 흥미로운 주제들을 풀어내고 있긴 하지만 '하드'라는 장르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소설이지만 내용이 조금 어려운 작품들도 있었다.
특히 수학적 공리를 주제로 한 '루미너스'라는 작품은 문체는 꽤 긴박하고 박진감 넘치는데 소재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왜 긴박해야 하는지 공감이 잘 안되는 작품이었다.
우리의 상식과 현재의 경험으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세계들도 등장한다.
'100광년 일기'라는 작품은 시간의 흐름이 선형적이지 않고 반복되는데 등장인물들이 그 반복을 인지할 수 있으며, '무한한 암살자'라는 작품은 공간이 멀티버스인데 이 멀티버스가 모두 한 인물을 중심으로 수없이 중첩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최선을 다해 정리했지만 위의 문장을 읽는 사람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될까 싶을 정도로 직관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배경들이다.
하지만 전자는 시간에 대한 관념 자체가 변한다 하더라도(미래의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진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존재인지를 묻고 있는 작품이고 후자는 마블 영화에서나 맛보기로 등장하는 멀티버스의 개념을 훨씬 더 집약적이고 급진적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어서 읽은 뒤 여운이 오래 남았다.
그 밖에도 유전자 공학이나 뇌과학 측면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를 기술적으로 모방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하는 '행동 공리'나 '내가 되는 법 배우기' 등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한 작가의 작품들을 담은 단 한 권의 책이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SF적 상상력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어서 마치 '블랙 미러'나 '러브 데스 로봇' 같은 시리즈물을 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SF작가들의 작가'라는 수식어가 과장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작가의 명성 대비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된 작품은 별로 없는 것 같아 다소 아쉽다.
이 책이 많이 팔려서 다른 작품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