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선의 집으로 가던 경하는 실족 사고를 당하는 등 고난 끝에 집에 다다르지만 이미 앵무새는 죽어 있다.
그런데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눈에 보이면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인선의 이야기(인선의 어머니가 겪은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유령이 등장했던 '소년이 온다'처럼 고통스러웠던 역사를 다루면서도 몽환적인 판타지 느낌을 담아내고 있다.
실제로 경하가 만난 인선이 이미 죽은 인선의 유령인지, 죽어가는 경하가 보는 환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상식을 벗어난 존재가 와서 70여 년 전에 있었던 상식을 벗어난 사건을 담담하게 들려줄 뿐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인간이 갖는 공감의 본능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제주에 지인이 있는 것도, 그 사건의 피해자 중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이 겪었던 일들은 결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죽어가는 동생을 위해 자신의 손가락에 피를 내어 동생 입에 흘려주던 언니의 심정을, 언제 죽었는지 기록조차 남지 않은 오빠의 흔적을 쫓는 동생의 심정을, 사건의 트라우마로 실톱을 이불 밑에 넣어놔야만 잠이 드는 어머니를 평생 지켜보며 살아온 딸의 심정을, 그 어느 것도 인생에서 직접 겪어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히 작가의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고는 말 못 하겠다.
타인의 감정은커녕 자신의 감정도 잘 알지 못하는 내가 읽기에는 몰려오는 감정의 양이 너무 커서 읽는 과정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 작품 역시 그저 '빨갱이'를 지향했던 사람으로서 이 사건을 다룬 소설이니 꼭 봐야만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작가의 문장이 가진 힘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