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와 프랑스혁명 - 베르사유와 프랑스혁명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3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라는 책을 읽고 '역사책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작품은 프랑스혁명 이야기를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한 인물의 시각으로 소설처럼 풀어낸 작품이다.

프랑스혁명을 그저 연대기 정도로만 공부했던지라 저자가 이 거대한 사건을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풀어줄지 기대가 컸다.

역사란 거미줄처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다.

(pg 28)

지금까지 여러 매체에서 다루어진 그녀의 삶을 '파란만장'이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오스트리아 여제의 딸로 태어나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한 정략결혼으로 프랑스에 입성하게 되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십 대 중반에 불과했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 생전 처음 간 나라에서 차기 여왕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매일 차려지는 진수성찬과 값비싼 옷, 수많은 하인들과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귀족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운명은 그녀를 너무 일찍이 잘못 길들여놓았다.

노력하지 않아도 항상 더 높은 자리를 얻었기에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모든 것은 당연했다.

(pg 189)

저자는 이러한 그녀의 삶을 철저하게 그녀의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놀라운 점은 저자가 역사적 사실을 철저히 준용하면서도 그 사실들 간의 빈 공간을 저자 특유의 멋진 문장들로 채워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남아있는 역사적 기록들을 통해 인물의 성격을 파악해 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공화정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씻겨 내려간 왕정이라는 구시대의 유물 속 인물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저자는 무능했던 왕 루이 16세 곁에서 철없는 젊음을 누렸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양가적인 감정으로 바라본다.

그녀는 어리석은 청춘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온 세상 사람들도 모두 즐겁고 근심이

없으려니 여겼다. 유리로 만들어진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20년 동안이나

진정한 민중과 진정한 파리를 그저 지나치기만 한 것이다.

(pg 50)

읽다 보면 루이 16세의 철저한 무능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욕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물론 그의 무능이 발단이 되어 인류사에 길이 남을 혁명을 탄생시켰지만 그의 악명은 부인의 악명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한 것처럼 느껴진다.

분명 왕정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사라질 운명이었지만 그럼에도 프랑스 민중들은 그 원인을 자신들의 핏줄이었던 루이 16세에서 찾기보다는 외국에서 건너온 왕비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재판에서는 그 어떤 '정의'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자유의 여신상은 인간들의 삶과 죽음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사람들의 비명도, 무릎에 놓인 화환도, 발아래 대지를 물들이는 피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이름 아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보이지 않는 목표를 바라보며 침묵할 뿐이다.

(pg 315)

그녀의 삶이 지금까지도 오래 기억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토록 드라마틱한 낙폭에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쭉 잘 살아온 사람이나 쭉 못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개천에서 난 용 이야기나 용으로 태어났지만 뱀은커녕 지렁이도 되지 못한 최후에는 관심이 있다.

그녀의 삶이 후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한 국가의 왕비가 되어 크나큰 부와 권력을 얻었지만 짧은 생애 동안 그 모두를 철저하게 잃어버린 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버린 삶.

인간은 불행 속에서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

(pg 190)

물론 프랑스혁명이 그 자체로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혁명 이후 극심한 혼란이 이어졌고 나폴레옹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을 앞으로도 길이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는 보다 넓은 자유와 평등,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인류의 위대한 비전을 전 세계에 선포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빵 한 조각도 먹을 수 없다면,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진 자가 있다는 뜻이다.

의무에 짓눌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권리를 군림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pg 143)

그 위대한 여정에서 사라져 간 구시대의 전형이었던 한 여인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가.

저자가 양가적인 감정으로 책을 썼던 것처럼 읽는 독자들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지배계층으로서 굶어 죽어가는 민중들을 돌아보지 못한 책임은 막중하나, 어린 나이에 타국으로 파견되어 제멋대로 왕비라고 떠받드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냈던 그녀를 그저 비난만 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다.

사람이 역사를 만들기도 하지만 역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미 모든 일이 끝난 후에, 결말을 알고 있는 시점에서 어떤 일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pg 159)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사랑받는 한, 어떤 인간도 완전히 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할 수 없다.

(pg 319)

워낙 드라마틱한 사건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프랑스혁명과 마리 앙투아네트는 계속해서 사람들의 관심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사료들이 추가되고 대중들의 인식이 변화하면서 그녀에 대한 평가도 계속해서 바뀌어 가겠지만 이 책이 그러한 작업의 첫 단추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을 것 같다.

저자 특유의 멋진 문장과 탁월한 전개 덕분에 꽤나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다.

세 번째 읽은 저자의 책이었고 그 세 책을 모두 좋아하지만 이번 작품이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았다고 기억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