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읽은 '내가 행복한 이유'라는 단편집을 통해 강한 인상으로 남았던 그렉 이건의 장편 소설이다.
작가의 초창기 작품이지만 국내에는 최근에야 번역되어 출간된 모양이다.
상당한 수준의 과학 지식을 훌륭한 스토리 속에 녹여내는 작가인지라 그의 장편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서점에서 보자마자 사서 읽게 되었다.
제목인 쿼런틴(quarantine)은 코로나19 때문에 뉴스에 많이 등장한 단어인데, '격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느 날 지름이 명왕성 궤도보다 두 배나 더 큰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가 태양계를 가둬버린다.
편의상 이를 '버블'이라 불렀고, 이 때문에 태양계 밖에 존재하는 별들은 지구에서 관측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즉 우주가 지구를 '격리'시킨 셈이다.
당연히 과학계는 물론이고 언론과 온갖 사이비 종교들이 내놓는 저마다 다른 해석들이 범람하며 지구는 큰 혼란을 맞게 된다.
하지만 3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버블이 나타났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자 사람들은 버블을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게 된다.
주인공인 '닉'은 버블이 나타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사이비 종교집단의 테러로 아내를 잃은 전직 경찰이자 사립 탐정이다.
어느 날 한 병원에서 지체장애인이 실종돼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조사를 맡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입 부분은 마치 탐정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닉이 찾아야 했던 로라에게 접근하면서 이 사건이 단순한 납치가 아닌 버블의 정체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이 가진 놀라운 점이 드러나는데, 바로 양자역학의 해석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본래의 우주는 양자가 가진 특성인 중첩상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즉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였는데 인간이 나타나면서 한 가지 상태로만 고정되는 상태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이를 '파동함수의 수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로라가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 파동함수를 수축시키지 않고 확산 상태로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확산 상태에 있으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모든 경우의 수를 경험할 수 있고, 이 중 최선의 선택지를 골라 수축하면 그 선택이 바로 현실(과거)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때 선택받지 못한 모든 경우의 수는 그냥 파괴되어 버리는데, 이것이 태양계 바깥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누군가가 지구를 격리한 것이 바로 버블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