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 사면 과학 드립니다
정윤선 지음, 시미씨 그림 / 풀빛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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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동네 산책을 하다 보면 정말 과장 없이 100미터마다 하나 꼴로 편의점이 있다.

이 많은 편의점들이 다 장사가 될까 싶은데 아이를 키우다 보면 요즘 아이들에게 편의점이 갖는 의미가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부모가 맞벌이고 학원을 여러 군데 다니는 아이들에게 편의점은 식당이자 휴게소이며 만남의 장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아이들에게 친숙한 편의점이라는 공간을 빌어 과학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 나와 아이와 함께 읽어보게 되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식품들이야말로 식품공학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당연히 몸에 흡수되는 것이므로 안전해야 할 것이고 일정 기간 보존이 가능해야 하며 동시에 섭취도 간편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장 흔한 음식 보존 방법인 통조림만 보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오랜 기간 보존이 가능한지, 통조림 뚜껑을 따는 원리는 무엇인지 등 배울 수 있는 과학 지식들이 방대하다.

어른인 내가 보기에도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다.

특히 '소시지는 왜 세로로 터질까'라는 챕터가 기억에 남는데, 지금까지 40년 넘게 수많은 소시지를 먹어왔을 텐데도 이러한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의 출발이 곧 질문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접근법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단순한 과학지식 이외에도 환경과 지구에 관한 지식도 담아내고 있다.

예를 들면 왜 생수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나오는지, 햄버거를 많이 먹으면 환경에 왜 좋지 않은지 등 아이들이 무심코 섭취하는 음식들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학습할 수 있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만화가 아니어서 좋았다.

아이가 워낙 만화만 읽으려고 해서 줄글로 된 책 중에 아이가 흥미를 가질만한 책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이 책이 그 역할을 잘 해줄 것 같다.

흥미롭게 읽고 나면 아이가 이것저것 아는 척하기 좋은 책이라서 아이도, 부모도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아 아이에게 선물할 책을 고민하는 부모라면 선택지에 넣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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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자 유성호의 유언 노트 -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지침서
유성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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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라는 저서를 통해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법의학자로서의 삶과 매일 죽음을 접하는 사람으로서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고찰을 담아낸 바 있었던 저자가 새로운 책을 발간했다.

이번 책에서는 '유언을 통한 죽음의 고찰'이라는 주제로 범위를 좁혀 보다 심도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미리 유언을 준비해 보라'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유언'의 사전적 의미는 '죽음에 이르러 남기는 말'이라 한다.

따라서 사고나 심장마비 등으로 급작스럽게 죽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죽음에는 어떤 형식으로든 유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 지병도 없는데 유언을 '미리 준비한다'라고 하면 아무래도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남기는 유언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저자는 책 초반에 이러한 오해를 먼저 풀어낸다.

저자가 유언을 미리 준비하라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물론 인간사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리 대비하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지금 현재의 삶에 더 충실하기 위해서다.

유언을 생각해 보면서 자신의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고 오늘을 더 충실하게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끝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더 충실하게 살기 위한 다짐이자 생의 매 순간을 음미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곧, 오늘을 더욱 사랑하고 내일을 준비하며,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것이 우리가 남은 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pg 157)

또 다른 이유는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서다.

개인적으로도 가족을 급작스럽게 떠나보낸 경험이 있어서 이 부분이 더 와닿았는데, 사실 누군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남겨진 사람들은 자신도 슬픈 와중에 밀려드는 사람들을 응대해야 하고, 이런저런 잘 알지도 못하는 행정 절차를 밟아야 한다.

갈수록 자동화되는 이동 수단들, 높아지는 스트레스 지수로 인해 진짜 멀쩡하던 사람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사례는 우리 주위에도 얼마든지 있다.

나에게도 언제 그런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몇 가지 세심하게 고민해 작성한 문건이 있다면 남겨진 가족들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리운 감정을 내면에 품은 채 계속해서 일상을 꾸려나가야 한다.

일상 속에서 절절한 그리움과 함께 밥을 먹고, 잠들고 일어나며 출퇴근을 하다 보면,

어느 날 그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마음속에 있는 채로,

세상을 떠난 이가 원하던 모습의 자기 자신을 일상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pg 57)

또한 여기서 말하는 유언은 단순히 재정적인 부분을 어떻게 상속한다거나, 연명치료가 의미가 없을 때 어떻게 하라는 등의 실용적인 내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죽는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들, 기억되고 싶은 나의 모습 등 자신의 삶 전반에 대한 내용을 담아내는 것이 좋다.

유언은 단순히 죽음을 앞둔 이의 마지막 한마디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궤적과 가치를 함축한 메시지로, 때로는 그의 정체성과 철학,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선물이 된다.

(pg 184)

물론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갑자기 유언을 작성해 보는 것은 평소에 글쓰기에 익숙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 돕기 위해 세심하게 마련된 유언 노트가 별책 부록으로 제공된다.

법적으로는 직접 자필로 쓰고 서명한 유언이 효과가 있다고 하니, 미리 노트에 연습해 보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글씨를 너무 못써서 컴퓨터로 먼저 작성해 본 후 노트에 옮겨보려고 한다.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이와의 추억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시간의 흐름과 자신의 용기로 인해 아름답게 남는다.

(pg 51)

저자 역시 1년에 한 번씩 유언을 작성해 보고 있다고 한다.

그중 일부가 책 후미에 수록되어 있으니 스스로의 유언을 작성해 보려는데 샘플이 없어 막막한 사람이라면 꼭 끝까지 읽어보기 바란다.

물론 죽음은 무거운 주제지만, 책 자체는 전혀 무겁지 않다.

250페이지가 조금 넘을 정도로 두껍지 않고 서술도 매우 친절한데다 사진 비중도 많아서 읽기에 그리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짧은 분량임에도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참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아래의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동생이 세상을 떠난 후 제를 올렸던 절의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오래전이라 문장은 정확하지 않으나, "먼저 간 자식이지만 부모 가슴에 못 박은 불효자인 것만이 아니라 먼저 감으로써 우리에게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참된 삶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 있으니 우리의 스승이 된 것이기도 하다." 정도의 의미가 담긴 말씀이었다.

아래의 구절과 일맥상통하는 걸 보면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비슷한 철학적 귀결에 다다르는 모양이다.

죽음을 통해 배운 가치는 결국 사랑으로 귀결된다.

사랑했던 이와의 관계, 남긴 기록, 함께한 시간은 삶이 끝난 뒤에도 이어지는 유산이 된다. 그래서 죽음은 단지 삶의 끝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워 주는 선생님과 같다.

(pg 229)

술술 읽히는 책이지만 타인의 죽음이 아닌 자신의 죽음을 직면한다는 것은 쉽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남은 삶을 더 충실하게 살기 위해 다가올 죽음을 미리 떠올려보라는 저자의 조언은 나이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유효할 것이기 때문에 보다 진지한 태도로 자신의 삶을 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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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세포막 안으로
김진성 지음 / 델피노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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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제목만 봐도 뭔가 생명공학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작품이다.

처음 접하는 작가인데, 희귀 질환 치료제 개발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 과학자의 이야기라는 소개에 흥미가 가서 읽어보게 되었다.

작품 속 희귀질환은 사고 패턴 붕괴 장애(TCDD)라 불리는 유전병으로 한 가지 사고 패턴에 고정되는 병이다.

검색해도 딱히 나오는 게 없는 걸로 봐서는 저자가 설정상 창조한 유전병인 모양이다.

여하간 이 질병에 걸리면 평생을 정신지체 장애로 살아야 한다.

작품의 주인공인 '서연'은 이 질병 치료제를 위해 오랜 기간 연구해온 박사과정생이다.

단순히 국내 최고의 제약회사에 들어가고 싶었던 자신의 커리어 패스를 위한 연구였지만, 임신을 하게 되고 곧 그 아이가 곧 TCDD를 가지고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검사 결과를 받게 되자 연구에 더 몰두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임상 사고로 실험 대상자들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고, 국내는 물론 프랑스에서까지 서연의 연구를 가로채려는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긴장감이 높아진다.

안타깝게도 진실은 믿음을 이기지 못한다.

때론 진실과 믿음이 한 편이 되어 승리하기도 하지만,

서로 적대적 관계가 되면 언제나 진실은 믿음에 패한다.

(pg 7)

놀랍게도 서연이 연구한 약은 TCDD 자체를 치료하지는 못하지만 병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태아에게 작용할 경우 슈퍼 두뇌를 가진 아기가 태어날 수 있는 효과를 보인다.

당연히 현대적인 관점에서의 우생학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고, 자신의 아이가 천재로 태어나기를 원하는 부모와 이를 통해 천문학적인 이익을 볼 수 있겠다는 거대 기업의 이해가 맞물리면서 사건은 점점 더 미궁으로 향한다.

근데 이 무능력이라는 병은 유전이 돼요. 가난도 유전이 되고요.

같은 엄마로서, 이 질병을 물려주고 싶으세요?

(pg 265)

등장인물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이해관계가 서로 첨예하게 충돌하고,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뒤통수를 겨냥하기 바빠 쉽사리 결말을 예상하기 어려운 전개를 보여준다.

하지만 공간적인 배경은 자주 바뀌지 않고 이야기 전개도 매우 빠른 편이라 쉴 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갔다.

마지막에는 나름의 반전도 준비되어 있어서 끝까지 책을 넘길 때까지도 긴장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선역과 악역을 맡은 인물들이 뭔가 한국 드라마에서 매번 봐왔던 것 같은 인물들이라는 점이 살짝 아쉽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이야기 전개에 방해를 줄 정도는 아니었다.

SF 느낌이 물씬 풍기는 제목의 작품이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스릴러에 가깝다.

어려운 과학 용어나 상상력이 많이 필요한 설정은 없기 때문에 가볍게 읽을 소설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 편이라 영화나 짧은 드라마로 나와도 재미있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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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지음, 장하나 옮김 / 성림원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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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무려 120년 전에 발표된 작품인데 지금까지도 인기가 많은지 계속해서 새로운 판본이 나오고 있다.

도서관에서 숱하게 지나칠 때에는 들춰볼 생각도 안 하던 책인데, 이번 판본에는 고양이 주제에 한껏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눈에 띄어 드디어 읽어보게 되었다.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표지의 고양이가 작품 속 고양이를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작품은 허락도 없이 얹혀사는지라 이름도 없는 그냥 '고양이'의 시각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이 고양이가 문학은 물론 역사와 문화까지 인간 사회에 대한 상당한 지식수준을 자랑한다.

그래서 얹혀사는 집안에 드나드는 자칭 지식인들의 대화를 엿듣고 건방지게 이런저런 평론을 하는 것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600페이지 중반으로 꽤 두꺼운 책인데, 신기하리만큼 큰 사건사고가 없다.

고양이의 주인이 별 볼 일 없는 교사인데다 드나드는 사람들도 그다지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고는 할 수 없는, 그냥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작품 중반까지 집주인 이웃에 사는 부잣집 딸과 집주인의 제자가 결혼을 하냐 마냐 하는 걸로 입씨름을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부잣집 안주인의 유달리 큰 코가 대화의 주된 내용이 될 정도다.

주인도 그렇고 주인 친구들도 그렇고 나름 먹물 좀 들었다 하는 사람들이라서 만날 때마다 자신들만의 인생철학을 논하는데 고양이는 이 내용을 용케 알아듣고 모조리 비웃는다.

모르는 것에는 무시할 수 없는 뭔가가 잠복해 있어서,

측정할 수 없는 부분에는 왠지 고상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거들먹대고,

학자는 아는 것을 알 수 없도록 강의한다.

대학 강의에서 모르는 것을 떠벌리는 자는 평판이 좋고,

아는 것을 설명하는 자는 인기가 없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pg 449)

그런데도 신기할 정도로 읽는 재미가 있다.

심지어 집주인이 부잣집 안주인의 큰 코로 시를 지으며 놀리는 부분에서는 현웃이 터져 카페에서 읽다가 주변에서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로 재미있었다.

고양이가 본 인간 사회의 이상함도 꽤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다.

동물 입장에서는 옷을 입는 문화를 신기하게 생각할 거라 예상했는데, 이 고양이는 고양이인 자신도 항시 털로 뒤덮여 있는데 털도 없이 '미개하게' 태어난 인간들이 대중탕이라는 곳에서 발가벗고 모여있는 모습을 더 신기하게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사유재산과 그로 인해 번뇌하고 갈등하는 인간들을 한심하게 생각하기도 하는 등 인간 사회를 꿰뚫어 보는 시각이 인상적이다.

만약 땅을 잘라 한 평당 얼마라는 소유권을 사고판다면,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약 한 자 세제곱으로 쪼개어 판매해도 좋을 것이다.

공기를 팔 수 없고 하늘에 줄을 치는 것이 부당하다면, 사유지도 불합리하지 않은가.

이러한 견해에서 이런 법을 믿는 나는 어디든 들어간다.

(pg 187)

인간의 성품을 바둑알의 운명으로 점쳐본다면, 인간이란 천공해활의 세계를 스스로 좁혀, 자신이 두 발로 서 있는 자리 밖으로는 절대로 발을 내딛지 못하도록 잔재주를 부려서

자기 영역에 줄을 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인간이란 고통을 굳이 사서 하는 존재라고 평해도 좋을 것이다.

(pg 549)

그 밖에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고양이가 자신의 의견을 덧붙일 때 마냥 웃어넘기기만은 힘든, 생각 속에 날카로운 칼날이 하나 숨겨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아래의 구절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이 경험했던 바인데, 이를 120년 전 고양이의 눈을 빌어 표현한 저자의 통찰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세상에는 이렇게 어이없는 일도 더러 있다.

고집을 부려 이겼다고 생각하는 동안, 본인의 인물 시세는 곤두박질친다.

이상하게도 고집을 부린 당사자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체면을 세웠다고 생각하는데,

그 후로 남이 경멸하며 상대해 주지 않으리라고는 꿈에도 깨닫지 못한다.

이런 행복을 돼지적 행복이라고 하는 것 같다.

(pg 473)

비록 100년이 넘은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결말을 언급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건방진 소리를 찍찍하던 고양이의 마지막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는 점만 언급한다.

물론 이러한 점이 작품의 해학성을 높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의 정의를 말하자면 달리 아무것도 없다.

그저 쓸데없는 것을 만들어 내어 스스로 고통받는 자라고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pg 495)

이 시기부터 종전까지 혼란스러웠던 시대의 일본 문학 작품들 중에는 지금까지 사랑받는 작품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좋아하는 작품을 만나보지 못했었다.

이 시기 특유의 허무주의가 나와는 좀 맞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매우 시니컬하면서도 해학이 살아 있어서 읽는데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쓸데없이 건방지기만 한 고양이는 물론이거니와 보잘것없는 인간들 하나하나마저도 애정이 가는, 그러면서도 재미와 의미를 빠짐없이 추구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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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열림원 세계문학 7
조지 오웰 지음, 이수영 옮김 / 열림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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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읽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 같은 작품을 두 번 이상 읽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회 이상씩 읽은 작품이 있다.

바로 저자의 '동물농장'과 이 작품이다.

기록을 보니 지난번에 읽었을 때가 벌써 12년 전인 모양이다.

대강의 스토리라인과 전체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 장치들, 결말 정도는 기억이 났지만 당연히 작품의 세부적인 디테일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읽으니 또 새롭게 느껴졌다.

또한 처음 읽었을 때는 알아채지 못했던 여러 복선들도 눈에 들어왔다.

책을 덮은 후 12년 전에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쓴 글들이 아직 남아있고, 미래의 내가 언제든 다시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다.

윈스턴이 목숨을 걸고 썼던 일기는 결국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미래와 소통할 수 있단 말인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래가 현재와 비슷하다면 아무도 윈스턴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미래가 현재와 달라진다면 윈스턴의 고생은 의미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pg 18)

작품 속 전체주의의 모습이 지금 현대 사회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는 분석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정치적 세력이 아니긴 하나, '빅 브라더'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대 초국적 기업들이 우리의 정보를 빠짐없이 수집하고 있고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은 어느 사회에든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를 쥐고 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무능한 대통령을 뽑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기어코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고 그러한 민중의 성공은 결코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에게는 있다.

윈스턴이 그렇게도 갈망하던 사회와 우리 사회는 생각보다 많이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획일성의 시대로부터, 고독의 시대로부터,

빅 브라더의 시대로부터, 이중생각의 시대로부터.

미래를 향해, 또는 과거를 향해, 생각의 자유가 있고,

인간이 서로 달라도 함께 살 수 있는 시대를 향해, 진리가 살아있고,

이미 일어난 일을 없었던 것처럼 지워버릴 수 없는 시대를 향해.

인사를 보냅니다!

(pg 45)

물론 지금의 사회가 완벽한 수준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의 생명력이 지속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사회에 '완벽'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적어도 더 나빠지지는 않아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이 작품에서 대중을 통제하는 방식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통제하려고 하는 세력이 눈에 띌 때 우리는 단호하게 싫다고, 그만하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 단순한 것, 진실된 것은 지켜져야 했다.

진실이 진실이라는 주장은 진실이다.

(pg 117)

이 땅의 민중들은 또 한 번 정신 나간 권력자로부터 나라를 구했다.

그 놀라운 힘의 배경에는 이 작품처럼 사회 비판적인 문화 콘텐츠에 대한 우리 민중들의 사랑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도 작품명으로 검색해 보면 그래픽 노블부터 초등학생을 위한 판본까지 정말 다양한 출판사에서 수많은 판본이 판매되고 있다.

그만큼 많이 읽히고 사랑받는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이미 읽었던 작품임에도 이 판본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었던 이유는 번역이 새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읽었던 판본에서는 줄리아가 윈스턴에게 존댓말을 쓰는데, 사실 극중 사회와 인물의 성격을 고려하면 존댓말을 쓰는 것이 상당히 어색한데, 이 판본에서는 그 점이 수정되어 있다.

때문에 이전에 읽었던 사람들도 새로운 느낌으로 읽기 좋으니 이번 기회에 다시 읽고 싶은 독자라면 이 판본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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