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떠나온 세계 (2주년 기념 리커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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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러 작품들이 출간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는 SF 작가라는 지인의 추천으로 읽게 된 김초엽 작가의 책이다.

저자가 상당히 어린 편인데 이미 여러 작품이 출간되었을 정도로 화제인 모양이다.

이번에 읽은 작품은 저자의 SF 단편집으로 총 7편이 수록되어 있다.

SF 작품들을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소재가 너무 허황되거나 전개가 유치한 작품들을 매우 싫어하는데 다행히 처음 접하는 작가의 작품들이었지만 수록된 7편 모두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e북으로 읽었는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서 발췌문에 페이지를 표기하지 못했다.)

책을 처음 열면 '최후의 라이오니'라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멸망해가는 기계 행성으로 향한 한 소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계들이 더 이상 스스로 유지 보수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어 버린 행성에 버림받은 채 서서히 몰락해가고 있고, 인류는 이미 그곳을 떠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보통 기계의 수명이 인간보다 길다고 설정하기 때문에 '바이센테니얼 맨'처럼 기계가 사람을 떠나보내는 작품은 많았지만 이 작품은 기계의 마지막을 떠나보내는 인류를 상상함으로써 참신한 느낌을 주었다.

이어지는 '마리의 춤'에서는 특정한 장애를 지닌 계층이 특수한 기기를 통해 서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스타크래프트에 익숙하다면 시각 장애인들만 공유할 수 있는 칼라가 있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를 상상하면 된다.)

당연히 두 계층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서로 구분되어 살아가고, '마리'는 이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오래도록 준비한 테러를 감행한다.

테러 이후 나누어지는 여론과 결과들을 꽤나 사실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인상적이었고, SF 소재에 신체적 결함으로 인한 차별 문제를 잘 녹여낸 작품이었다.

다음 수록작인 '로라'에서는 '신체통합정체성장애'라는, 자신이 인지하는 신체와 실제의 신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의 극단적인 사례가 등장한다.

실제로 이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적이 있어서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종종 올라왔었는데 그때마다 '장애 호소인'이냐며 비아냥대거나, 진짜 장애인들을 모욕하는 행위라며 비난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물론 정신적인 문제인지라 해당 질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 반드시 '이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 저자는 '우리가 비록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그들을 배척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네가 떠나면 난 아주 슬플 거야. 너를 사랑하는 일은 나를 기쁘게 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어."

'로라' 中

그 밖에도 후각 정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미래 세대의 인류를 다룬 '숨 그림자', 모든 구성원이 공유하는 거대한 클라우드 같은 지식의 공간을 상상한 '인지 공간' 등의 작품에서도 SF적인 상상력에 '소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섞어놓고 있어서 저자가 '소수자 문제'에 애정과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다.


[어떻게 그걸 확신해? 어차피 우린 다 비슷한 본성을 지녔어. 어떤 세계가 너를 받아주는 게 아니야.

그저 그곳에 너를 받아주는 어떤 사람이 있는 거야.]

'숨 그림자' 中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오래된 협약'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행성은 행성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인 곳으로 그 속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외계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DC 세계관에 익숙하다면 그린 랜턴인 '모고'를 떠올리면 된다.)

이 행성의 인류는 대기 속 특정 물질 때문에 30년도 못 되는 수명을 지닌 채 살아가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행성 곳곳에 존재하는 특정 물질을 섭취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이 물질을 신성시하면서 절대 손상하거나 훼손하지 않는 문화를 고집하고, 지구에서 온 인류는 이 관습을 이해하지 못한 채 떠나고 만다.

처음에는 나 역시 '맹목적인 종교적 관습 유지'를 비판하는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그 안에는 보다 숭고한 약속이 숨어 있었다.

“신도 금기도 없지. 오직 약속만이 있단다.”

'오래된 협약' 中

마지막으로 시간 개념이 개체마다 다를 수 있다는 상상력을 전개시킨 '캐빈 방정식'이 수록되어 작품의 대미를 장식한다.

일부 인터넷 위키 페이지에 저자가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다고 소개되어 있어서 작품이 '정치적 올바름(PC)'으로 떡칠되어 있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읽어본 소감으로는 주인공들이 여성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PC스럽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저자가 주목하는 '소수'에 대한 부분도 현재의 성소수자나 장애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SF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창조해낸 세상에서의 소수자들을 상정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 불쾌한 부분은 없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는 빨갱이라 서사가 엉망인 것이 아니면 이러한 부분을 본질적으로 싫어하지는 않는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모두 매력적이고 문장도 간결해서 읽는 내내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의 인생 경험이 작품의 퀄리티와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 같다.

저자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더 유명한 것 같은데 이 책 역시 빨리 읽어보고 싶어진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책인데, 나는 그 지인에게 '테드 창'의 저작을 알려드렸으니 서로가 좋은 작가를 한 명씩 더 알게 된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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