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런틴 워프 시리즈 4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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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내가 행복한 이유'라는 단편집을 통해 강한 인상으로 남았던 그렉 이건의 장편 소설이다.

작가의 초창기 작품이지만 국내에는 최근에야 번역되어 출간된 모양이다.

상당한 수준의 과학 지식을 훌륭한 스토리 속에 녹여내는 작가인지라 그의 장편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서점에서 보자마자 사서 읽게 되었다.

제목인 쿼런틴(quarantine)은 코로나19 때문에 뉴스에 많이 등장한 단어인데, '격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느 날 지름이 명왕성 궤도보다 두 배나 더 큰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가 태양계를 가둬버린다.

편의상 이를 '버블'이라 불렀고, 이 때문에 태양계 밖에 존재하는 별들은 지구에서 관측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즉 우주가 지구를 '격리'시킨 셈이다.

당연히 과학계는 물론이고 언론과 온갖 사이비 종교들이 내놓는 저마다 다른 해석들이 범람하며 지구는 큰 혼란을 맞게 된다.

하지만 3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버블이 나타났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자 사람들은 버블을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게 된다.

주인공인 '닉'은 버블이 나타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사이비 종교집단의 테러로 아내를 잃은 전직 경찰이자 사립 탐정이다.

어느 날 한 병원에서 지체장애인이 실종돼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조사를 맡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입 부분은 마치 탐정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닉이 찾아야 했던 로라에게 접근하면서 이 사건이 단순한 납치가 아닌 버블의 정체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이 가진 놀라운 점이 드러나는데, 바로 양자역학의 해석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본래의 우주는 양자가 가진 특성인 중첩상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즉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였는데 인간이 나타나면서 한 가지 상태로만 고정되는 상태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이를 '파동함수의 수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로라가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 파동함수를 수축시키지 않고 확산 상태로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확산 상태에 있으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모든 경우의 수를 경험할 수 있고, 이 중 최선의 선택지를 골라 수축하면 그 선택이 바로 현실(과거)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때 선택받지 못한 모든 경우의 수는 그냥 파괴되어 버리는데, 이것이 태양계 바깥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누군가가 지구를 격리한 것이 바로 버블이라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 중 하나가 이 능력을 획득하기 전까지,

우주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을 테니까요.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모든 개연성들이 공존하는 우주.

파동함수는 결코 수축하지 않고 그 대신 점점 더 복잡화되기만 했겠죠. - 중략 -

하지만 본래의 우주가 그토록 다양하고, 그토록 복잡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 일각에서 이것들 모두를 전복시키고,

자기 자신을 창조한 문제의 다양성 자체를 소멸시켜 버린 생물이 진화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pg 207)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설정 중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중요한 것이 또 있는데 바로 모드(mod)의 활용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단어일 텐데 게임에서 모드는 캐릭터의 외형이나 능력치를 수정하는 등 본래의 프로그램에 특정한 변형을 가하는 것이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드 역시 뇌 속에 장착하는 일종의 프로그램이라고 보면 된다.

작품 속 설명으로는 뇌 배선을 변경해 주는 것인데, 설치하고 나면 머릿속에서 이를 불러와 다양한 기능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최근에 읽었던 한 뇌과학 책에서 뇌의 배선 과정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책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미완성인 채로 태어나 각종 감각 기관들에 의해 완성된다고 한다.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참조)

이 작품 속의 모드는 그러한 과정을 단축시키고 감각의 범위를 확대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파동함수의 확산 기능 역시 모드의 형태로 뇌 속에 설치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모드에도 모드의 이름과 기능은 물론이고 제조사명과 가격까지 명시해두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예컨데 '암호 비서(<뉴로컴>, 5,999달러)'라는 식으로 소개가 된다.)

물론 이 모드의 활용을 둘러싼 논란도 작은 비중이지만 다뤄지고 있다.

모든 사람의 뇌는 자연 상태에서도 알아서 배선을 바꿉니다.

모든 사람은 자체적인 이상에 맞춰서 스스로를 형성하려고 합니다.

신경 모드가 그런 일을 실로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실제로 제공해 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

그걸 끔찍하다고 낙인찍을 수 있는 겁니까?

(pg 328-329)

근래에 양자역학과 뇌과학 관련 교양서를 몇 권 읽었었는데 읽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이나 용어 정도라도 익혀둔다면 이 작품을 이해하기도 훨씬 쉽고 재미도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파동함수의 확산과 수축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파동함수가 확산하는 현상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작가가 이 현상이 발생한 경우의 모습을 최선을 다해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글을 잘 따라가다 보면 '아 이런 느낌이구나'하는 시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있는 이 도시가 공존하는 수많은 가능성들의 안개로 분산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있는 존재가 다름 아닌 내 주위 군중들이라는 생각은,

믿기 힘들다기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무의미하다고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낯익은 현실이 제아무리 복잡하고 기괴할 정도로 반직관적인 기반에 입각해 있다 하더라도, 현실은 어디까지나 낯익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러더퍼드가 원자는 거의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발표했을 때,

지면이 예전에 비해 조금이라도 덜 견고해지기라도 했나?

진실 자체는 그 무엇도 변화시키지 않는 법이다.

(pg 218)

존재하는 모든 경우의 수를 찾아낼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 선택을 해야만이 그것이 현실로 확정이 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닉 역시 어려운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지만 그 선택을 피할 방법은 없다.

어찌 되었든 우리 인간은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살도록 진화했고, 과거는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택을 하고, 그 결과 단 하나의 고유 상태만 살아남게 돼.

그건 비극이 아냐.

그건 우리들의 존재 그 자체이고,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방식이야.

(pg 415)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분명 아니겠지만 취향만 맞다면 엄청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다 읽고 나면 자신의 상상력의 한계가 조금은 넓어진 것 같은 느낌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렉 이건이 왜 '작가들의 작가', '현존하는 최고의 SF작가'라는 칭송을 받는지도 이 책을 통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작가의 작품들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지는 않았는데 모쪼록 다른 작품들도 빨리 한국어로 만나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사실을 말하지만, <버블>은 결코 인류를 가뒀던 적이 없다.

단지 인류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도록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갇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무한대의 자유라는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강제로 직면해야 했기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pg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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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는 우리를 들뜨게 하지
바나 지음 / 브레인스토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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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질은 집사람이 출산했을 무렵부터 지속하고 있는 취미다.

벌써 아이가 만 6세가 다 되어가니 꽤 오랜 시간 즐기고 있는 셈이다.

방 안에 책장 하나 가득, 그리고 창고에 뭉텅이로 들어차있는 실들을 볼 때마다 숨이 막혀오는 것 같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 방 가득 차 있던 변신로봇들을 볼 때 집사람의 심정이 이랬겠거니 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던 참에 재미난 제목에 뜨개질을 소재로 한 책이 나와서 집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접하게 된 책이다.

사실 뜨개질로 완성된 물건을 그냥 돈 주고 사는 것이 더 저렴할 정도로 소위 '가성비'가 나오는 취미는 아닌지라 개인적으로는 왜 하는지 그다지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본래 '취향'의 영역에 '이해'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저자도 자신의 취미에 이러한 회의를 느낀 적이 상당히 있는 모양이다.

‘내가 들였던 시간과 노력을 시급으로 환산하면

’도대체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을까‘라는 후회섞인 생각은 지우기가 힘들다.

(pg 74)

일반적으로 뜨개질 하면 그저 저렴하고 고상한(?) 취미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비용도 꽤 들고 피부가 많이 상하기도 하는 취미다.

집사람 손가락에 밴드를 붙여주는 것이 저녁에 꽤나 자주 있는 일과가 되었다.

저자도 비슷한 경험이 많은 모양이다.

하지만 내 피부는 성할 날이 없다. 나는 러스틱한 실을 좋아하고 자주 사용한다.

가뜩이나 예민하고 약한 내 피부인데

작년 겨울에는 러스틱한 실로 너무 오래 해서 검지가 찢어지기도 했다.

(pg 78)

상황이 그렇다 보니 나도 가끔 집사람에게 왜 뜨개질을 하는지 물을 때가 있다. (사람들이 나한테 술 왜 마시냐고 묻는 것과 같이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점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집사람은 마치 스님이 도를 닦듯이 명상하는 작업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나 같은 사람과 살려면 매일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테니 그 마음이 일면 이해가 갈 때가 있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본업은 코딩이고 본인의 직업을 매우 사랑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트레스가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때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데 집중함으로써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덕질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 빠지다 보면 일반 사람들은 해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을 일들을 벌이게 되는데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저자가 직접 실을 염색하는 것에 도전했던 것이다.

얼핏 생각하기에도 실 염색은 공장이 아니면 옛날 가내수공업 방식(전문용어로 노가다)으로 해야할 것 같은데, 저자 역시 아보카도 40개를 직접 손질해가며 실 염색에 도전하는 과정이 재미나게 서술되어 있다.

물론 그 결과물은 아래와 같다.

핸드다잉얀은 사는 것이다!

그리고 난 아보카도 40개를 먹은 뒤 단 한 번도 아보카도를 먹지 않았다.

(pg 72)

제목에 충실하게 대부분은 뜨개질에 대한 내용이지만 작가가 살고 있는 아일랜드라는 나라의 감성도 엿볼 수 있는 점이 좋았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 꽤 많이 실려 있는 편인데 마치 여행 도서처럼 사진을 통해 아일랜드라는 생소한 나라의 풍경을 한껏 감상할 수 있었다.

집사람도 이 책을 읽고서 주변의 뜨개인들과 대화를 하다 책 이야기를 하자 대여 요청이 쇄도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역시 뜨개인들이 보면 훨씬 재미가 있는 모양이다.

글이 길지 않고 사진도 많은 편이라 읽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책은 아니므로 뜨개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의 창의력으로 탄생한 작품을 즐길 줄만 알지 직접 뭔가를 만들어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인지라 천천히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재미를 알지는 못하지만 뜨개인 반려자와 함께 살아가는 입장에서 집사람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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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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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접한 한강 작가의 작품이다.

'소년이 온다'가 광주에서 국가의 손에 죽어간 이들을 다룬 작품이었다면 이 책은 제주에서 국가의 손에 죽어간 이들을 다루고 있다.

(e북으로 읽었는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서 발췌문에 페이지를 표기하지 못했다.)

특이한 점이라면 제주 4.3사건을 다루고 있으면서 시점이 현재라는 것이다.

제주 4.3사건 당시 가족을 잃고 살아남은 노모를 두었던 다큐멘터리 감독 인선과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작가 경하의 시각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러면서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아직 발굴조차 되지 못한 유해들을 비롯해 완결되지 않은 그날의 사건을 영원히 기억에 남게 하는 작품이었다.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마치 '소년이 온다'를 쓴 작가 본인처럼 소설 속 경하 역시 5.18 관련 책을 낸 작가로 등장한다.

그 여파로 악몽에 시달리는데, 그 악몽을 현실에서 표현해 보자는 프로젝트를 인선과 함께 하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그 후 경하는 극심한 우울과 무기력함 속에서 세월을 버텨가고 서로 삶의 궤적도 다른 탓에 프로젝트는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충돌할 줄 알았던 소행성이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지구를 비껴 날아가듯이.

반성도, 주저도 없는 맹렬한 속력으로.

그러던 중 인선이 손가락 두 마디를 잃는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향한다.

병원에서 만난 인선이 경하에게 한 부탁은 뜻밖에도 키우던 앵무새를 돌봐달라는 것이었다.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받은 경하는 폭설이 내리는 제주의 한 오지로 떠난다.

그럼...그래야지...라고 습관적으로 대화를 맺는 사람의 탄식하는 말투처럼,

끝이 가까워질수록 정적을 닮아가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눈송이들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없이 사라진다.

인선의 집으로 가던 경하는 실족 사고를 당하는 등 고난 끝에 집에 다다르지만 이미 앵무새는 죽어 있다.

그런데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눈에 보이면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인선의 이야기(인선의 어머니가 겪은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유령이 등장했던 '소년이 온다'처럼 고통스러웠던 역사를 다루면서도 몽환적인 판타지 느낌을 담아내고 있다.

실제로 경하가 만난 인선이 이미 죽은 인선의 유령인지, 죽어가는 경하가 보는 환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상식을 벗어난 존재가 와서 70여 년 전에 있었던 상식을 벗어난 사건을 담담하게 들려줄 뿐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인간이 갖는 공감의 본능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제주에 지인이 있는 것도, 그 사건의 피해자 중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이 겪었던 일들은 결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죽어가는 동생을 위해 자신의 손가락에 피를 내어 동생 입에 흘려주던 언니의 심정을, 언제 죽었는지 기록조차 남지 않은 오빠의 흔적을 쫓는 동생의 심정을, 사건의 트라우마로 실톱을 이불 밑에 넣어놔야만 잠이 드는 어머니를 평생 지켜보며 살아온 딸의 심정을, 그 어느 것도 인생에서 직접 겪어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히 작가의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고는 말 못 하겠다.

타인의 감정은커녕 자신의 감정도 잘 알지 못하는 내가 읽기에는 몰려오는 감정의 양이 너무 커서 읽는 과정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 작품 역시 그저 '빨갱이'를 지향했던 사람으로서 이 사건을 다룬 소설이니 꼭 봐야만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작가의 문장이 가진 힘 때문이었다.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고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러 해당 사건의 당사자들이 모두 잊힌 후에서야 대한민국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절대로 이 사건과 작별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있다.

그 외침을 들은 독자들 역시 국가의 손에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 이 땅에서 더 이상 생겨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지 않을까.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언급하기도 어려운 사건을 시종일관 어두운 분위기로 풀어낸 작품이기에 읽기에도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실감 나게 살려낸 제주의 방언 역시 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진입장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멸공'이라는 단어 없이 서술하기란 불가능할 테고 그중에서도 제주 4.3 사건이 갖는 의미는 굉장히 크기 때문에 이 사건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좋은 독서 경험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역사서는 아니기 때문에 사건의 전후 맥락이나 경과를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기초지식이 좀 있다면 등장인물들의 심정에 공감하기가 보다 쉬울 것 같긴 하다.

누구에게나 쉽게 추천할 작품은 아니지만 읽는다면 후회하지는 않을 작품이라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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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들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
권수경 옮김, 쿠리하라 타케시 외 감수 / 성안당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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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너무 좋아하는 탓에 '간과 술에 대한 모든 궁금증을 간 전문의가 풀어준다'라는 책 소개에 읽을 수밖에 없었던 책이다.

책 배송이 온 날 집사람이 책 표지를 보더니 혀를 쯧쯧 찬다.

집사람은 술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평소 내 음주 습관을 탐탁지 않아 하는데, 나도 일리 있다고 생각해서 집사람 말을 잘 들으려고 하는 편이지만 습관을 바꾼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술을 무조건 끊거나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알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책에서 제시된 하루에 소화 가능한 알코올의 양은 맥주 기준으로 500ml 두 잔 정도이다.

물론 술꾼 치고 500ml 두 잔으로 만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 텐데, 이 책에서는 일주일 단위로 그 양을 관리해 보라고 말한다.

즉, 오늘 맥주를 한 4천 정도 마셨다면 그 주는 음주를 피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알코올 적정 섭취량은 '1일 20g(순 알코올 양)'이다.

허용량은 하루 40g까지이고 일주일 동안 140~280g을 섭취할 수 있도록 컨트롤하면 된다. 이정도 양이면 스스로 판단하여 조정할 수 있으니

간 쉬는 날을 만들어 술을 참을 때 생기는 스트레스도 없을 것이다.

(pg 16)

이는 내 음주 습관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라 일단(?) 안심이 되었다.

체중이 급격히 늘어서 음주 횟수를 주 1-2회 정도로 제한하고 있고 되도록이면 한 번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알코올에 대해서는 조금 관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당질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편이다.

지방간을 초래하는 원인으로 알코올도 조심해야 하지만 당질을 정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단맛이 나는 술의 경우 알코올도 있고 당질도 높기 때문에 더 주의해야 한다.

'당대사'라고 불리는 지방과 당질의 변환 작업은 간이 담당하고 있다.

알코올 분해로 바쁠 때 당대사 업무까지 더해지면 간은 큰 부담을 느끼게 된다.

이런 부담을 덜기 위해서라도 술을 마실 때 당질이 많은 안주를 섭취하는 건 피해야 한다.

(pg 90)

당질이 많은 음식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단맛이 강한 음식들과 밥, 빵, 면 등의 탄수화물이 많은 음식들이 포함된다.

안주로 이와 같은 음식들을 먹으면 간에 더 큰 무리가 가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현대인들의 경우 술을 제외하더라도 당질을 권장 섭취량보다 많이 섭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술 문제뿐 아니라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질 섭취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술을 마실 때 함께 먹는 음식으로 '고단백 저당질'을 꼭 기억하라고 말한다.

단백질은 고기나 생선, 달걀, 콩 등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알코올 분해를 도와주는 비타민 B군까지 포함한 식재료를 추천한다.

구체적으로는 돼지고기, 장어, 가자미, 연어, 방어 등이 있다.

채소 중에서는 당근에 비타민 B군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 중략 -

또한 어패류에 함유된 타우린과 아연에는 간 기능을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으므로

굴이나 백합 조개를 먹는 것도 추천한다.

(pg 76)

물론 알코올에 다소 관대한 시각을 가진 책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을 크게 벗어나진 않고 있다.

2차, 3차가 이어지도록 늦게까지 마시는 것,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시는 것, 술 종류를 이것저것 섞어서 한 번에 마시는 것 등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은 이 책에서도 동일하게 지적하고 있다.

소량으로 적절하게 즐길 때 건강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은 자명하기 때문에 이 책이 음주의 면죄부를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술로 건강을 해친 결과는 오로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책에 '그림으로 읽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을 정도로 도표와 그림이 많은 편이고 전체 페이지도 130페이지가 채 안 되기 때문에 금방 읽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간과 음주 습관에 대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주는 편이기 때문에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보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음주 횟수가 그리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번 먹을 때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많은 양을 마시는 경향이 있어서 횟수는 유지하되 한 번에 마시는 양을 좀 줄이려는 노력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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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1학년을 부탁해 - 개정판 랄랄라 학교생활 1
이서윤 지음, 윤유리 그림 / 풀빛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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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참 빠르다는 생각이야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들게 마련이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이라면 그 체감이 몇 배는 빠른 느낌이다.

나 자신의 늙는 속도도 그렇지만 아이가 커가는 속도를 지켜보는 체감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갓난쟁이를 안고 '이걸 언제 키우나' 했었는데 벌써 1년 후면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다.

아직 취학 전인데 키가 120센티가 넘어가니 그야말로 허우대는 멀쩡한데 아직도 천둥벌거숭이마냥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학교 가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던 중에 아이가 학교에 가기 전에 숙지하면 좋을 내용을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동화로 풀어낸 책이 있어서 아이와 함께 읽어보게 되었다.

부모 입장에서야 이런 책은 아이에게 일부러라도 읽게 하고 싶은데 문제는 아이도 흥미를 느끼느냐가 아닐까 싶다.

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의 아이를 대상으로 한 책이니만큼 영유아 동화책보다는 글씨가 다소 많은 편이지만 서술이 매우 친절하고 동화의 내용도 상당히 재밌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알아야 할 내용들이 잘 수록된 느낌이었다.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야 하고, 새로운 일정에도 적응해야 하는 등 아이에게도 학교란 굉장히 낯선 곳이기 마련인데 아이들이 걱정할 부분들을 미리 읽어봄으로써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기 좋을 것 같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지켜야 할 약속을 스스로 생각해서 적어본다거나, 자신만의 학교 가는 길 약도를 그려보는 등의 활동들도 마련되어 있어서 읽는 동안 아이의 집중력을 유지하기에도 좋았다.

후반부에는 나 같은 초보 부모를 위해 아이가 학교에 가기 전에 해주면 좋을만한 것들을 알려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나 자신이 취학 전에 구구단을 떼고 들어갔던지라 수학을 어디까지 해줘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단순한 덧셈, 뺄셈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한다.

(아이랑 산수 연습하다 혈압 터질 뻔했는데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어 보여서 스스로를 안심시키기로 했다.)

엄청 잘하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 학교 다닐 때 정도만 해주면 좋겠는데 아이를 키우다 보니 그것도 욕심이구나 싶을 때가 많다.

아직 1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고 아이들은 1년 사이에도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하는 만큼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 하지만 워낙 교육열이 특이하게 높은 동네에 살다 보니 남들처럼 이것저것 시켜주지 못하는 형편에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런 부모들의 마음이 다 비슷비슷하게 마련인지 아이와 부모 모두 차분하게 취학 대비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 나와서 개인적으로 반가운 기분이 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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