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떠나온 세계 (2주년 기념 리커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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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러 작품들이 출간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는 SF 작가라는 지인의 추천으로 읽게 된 김초엽 작가의 책이다.

저자가 상당히 어린 편인데 이미 여러 작품이 출간되었을 정도로 화제인 모양이다.

이번에 읽은 작품은 저자의 SF 단편집으로 총 7편이 수록되어 있다.

SF 작품들을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소재가 너무 허황되거나 전개가 유치한 작품들을 매우 싫어하는데 다행히 처음 접하는 작가의 작품들이었지만 수록된 7편 모두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e북으로 읽었는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서 발췌문에 페이지를 표기하지 못했다.)

책을 처음 열면 '최후의 라이오니'라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멸망해가는 기계 행성으로 향한 한 소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계들이 더 이상 스스로 유지 보수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어 버린 행성에 버림받은 채 서서히 몰락해가고 있고, 인류는 이미 그곳을 떠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보통 기계의 수명이 인간보다 길다고 설정하기 때문에 '바이센테니얼 맨'처럼 기계가 사람을 떠나보내는 작품은 많았지만 이 작품은 기계의 마지막을 떠나보내는 인류를 상상함으로써 참신한 느낌을 주었다.

이어지는 '마리의 춤'에서는 특정한 장애를 지닌 계층이 특수한 기기를 통해 서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스타크래프트에 익숙하다면 시각 장애인들만 공유할 수 있는 칼라가 있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를 상상하면 된다.)

당연히 두 계층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서로 구분되어 살아가고, '마리'는 이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오래도록 준비한 테러를 감행한다.

테러 이후 나누어지는 여론과 결과들을 꽤나 사실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인상적이었고, SF 소재에 신체적 결함으로 인한 차별 문제를 잘 녹여낸 작품이었다.

다음 수록작인 '로라'에서는 '신체통합정체성장애'라는, 자신이 인지하는 신체와 실제의 신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의 극단적인 사례가 등장한다.

실제로 이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적이 있어서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종종 올라왔었는데 그때마다 '장애 호소인'이냐며 비아냥대거나, 진짜 장애인들을 모욕하는 행위라며 비난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물론 정신적인 문제인지라 해당 질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 반드시 '이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 저자는 '우리가 비록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그들을 배척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네가 떠나면 난 아주 슬플 거야. 너를 사랑하는 일은 나를 기쁘게 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어."

'로라' 中

그 밖에도 후각 정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미래 세대의 인류를 다룬 '숨 그림자', 모든 구성원이 공유하는 거대한 클라우드 같은 지식의 공간을 상상한 '인지 공간' 등의 작품에서도 SF적인 상상력에 '소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섞어놓고 있어서 저자가 '소수자 문제'에 애정과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다.


[어떻게 그걸 확신해? 어차피 우린 다 비슷한 본성을 지녔어. 어떤 세계가 너를 받아주는 게 아니야.

그저 그곳에 너를 받아주는 어떤 사람이 있는 거야.]

'숨 그림자' 中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오래된 협약'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행성은 행성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인 곳으로 그 속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외계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DC 세계관에 익숙하다면 그린 랜턴인 '모고'를 떠올리면 된다.)

이 행성의 인류는 대기 속 특정 물질 때문에 30년도 못 되는 수명을 지닌 채 살아가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행성 곳곳에 존재하는 특정 물질을 섭취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이 물질을 신성시하면서 절대 손상하거나 훼손하지 않는 문화를 고집하고, 지구에서 온 인류는 이 관습을 이해하지 못한 채 떠나고 만다.

처음에는 나 역시 '맹목적인 종교적 관습 유지'를 비판하는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그 안에는 보다 숭고한 약속이 숨어 있었다.

“신도 금기도 없지. 오직 약속만이 있단다.”

'오래된 협약' 中

마지막으로 시간 개념이 개체마다 다를 수 있다는 상상력을 전개시킨 '캐빈 방정식'이 수록되어 작품의 대미를 장식한다.

일부 인터넷 위키 페이지에 저자가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다고 소개되어 있어서 작품이 '정치적 올바름(PC)'으로 떡칠되어 있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읽어본 소감으로는 주인공들이 여성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PC스럽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저자가 주목하는 '소수'에 대한 부분도 현재의 성소수자나 장애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SF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창조해낸 세상에서의 소수자들을 상정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 불쾌한 부분은 없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는 빨갱이라 서사가 엉망인 것이 아니면 이러한 부분을 본질적으로 싫어하지는 않는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모두 매력적이고 문장도 간결해서 읽는 내내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의 인생 경험이 작품의 퀄리티와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 같다.

저자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더 유명한 것 같은데 이 책 역시 빨리 읽어보고 싶어진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책인데, 나는 그 지인에게 '테드 창'의 저작을 알려드렸으니 서로가 좋은 작가를 한 명씩 더 알게 된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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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알고, 바로 쓰는 빵빵한 어린이 한국 위인 1 : 전근대편 우리 아이 빵빵 시리즈 10
이건홍 지음, 박빛나 그림 / 유앤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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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부터 영어까지 아이들에게 주로 언어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해주던 '우리 아이 빵빵 시리즈'에서 한국 위인 편이 나왔다고 하길래 아이와 함께 읽어보게 되었다.

보통 아이가 재미있어하는 책 치고 부모 마음에도 드는 책은 그렇게 많지 않은데 이 책은 전달하는 지식의 수준이나 양이 적지 않은데도 재미가 있어서 그런지 아이도 정말 좋아하는 시리즈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좋아한다.

물론 아직은 그림이 없는 책은 잘 읽으려 하지 않지만 그래도 아이가 새 책이 오면 기뻐하고 한동안 그 책만 읽고 또 읽고 하는 모습을 보면 부모로서 뿌듯하게 마련이다.



아이가 요즘 만화로 된 역사책들을 많이 접하고 있어서 책에 나오는 위인들이 그리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귀여운 '빵빵' 캐릭터들도, 그들의 소소한 이야기들도 여전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재미있게 만화를 읽으면서 위인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1편은 '전근대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단군왕검부터 시작해 흥선대원군까지를 다루고 있다.

국가로 치면 고조선부터 조선까지 다루는 것이니 사실상 일제강점기 이후의 근현대사를 제외한 대한민국 역사 전체를 다룬다고 보면 되겠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아이들이 알법한 독립운동가나 정치가 등 위인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분들은 2권에서 다루지 않을까 싶다.

동양 위인, 서양 위인 등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이어질 수 있는 시리즈여서 한국 위인 다음에 어떤 콘텐츠로 돌아올지도 기대가 된다.

처음 이런 책을 접하면 아이가 그림만 보고 텍스트는 깊이 읽지 않는 것 같아 걱정하는 부모도 있을 것 같은데, 비록 그림만이라도 책을 보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면 같은 책을 여러 번 들춰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용을 달달 외우는 아이를 발견하게 될 테니 그리 걱정 마시라는 조언을 남기고 싶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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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금서 - 개정판
김진명 지음 / 새움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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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대한민국의 '한'이라는 글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이다.

물론 역사서가 아닌 소설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고 '우리나라의 진짜 역사는 이랬구나' 하고 이해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작품은 미진이라는 한 여교수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별다른 상처도 없이 너무도 평온하게 사서삼경에 목이 메어 죽은 채 발견되는데 경찰은 이를 단순한 자살로 보고 사건을 마무리하려 한다.

하지만 미진의 친구였던 과학자 정서는 그 죽음에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보고 사건의 진상을 쫓게 된다.

앞 부분 줄거리만 보면 마치 스릴러 소설 같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부정하려는 중국의 계략이 있었고 이를 추적하던 은원이라는 역사학자가 숨겨져 있던 역사적 진실을 밝혀낸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배경에 제목 그대로 지배계층에서 너무도 싫어해 그 씨를 말려버렸다는 '씨성본결'이라는 책이 등장한다.

각 성씨의 근원을 밝혀둔 책으로 묘사되는데 그러다 보니 소수민족들이 읽을 경우 자신들의 뿌리를 알 수 있어 각종 반란의 원인이 되니 지배계층이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정이다.

이 책이 있었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근원이 되는 '한'이라는 국가도 손쉽게 증명할 수 있었을 텐데 이 책은 이미 사라진 후라는 설정인지라 은원과 정서는 중국 여기저기를 누비며 이런저런 다른 증거들을 수집하게 된다.

작가의 작품답게 이 책 역시 문장이 쉽고 전개가 빨라서 읽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다만 작품이 그리 재미있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단 전개가 너무 '극적'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주인공 보정'이 너무 심해서 현실감이 다소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재 측면에서도 워낙 '국뽕' 콘텐츠를 싫어하기도 하거니와 굳이 고대의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큰 나라를 세웠었다는 것에 집착하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 작품에서 설명하는 역사가 설령 나중에 사실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조상들의 영토를 채 지켜내지도 못한 못난 후손들이 될 뿐이지 않은가.

이집트의 역사가 매우 찬란하고 위대하긴 하지만 현재의 이집트인들을 보고 '이집트에 살아서 좋겠다'라던가 '이집트인으로 태어나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그리 많을 것 같지 않듯이 과거의 찬란함이 현재를 더 비루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과 국가라는 것 역시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더 커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의 저작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닌데 솔직히 작가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다만 워낙 유명한 작품들이 많아서 읽어는 보자는 심리로 작품을 접하고 있는데 현실과는 다르기 때문에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일부 있기는 하나, 개인적으로 대체 현실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작품들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들이 많기 때문에 다른 작품들을 더 접해봐야 작가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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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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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저자의 책을 몇 권째 읽었는지 세는 것도 잊어버린 작가.

개중에는 분명 읽고 서평도 남겼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가물가물한 작품도 있는 반면에 비교적 오래전에 읽었음에도 줄거리가 선명하게 기억나는 작품도 있다.

이 작품은 후자에 속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내 기억력을 요즘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고 있어서 확신은 못하겠다.)

그의 작품답게 이 책에서도 누군가의 죽음이 있었다.

그것도 곧 공소시효가 종료되는 사건의 죽음이다.

그리고 그 죽음의 유력한 용의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 한 유부남의 이야기다.

처음에는 유부남이면서도 상대에게 끌리는 자신을 멈추지 못하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배우자에게 거짓말을 하며 관계를 이어가다 결국 가정을 포기하려는 순간까지 오게 되지만 그 와중에 사건을 알게 되고 상대가 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점차 긴장을 더해간다.

경계선 너머에 눈알이 핑핑 돌 만큼 감미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영원히 그것을 넘지 않을 수 있을까.

경계선 위에 벽 따위는 없고 한 걸음만 가볍게 내디디면 된다는 것을 알아 버린 지금,

그것은 비현실적이고도 불가능한 일이다.

(pg 80-81)

사실 중반까지도 작품에 그리 몰입을 못했다.

개인적으로 불륜, 바람 이런 소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불륜이나 바람의 자극적인 측면은 좋은데 인물들이 거짓말을 이어가며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심리상태를 못 견뎌하는 것 같다.(같은 이유로 드라마도 잘 못본다.)

태생적으로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그런 미묘한 긴장 상태를 구태여 계속 유지하면서 또 다른 거짓을 계속 만들어가는 인물이 못 견디게 불편하다.(그 악명 높은 INTP라서 고작 그런 걸로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잘 안된다.)

그래서 저자의 작품 치고는 읽는데 시간이 꽤 걸린 느낌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 작품은 그렇게까지 오래 기억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결말부를 읽는 순간 이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오래된 작품이기는 하나 스포일러를 남기고 싶진 않아서 결말까지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정말 상상도 못한 결말이어서 기억에 상당히 오래 남을 것 같다.

저자의 책을 꽤 많이 읽은 편이지만 결말의 충격 강도는 읽은 작품 중에서 손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전반적으로 조금 몰입이 어려웠던 중반부를 지나 인상적인 결말까지 불륜과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불편할 정도로 꽤나 현실감 있게 풀어내고 있다.

뒤에 사족이 살짝 붙었다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독자들이 추가적인 의문을 느낄 여지가 없게끔 깔끔하게 잘 끝났다고 생각한다.

불륜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 과정에서의 짜릿함을 대리 체험할 수 있게 해두었지만 끝까지 읽어보면 역시나 그렇게 살지 말라는 저자의 강렬한 메시지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읽을 때마다 평타 이상의 재미를 주는 작가이면서도 아직도 읽을 작품이 많다는 것이 이 작가의 최대 장점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도 몇 권이나 더 읽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리 지겹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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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와 프랑스혁명 - 베르사유와 프랑스혁명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3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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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라는 책을 읽고 '역사책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작품은 프랑스혁명 이야기를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한 인물의 시각으로 소설처럼 풀어낸 작품이다.

프랑스혁명을 그저 연대기 정도로만 공부했던지라 저자가 이 거대한 사건을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풀어줄지 기대가 컸다.

역사란 거미줄처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다.

(pg 28)

지금까지 여러 매체에서 다루어진 그녀의 삶을 '파란만장'이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오스트리아 여제의 딸로 태어나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한 정략결혼으로 프랑스에 입성하게 되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십 대 중반에 불과했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 생전 처음 간 나라에서 차기 여왕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매일 차려지는 진수성찬과 값비싼 옷, 수많은 하인들과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귀족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운명은 그녀를 너무 일찍이 잘못 길들여놓았다.

노력하지 않아도 항상 더 높은 자리를 얻었기에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모든 것은 당연했다.

(pg 189)

저자는 이러한 그녀의 삶을 철저하게 그녀의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놀라운 점은 저자가 역사적 사실을 철저히 준용하면서도 그 사실들 간의 빈 공간을 저자 특유의 멋진 문장들로 채워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남아있는 역사적 기록들을 통해 인물의 성격을 파악해 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공화정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씻겨 내려간 왕정이라는 구시대의 유물 속 인물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저자는 무능했던 왕 루이 16세 곁에서 철없는 젊음을 누렸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양가적인 감정으로 바라본다.

그녀는 어리석은 청춘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온 세상 사람들도 모두 즐겁고 근심이

없으려니 여겼다. 유리로 만들어진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20년 동안이나

진정한 민중과 진정한 파리를 그저 지나치기만 한 것이다.

(pg 50)

읽다 보면 루이 16세의 철저한 무능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욕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물론 그의 무능이 발단이 되어 인류사에 길이 남을 혁명을 탄생시켰지만 그의 악명은 부인의 악명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한 것처럼 느껴진다.

분명 왕정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사라질 운명이었지만 그럼에도 프랑스 민중들은 그 원인을 자신들의 핏줄이었던 루이 16세에서 찾기보다는 외국에서 건너온 왕비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재판에서는 그 어떤 '정의'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자유의 여신상은 인간들의 삶과 죽음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사람들의 비명도, 무릎에 놓인 화환도, 발아래 대지를 물들이는 피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이름 아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보이지 않는 목표를 바라보며 침묵할 뿐이다.

(pg 315)

그녀의 삶이 지금까지도 오래 기억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토록 드라마틱한 낙폭에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쭉 잘 살아온 사람이나 쭉 못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개천에서 난 용 이야기나 용으로 태어났지만 뱀은커녕 지렁이도 되지 못한 최후에는 관심이 있다.

그녀의 삶이 후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한 국가의 왕비가 되어 크나큰 부와 권력을 얻었지만 짧은 생애 동안 그 모두를 철저하게 잃어버린 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버린 삶.

인간은 불행 속에서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

(pg 190)

물론 프랑스혁명이 그 자체로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혁명 이후 극심한 혼란이 이어졌고 나폴레옹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을 앞으로도 길이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는 보다 넓은 자유와 평등,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인류의 위대한 비전을 전 세계에 선포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빵 한 조각도 먹을 수 없다면,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진 자가 있다는 뜻이다.

의무에 짓눌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권리를 군림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pg 143)

그 위대한 여정에서 사라져 간 구시대의 전형이었던 한 여인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가.

저자가 양가적인 감정으로 책을 썼던 것처럼 읽는 독자들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지배계층으로서 굶어 죽어가는 민중들을 돌아보지 못한 책임은 막중하나, 어린 나이에 타국으로 파견되어 제멋대로 왕비라고 떠받드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냈던 그녀를 그저 비난만 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다.

사람이 역사를 만들기도 하지만 역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미 모든 일이 끝난 후에, 결말을 알고 있는 시점에서 어떤 일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pg 159)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사랑받는 한, 어떤 인간도 완전히 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할 수 없다.

(pg 319)

워낙 드라마틱한 사건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프랑스혁명과 마리 앙투아네트는 계속해서 사람들의 관심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사료들이 추가되고 대중들의 인식이 변화하면서 그녀에 대한 평가도 계속해서 바뀌어 가겠지만 이 책이 그러한 작업의 첫 단추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을 것 같다.

저자 특유의 멋진 문장과 탁월한 전개 덕분에 꽤나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다.

세 번째 읽은 저자의 책이었고 그 세 책을 모두 좋아하지만 이번 작품이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았다고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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