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물리학 - 거대한 우주와 물질의 기원을 탐구하고 싶을 때
해리 클리프 지음, 박병철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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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도서관 대출

(e북으로 읽었으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 발췌문에 페이지는 생략함)

'다정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의 활약 덕분에 이제는 물리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유튜브를 통해 양자역학이라는 단어 정도는 익숙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의 이미지에 편승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하지만 그럼에도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을 가진 물리학 책이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다.

원제는 '아무것도 없는 우주에서 애플파이 만들기: 우주의 레시피를 찾아서'로 직역할 수 있는데, 칼 세이건이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했던 말로도 유명한 구절이다.

원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저자가 어렸을 때 애플파이의 구성 성분을 찾으려고 해봤던 기초적인 실험에서 시작해 우주를 이루는 물질과 그 기원에 이르는 방대한 물리학 지식을 다루고 있다.

중학생쯤 되면 모든 물질이 원자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원자가 곧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입자'라고 배웠던 기억이 나는데, 실제 입자물리학에서는 원자를 구성하는 입자들까지도 이미 발견되었고, 각각의 역할과 만들어진 과정까지도 밝혀져 있다.

하지만 원자의 구성 성분부터는 양자역학의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교양서 수준에서 다루기에는 한계가 분명한데, 이 책은 국문 제목처럼 그나마 쉽고 다정하게 우주가 어떻게 구성되었고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원자도 지극히 작으니 원자의 구성 입자는 더욱 작을 것이고, 당연히 발견하기도 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원자에서 시작해 전자, 양성자, 중성자, 쿼크에 이어 힉스입자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찾아낸 우주의 원료들을 큰 순서이자 발견한 순서대로 쭉 소개하고 있다.

각각의 원료마다 발견하게 된 과정과 방법을 언급하는데, 이 과정에서 무서운(?!) 수식을 활용하기보다는 이 원료들이 우주의 구성 성분이라고 인정되기까지 다양한 해석으로 대립하던 물리학자들의 이야기가 주로 등장해서 그리 복잡하지 않게 각 원료들이 밝혀지게 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저자도 그렇고, 책을 소개하면서도 이 성분들을 굳이 '입자'라고 쓰지 않고 있는데, 실제로 이런 성분들이 '입자'라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가 생각하는 원자는 '원 모양을 한 원자핵이 중앙에 있는 입자'의 형태일 것이기 때문에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 역시 입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입자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사실, 입자 같은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아는 한, 우주의 진정한 구성요소는 입자장이 아닌 양자장이다.

보이지 않고, 맛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유체 같은 물질이 가장 작은 원자에서

가장 먼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물질의 진정한 구성요소는 화학원소도, 원자도, 전자도, 쿼크도 아닌 양자장이다.

쿼크까지는 다른 책에서도 주섬주섬 주워들은 것이 있어서 그나마 익숙하게 넘어갔는데, 힉스입자가 등장하는 시점부터는 역시나 난이도가 확 오른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최선을 다해 쉽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에 찬찬히 여러 번 읽으면서 넘어갔는데 그래도 읽은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라고 하면 자신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힉스입자에 관한 다른 책을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경험이 있는데, 이 책을 통해 그나마 용어에는 조금 익숙해졌으니 그 책에 다시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힉스입자까지 밝혀낸 인류는 이제 빅뱅 직후 1조 분의 1초부터 물질의 탄생 과정을 설명해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빅뱅 직후부터 1조 분의 1초 후까지도 간격은 간격이다.

이 순간을 설명하지 못하면 결국 비과학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게 될 여지가 있다.

빅뱅이 일어난 바로 그 시점, 즉 '시간=0'인 시점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직 미스터리의 영역이고, 모든 입자와 모든 힘을 통합하는 이론도 실험으로 증명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책의 마지막 챕터에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작은 단위로의 탐구를 이어가는 '환원주의'로는 결코 이 미스터리를 풀 수 없다는 과학자들의 견해도 수록되어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들이 답을 찾는 여정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점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우주는 인간이 만들어낸 이론에 아무런 관심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원제와는 조금 동떨어진 국문 제목이지만 그럼에도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입자물리학을 이렇게 다정하게 설명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김상욱 교수의 저작에서 '온 우주는 떨림과 울림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라는 의미의 표현이 등장했었는데, 저자 역시 비슷한 표현으로 우주를 묘사한다.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보면 물질의 불연속성은 사라진다.

우리가 알고 있던 입자는 사실 입자가 아니라,

우주의 모든 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양자장의 교란이었다. - 중략 -

게다가 세상에는 단 하나의 전자장과 하나의 업쿼크장,

그리고 하나의 다운쿼크장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당신과 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 몸을 이루는 모든 원자들은 동일한 우주의 바다에서 일어난 잔물결이기에,

우리는 모든 피조물과 하나인 셈이다.

이 협소한 인간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아는 것도 어려운데, 온 우주의 구성을 안다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궁금하고 알고 싶은 주제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관련 전문지식이 부족해 교양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이런 책을 만나는 것이 늘 반가운 이유이기도 하다.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두께에 담긴 내용도 방대해서 쉽게 손이 가지는 않겠지만 생각하는 것만큼 두려운(?) 책은 아니니 교양 과학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추천하고 싶은 책이었다.

놀라운 발견(그리고 우리가 별의 내부와 빅뱅의 열기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매혹된 사람들)의 배경에는 시간과 문화, 분야, 꿈, 신체적 강약, 자존심 등을 초월한

수많은 사람들의 탐구 정신이 있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노력이 우리의 발길을 이끌어준 덕분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수수께끼에

전념했을 뿐이지만, 모든 사연이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되어 우리에게 전수되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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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건 내일 할래! 1 팡 그래픽노블
주쓰 지음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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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이제 2학년이 된 우리 딸은 만화책을 정말 좋아한다.

맨날 만화책만 읽어서 이제 만화책은 좀 덜 권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책은 캐릭터가 너무 귀여워서 아이뿐 아니라 나도, 아내도 좋아할 것 같아 같이 읽어보게 되었다.

표지에 보이는 네 명의 친구들이 펼치는 다양한 일상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림이 심플해서 대충 그린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각각의 캐릭터별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물론 MBTI까지 설정되어 있을 정도로 공들인 느낌이 난다.

특히 '옹심이'라는 친구는 전동 휠체어를 타는데 다른 친구들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섞여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아이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약 200페이지가 조금 안되는 분량에 총 15개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이 잔잔하면서도 건전해서 아이가 읽기에도 딱 좋았다.

아이들 만화라 해도 내용상 썩 좋지 못한 책들도 많은데 이 책은 전혀 거슬리는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편의점이나 도서관, 영화관처럼 평소에 아이들도 자주 찾게 되는 곳에 가는 일상적인 이야기도 있고, 뒷산에 올랐다가 자연인 아저씨를 만나 팥죽을 얻어먹는 등 흔히 경험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들도 있어서 아이들이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영화관이나 미술관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 같은 교육적인 부분도 잘 담아내서 권해준 부모 입장에서도 상당히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딸아이도 책을 보자마자 정말 기뻐하며 배고픈 것도 잊고 책에 빠져드는 걸 보면 아이들 눈높이에도 잘 맞는 모양이다.

1권이라고 적힌 것을 보면 네 명의 개성 넘치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올 모양이다.

다음에는 또 어떤 재미난 이야기들이 펼쳐질지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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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죄 - 나쁜 생각, 나쁜 명령. 그 지시는 따를 수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 시리즈
이모령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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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제목만 보고는 짧은 영상 매체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의 의식을 지적하는 사회과학 책인 것 같아 내가 읽을 생각이었는데 알고 보니 타깃 독자가 어린이들이라고 해서 놀라웠다.

요즘은 어른들도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이 온전히 자신의 사유인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추세인데 어린이들에게 이러한 내용이 얼마나 와닿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분량은 100페이지가 채 안 되어 그리 길지 않지만, 생각보다 글의 양이 많다.

삽화나 그림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글로만 된 부분의 비중이 커서 줄글을 읽을 수 있는 정도(최소 초등학교 고학년)는 되어야 충분히 읽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속에서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는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저자는 '유대인 학살'하면 떠오르는 그 이름,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례를 인용한다.

그리고 그의 재판 과정을 지켜봤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붙인 죄목이 바로 책 제목이기도 한 '생각하지 않는 죄'였다.

이 죄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옳지 않은 것이 있다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옳지 않은 행동이 강요될 때 이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과 명령에 굴복하는 '생각하지 않는 죄'는

단순한 도덕적 나태를 넘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 믿음, 공감, 연대감을 잃게 합니다.

이는 삶의 의욕을 무너뜨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며 사회적 고립을 초래합니다.

이것은, 결국 혐오와 폭력 같은 극단적인 행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pg 72)

인류가 지구의 지배적인 종이 된 원동력이 뛰어난 두뇌를 이용한 '사유'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를 현명하게 사용할 의무가 있다.

물론 말로만 적어두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사회화와 교육, 그리고 스스로의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성인이 되어도 어려운 일이다.

사회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봤다면 스스로가 늘 저렇게 살 수는 없었다는 걸 자각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있어도 조직에서의 순응을 위해 참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그러면서 그것이 오히려 '사회생활을 잘 하는 법'으로 포장되고 있지 않은가.

사실 딸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책인데 생각보다 내용이 어려워서 내가 읽게 된 책이다.

어린이용으로 집필했다고는 하나, 다루고 있는 주제나 사용한 용어들을 보면 최소한 청소년용이라고 해야 맞지 않았을까 싶다.

쉽게 썼다고 해도 어린이들이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차이를 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얇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고, 성인들도 읽으면 한 번쯤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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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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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도서관 대출

(e북으로 읽었으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 발췌문에 페이지는 생략함)

벌써 네 권째 만나고 있는 작가의 책이다.

이번 책은 단편집으로 총 여덟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포문을 여는 작품은 '영생불사연구소'라는 작품인데 시작부터 상당히 재미있다.

파리 목숨의 대명사인 현대 소시민의 삶과 영생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소재를 재미나게 버무렸다.

저자가 SF 작품들을 잘 쓰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SF라기보다는 뭔가 시트콤 같은 느낌을 준다.

직장인이라면 공감할법한 창립 기념행사라는 별 의미도 없는 행사를 준비하는 말단 직장인의 시각에서 전개되는데, 특히 행사 팸플릿의 단어 하나, 로고 위치 하나로 수많은 피드백을 거쳐야만 했던 말단 직원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웃픈' 현실 그 자체였다.

사실 '영생'이라는 키워드가 이 작품의 반전 요소이기는 하나, 제목에 버젓이 있기도 하고 그 사실을 알고 봐도 재미가 반감되지는 않을 것 같아 그대로 썼다.

표제작이자 무려 '필립 K. 딕 상' 후보작으로 유명한 '너의 유토피아'가 이어진다.

인공지능과 태양열 충전 기능이 탑재된 자동차가 폐허가 된 지표면 위에서 다른 안드로이드를 뒷좌석에 싣고 생존을 위한 사투를 이어가는 내용이다.

일단 작품의 시각이 일반적인 안드로이드가 아닌 자율주행 자동차라는 점이 재미있는데, 이렇게 인공지능이 탑재된 사물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작품이 하나 더 있다.

개인적으로는 표제작보다 더 인상 깊었는데, 'One More Kiss, Dear'라는 작품으로 이 작품의 화자는 무려 인공지능이 탑재된 엘리베이터다.

엘리베이터가 바라본 인간의 노화와 죽음, 그리고 인공지능과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시각 차이를 짧은 단편 안에서 충분하게 경험할 수 있다.

동물과 식물, 자연 현상에 관한 질문에도 90퍼센트 이상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유한함과 죽음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입니까?" - 중략 -

"인간 스스로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One More Kiss, Dear' 中)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그녀를 만나다'였다.

저자의 사회적 시각과 동조하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지 이 작품이 누구를 추모하기 위해 쓰였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읽었는데도 읽으면서 그 인물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자신의 성별 지향과 직업적 소명이라는 별개의 개념이 충돌하면서 잃지 않아도 될 생명을 잃었다.

저자는 '변희수 하사'에 대한 추모 위에 자본의 이름으로 죽어가야 했던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추모까지 한 작품 안에 모두 담아내고 있다.

특히 최근에도 비숙련 기간제 계약직 노동자가 뜨거운 쇳물 속에서 끔찍하게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유효하지 않을까 하는 비관적인 전망을 하게 된다.

내가 기억하는 기계는 사람을 죽였다. - 중략 -

그리고 사람들은, 그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기계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그렇게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끔찍하게 죽이는 걸 그저 보고만 있었다.

아니 그저 보고만 있는 건 아니고 사람값과 기곗값을 계산해서 이득을 따지고 앉아 있었다.

('그녀를 만나다' 中)

결코 잊지 않는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삶의 엉뚱한 순간들 속으로 과거의 상실이 비집고 들어오는 걸 받아들이면서

그래도 잊지 않고 세상을 이렇게 만든 빌어먹을 새끼들이 골로 가는 꼬라지를

보고야 말겠다고 나는 살았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나도 나아갈 것이다.

('그녀를 만나다' 中)

그 밖에도 가정 폭력 희생자의 안타까운 성장사를 SF 배경 위에 녹여낸 'Maria, Gratia Plena', 인간이 지구에 가한 폭력에 대항해 식물과의 결합이라는 진화를 이뤄낸 신인류 이야기인 '씨앗' 같은 작품들 역시 사회 비판적인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물론 사회 비판적 시각이 들어있다고 해서(흔히 하는 말로 PC가 좀 묻었다고 해서) 문학의 본질적 가치 중 하나인 '재미'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룬 '여행의 끝', 외계인 배우자와의 공생을 그린 '아주 보통의 결혼' 등의 작품들은 사회 비판적 시각보다는 SF 적인 느낌을 더 많이 주기 때문에 SF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난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수록 작품 대부분에서 상실과 애도의 감정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아직은 쌀쌀한 요즘 날씨에 읽기 딱 좋은 작품들이었다.

그러니까 상실하면 애도해야 하고, 상실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해서는

생존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상실된 사람들을 누가 기억해 줄 것인가.

그리고 행동으로 애도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런 상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작가의 말' 中)

한 작가의 책을 반복적으로 읽다 보면 작가에 대한 기대도 계속해서 수정되기 마련이다.

비교적 가벼운 작품으로 저자를 처음 접했기 때문에 이후에 읽은 작품들이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기는 하나,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무거운 느낌의 작품들이 더 취향에 잘 맞는 것 같다.

저자의 대표적인 장편들을 아직 접하지 못했으니 이제 장편으로 눈을 돌려볼까 한다.

여하간 앞으로 어떤 작품을 더 발표할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작가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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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이기원 디스토피아 트릴로지
이기원 지음 / 마인드마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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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뉴소울시티'라는 100년 후의 서울을 배경으로 불평등이 극에 달한 독창적인 미래 사회를 그려냈던 '쥐독'이라는 작품의 후속편이다.

특이하게도 후속편이지만 시간의 흐름은 전작보다 50여 년 정도 앞선 프리퀄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뉴소울시티'는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인류의 대부분이 절멸한 상황에서 10대 대기업들의 연합체인 '전국기업인연합'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 안정적인 체계를 갖추게 된 도시국가다.

전작과 배경이 동일하기 때문에 전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즉각적으로 작품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초반에 간략하게 그간의 역사가 소개되고, 등장인물 역시 '쥐독'에서 마인드 업로딩으로 영생을 얻게 되는 지도자 '류신'을 제외하면 전부 다르기 때문에 전작을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번 작품의 소제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는 AI 판사다.

모든 증거와 정황을 분석하여 정확한 판결을 내리는 '저스티스-44'라는 AI가 '뉴소울시티'의 범죄율을 극적으로 낮추자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AI를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AI가 완벽에 가깝게 통제한다고 해도 인간의 행동과 의지는 일정 수준의 변수를 만들어내게 마련이므로 사건사고가 아예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그러한 변수들로 인해 벌어진 사건 사고를 조사하여 AI 판사에게 기록을 넘겨주는 '픽서'라는 직업을 가진 남성이다.

그는 어느 날 한 교통사고를 조사하는데,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AI 판사가 단순한 사고로 처리하는 모습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의구심을 따라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하던 중 이상한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면서 AI 판사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 사람이 그뿐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의기투합하여 AI 판사가 가진 비밀을 캐기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결국 우린 도구군요. 그렇지만 인간을 정의롭게 하는 도구란 없어요.

인간 스스로가 정의로워져야 하죠. 어떠한 도구든 결국 탐욕의 대상이 되니까요.

인간의 역사가 그걸 증명하잖아요. 불도, 칼도, 화약도, 비행기도, 핵도.

(pg 311)

여기까지만 소개하면 대충 스토리가 짐작될 것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AI 판사의 판단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세력이 존재한다.

하지만 작가가 꽤나 괜찮은 반전을 만들어놨고, 그 반전이 마지막까지 가야 밝혀지는 구조라서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전작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전작에서 다소 아쉬움으로 남았던 전개상의 이상한 부분이라던가 너무 일이 쉽게 잘 풀리는 것 같은 느낌도 이번 작품에서는 찾기 어려웠다.

다만 소재 자체가 이미 많은 SF 작품들에서 다뤄진 AI여서 중반까지의 전개가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는 부분은 어쩔 수 없는 단점으로 남을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결말이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그 결말이 곧 쥐독의 세계와 연결되는 부분도 있어서 작가가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공을 들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초반을 읽다 보면 '쥐독'보다 과거의 시점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묘하게 더 발전된 느낌을 받는데, 이 이유도 후반부에 가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과 '쥐독' 사이의 시점을 다룬 책이 마지막으로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그 작품을 읽고 나면 '쥐독'의 사회가 왜 그런 모습이어야 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특이하게 시간 흐름상 3-1-2 순서로 책이 발간되는데, 그런 순서를 택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마지막으로 발간될 작품에서 그 의도를 알 수 있게 되길 기대하면서 다음 작품을 기다려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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