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런틴 워프 시리즈 4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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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내가 행복한 이유'라는 단편집을 통해 강한 인상으로 남았던 그렉 이건의 장편 소설이다.

작가의 초창기 작품이지만 국내에는 최근에야 번역되어 출간된 모양이다.

상당한 수준의 과학 지식을 훌륭한 스토리 속에 녹여내는 작가인지라 그의 장편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서점에서 보자마자 사서 읽게 되었다.

제목인 쿼런틴(quarantine)은 코로나19 때문에 뉴스에 많이 등장한 단어인데, '격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느 날 지름이 명왕성 궤도보다 두 배나 더 큰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가 태양계를 가둬버린다.

편의상 이를 '버블'이라 불렀고, 이 때문에 태양계 밖에 존재하는 별들은 지구에서 관측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즉 우주가 지구를 '격리'시킨 셈이다.

당연히 과학계는 물론이고 언론과 온갖 사이비 종교들이 내놓는 저마다 다른 해석들이 범람하며 지구는 큰 혼란을 맞게 된다.

하지만 3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버블이 나타났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자 사람들은 버블을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게 된다.

주인공인 '닉'은 버블이 나타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사이비 종교집단의 테러로 아내를 잃은 전직 경찰이자 사립 탐정이다.

어느 날 한 병원에서 지체장애인이 실종돼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조사를 맡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입 부분은 마치 탐정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닉이 찾아야 했던 로라에게 접근하면서 이 사건이 단순한 납치가 아닌 버블의 정체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이 가진 놀라운 점이 드러나는데, 바로 양자역학의 해석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본래의 우주는 양자가 가진 특성인 중첩상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즉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였는데 인간이 나타나면서 한 가지 상태로만 고정되는 상태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이를 '파동함수의 수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로라가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 파동함수를 수축시키지 않고 확산 상태로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확산 상태에 있으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모든 경우의 수를 경험할 수 있고, 이 중 최선의 선택지를 골라 수축하면 그 선택이 바로 현실(과거)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때 선택받지 못한 모든 경우의 수는 그냥 파괴되어 버리는데, 이것이 태양계 바깥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누군가가 지구를 격리한 것이 바로 버블이라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 중 하나가 이 능력을 획득하기 전까지,

우주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을 테니까요.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모든 개연성들이 공존하는 우주.

파동함수는 결코 수축하지 않고 그 대신 점점 더 복잡화되기만 했겠죠. - 중략 -

하지만 본래의 우주가 그토록 다양하고, 그토록 복잡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 일각에서 이것들 모두를 전복시키고,

자기 자신을 창조한 문제의 다양성 자체를 소멸시켜 버린 생물이 진화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pg 207)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설정 중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중요한 것이 또 있는데 바로 모드(mod)의 활용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단어일 텐데 게임에서 모드는 캐릭터의 외형이나 능력치를 수정하는 등 본래의 프로그램에 특정한 변형을 가하는 것이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드 역시 뇌 속에 장착하는 일종의 프로그램이라고 보면 된다.

작품 속 설명으로는 뇌 배선을 변경해 주는 것인데, 설치하고 나면 머릿속에서 이를 불러와 다양한 기능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최근에 읽었던 한 뇌과학 책에서 뇌의 배선 과정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책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미완성인 채로 태어나 각종 감각 기관들에 의해 완성된다고 한다.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참조)

이 작품 속의 모드는 그러한 과정을 단축시키고 감각의 범위를 확대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파동함수의 확산 기능 역시 모드의 형태로 뇌 속에 설치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모드에도 모드의 이름과 기능은 물론이고 제조사명과 가격까지 명시해두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예컨데 '암호 비서(<뉴로컴>, 5,999달러)'라는 식으로 소개가 된다.)

물론 이 모드의 활용을 둘러싼 논란도 작은 비중이지만 다뤄지고 있다.

모든 사람의 뇌는 자연 상태에서도 알아서 배선을 바꿉니다.

모든 사람은 자체적인 이상에 맞춰서 스스로를 형성하려고 합니다.

신경 모드가 그런 일을 실로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실제로 제공해 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

그걸 끔찍하다고 낙인찍을 수 있는 겁니까?

(pg 328-329)

근래에 양자역학과 뇌과학 관련 교양서를 몇 권 읽었었는데 읽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이나 용어 정도라도 익혀둔다면 이 작품을 이해하기도 훨씬 쉽고 재미도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파동함수의 확산과 수축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파동함수가 확산하는 현상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작가가 이 현상이 발생한 경우의 모습을 최선을 다해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글을 잘 따라가다 보면 '아 이런 느낌이구나'하는 시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있는 이 도시가 공존하는 수많은 가능성들의 안개로 분산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있는 존재가 다름 아닌 내 주위 군중들이라는 생각은,

믿기 힘들다기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무의미하다고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낯익은 현실이 제아무리 복잡하고 기괴할 정도로 반직관적인 기반에 입각해 있다 하더라도, 현실은 어디까지나 낯익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러더퍼드가 원자는 거의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발표했을 때,

지면이 예전에 비해 조금이라도 덜 견고해지기라도 했나?

진실 자체는 그 무엇도 변화시키지 않는 법이다.

(pg 218)

존재하는 모든 경우의 수를 찾아낼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 선택을 해야만이 그것이 현실로 확정이 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닉 역시 어려운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지만 그 선택을 피할 방법은 없다.

어찌 되었든 우리 인간은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살도록 진화했고, 과거는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택을 하고, 그 결과 단 하나의 고유 상태만 살아남게 돼.

그건 비극이 아냐.

그건 우리들의 존재 그 자체이고,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방식이야.

(pg 415)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분명 아니겠지만 취향만 맞다면 엄청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다 읽고 나면 자신의 상상력의 한계가 조금은 넓어진 것 같은 느낌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렉 이건이 왜 '작가들의 작가', '현존하는 최고의 SF작가'라는 칭송을 받는지도 이 책을 통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작가의 작품들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지는 않았는데 모쪼록 다른 작품들도 빨리 한국어로 만나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사실을 말하지만, <버블>은 결코 인류를 가뒀던 적이 없다.

단지 인류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도록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갇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무한대의 자유라는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강제로 직면해야 했기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pg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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