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똥을 알아? 웅진 우리그림책 94
이혜인 지음 / 웅진주니어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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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신체 분비물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과 반응은 정말 대단하다.

우리 아이뿐 아니라 이 주제에 관심이 없는 아이를 난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특정 시기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관심이지만 미취학 아동이라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책이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라는 옛 CF가 생각나는 제목.

제목답게 똥 이야기이긴 한데 특이하게도 똥들이 다 인격화되어 등장하고 있다.

신체에서 똥이 생성되는 과정은 물론이고 어떻게 배출되는지, 배출된 후 어떻게 되는지를 인격화된 수많은 똥들이 등장해 알려주는 책이다.

아이에게 읽어주다 느낀 건데 저자가 우리 세대인 모양이다.

책에 등장하는 유머 코드나 드립들이 약간 우리 세대 느낌이 난다.

그래서인지 보통 유아용 책은 읽어줄 때 어른인 나는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나도 피식 웃으면서 읽어줄 수 있었다.

아래 그림에서 보이듯이 이제 똥이 될 음식이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라며 자조적인 미소를 띠는 장면도 그렇고, 책 뒷 표지에 각종 똥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허세샷 같은 모습을 그려놓은 것도 깨알 같은 웃음을 자아냈다.

그 밖에도 다 찍어 올릴 수 없을 만큼 유머러스한 부분들이 꽤 많다.



(pg 3)



책 뒷표지 중 일부

역시나 아이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보통 새 책을 쥐여주면 누군가가 같이 읽어주기 전에는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는데 이 책은 받자마자 본인이 열심히 넘겨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본문은 글자가 그리 많지 않은데 등장하는 똥들이 하는 드립들이 꽤 많아서 소리 내어 읽기에 시간은 제법 걸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드립들이 꽤나 웃기기 때문에 읽어주는 부모는 물론이고 듣는 아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인간의 배설물이라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소재를 다루지만 귀여운 그림체와 재미난 글로 아이들에게 건강한 배설의 중요성을 흥미롭게 일깨워줄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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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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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400페이지 정도 되는 두께의 책을 평일 저녁 식사 이후부터 읽기 시작해 지금쯤 다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은 히가시노 게이고 책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의 글이 쉽게 읽힌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재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이 작품 역시 초반에 누군가가 살해되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추리소설이다.

추리소설에도 여러 스타일이 있지만 이 작품은 '누가' 죽였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왜' 죽였는지에 집중하는 작품이라 보면 된다.

그간 작가가 자주 시도했던 방식이라 그의 작품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범인이 총 9챕터 중 3챕터에서 이미 밝혀지고 범인을 알아내는 것 자체가 독자에게도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동기를 밝혀내는 부분에서 상당히 많은 트릭이 숨어 있고 이를 담당 형사인 '가가 교이치로'라는 인물이 하나하나 들춰내는 것이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스포를 당하면 재미가 상당히 반감될 수밖에 없는지라 읽은 사람 입장에서도 최대한 스토리 이야기는 지양하려 한다.

이 작품이 '가가 교이치로'라는 형사가 등장하는 총 10개의 작품 중 하나라 하는데, 다른 작품을 접한 경험이 전무한 나도 작품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 아무 사전지식 없이 읽는 편이 가장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이한 점이라면 그의 소설에서는 흔히 보기 힘들었던 시점의 차이였다.

보통 일반적인 현재 시점에서 관찰하듯이 서술되었던 그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번 작품은 범인과 형사가 남긴 기록물 형태의 시점으로 소설이 전개된다.

책 후미의 해설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기록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록한 자의 주관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과거'의 시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관찰하고 있는 것도 현실에서는 주의 집중 여부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겠지만 소설에서 등장인물이 현재 관찰하고 있는 바를 의도적으로 속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기록이라면 기록하는 자가 '어떤 부분을 읽히고 싶어 하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편집이 가능하다.

이 작품 역시 이러한 기록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트릭을 마련해 두었는데,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를 파헤쳐 가며 읽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라 생각한다.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반전은 극적일 수는 있지만 누군지 예측하는 순간 다소 뻔해진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에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반전은 극적인 면은 덜해도 예측이 어려워 신선하게 다가온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누구나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에서 묘사하는 바에 따라 등장인물의 이미지를 상상하며 읽게 될 텐데(착한 놈은 선한 이미지로, 나쁜 놈은 표독스러운 이미지로 등등) 동기가 하나하나 밝혀질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이미지가 휙휙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제목이 상당히 직설적이라는 점도 작가의 작품들이 가지는 공통점인 모양이다.

이 책도 제목처럼 인간의 순수한 악의(?)가 어디까지 향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별생각 없이 봤던 표지도 다 읽고 나면 키보드 사이로 피어오른 독버섯이 책의 줄거리를 함축적으로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족이지만 띠지에 있는 옮긴이의 추천사가 작품의 스포를 담고 있다.

물론 다 읽은 다음에야 눈에 들어올법한 문구지만 작품의 진정한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띠지 같은 건 사자마자 버리고 읽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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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 - 우리의 자화상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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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책에 실린 성역화된 PC에 대한 비판을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이번에 나온 '반지성주의'에서는 우리나라의 어떤 현실을 지적하고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반지성주의는 좌우를 막론하고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상대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며 상대를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다.

저자는 '반지성주의'의 역사를 미국과 일본 사례를 통해 간략히 요약한 뒤 아직 이 단어에 대한 정의가 학계에서 명확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언급한다.

그러면서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나는 그런 두 가지 전제와 더불어 반지성주의를

'이성적, 합리적 소통을 수용하지 않는 정신 상태나 태도'로 정의하면서

그 3대 요소로 신앙적 확신, 성찰 불능, 적대적 표현을 제시하고자 한다.

(pg 33)

역사적으로 '지성'이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출발한 반감이 반지성주의의 토대가 된다.

문제는 이 양상이 인터넷을 통한 정보 습득과 맞물리면서 자신이 지지하는 의견에만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상대의 논리는 '무식해서' 생겨난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대깨문'이나 '수구꼴통'을 외치는 사람들이 상대를 논쟁의 대상이 아닌 계몽의 대상으로 인식하면서 반지성주의적 현상들이 퍼져나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미국 작가 수전 제이코비는 '반지성주의 시대(2018)'라는 책에서

"오늘날 미국에서는 지식인과 비지식인 모두가 똑같이, 좌파건 우파건,

자신의 주장에 공명하지 않는 목소리는 모조리 듣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며

"이런 외고집은 게으른 정신과 빈지성주의의 본질을 드러내는 징후다."라고 말한다.

(pg 9-10)

저자는 이 현상의 산물로 여야를 골고루 예로 들며 까주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마지막까지 높았던 이유로 탁현민의 이미지 정치 전략을 분석하며 비판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성찰을 하는 대신 문제를 감추거나 호도하는 '이미지 연출'에 집착했던

심리의 바탕엔 자신들만이 선하고 정의롭다는 독선과 오만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게 바로 그 지긋지긋한 내로남불의 온상이 되었다.

(pg 142)

민주당에 표를 던지는 입장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도 '민주당이 좋아서'라기보단 '국짐당이 싫어서'에 가깝다.

(나 역시 책에 등장하는 '약한 정당-강한 당파성 현상'의 전형적인 예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위와 같은 지적은 일면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윤석열 정부에 대한 비판은 신문 기고글로 대체하고 있다.

가장 통렬했던 지적은 아래의 구절이다.

치외법권이니 뭐니 하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윤석열 부부가

현실 세계의 영역을 벗어난 '픽션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보아야 한다.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 그것을 향해 '제발 그러지 마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픽션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의 귀엔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한다.

(pg 205)

최근까지 이어졌던 대통령과 영부인에 대한 논란에서 내가 느낀 부분도 이와 유사했다.

무엇이 문제고 사람들이 왜 화를 내는지 그들은 아예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런 느낌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이 책의 핵심은 우리 모두가 지금 편 가르기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어느 정권이든 잘한 것과 못한 것이 있을 텐데 우리 편이면 무조건 잘했다고, 상대 편이면 무조건 못했다고 매도하는 정치 현상이 곧 반지성주의적 현상이라는 말이다.

전문가와 지식인은 디지털 혁명이 촉진한 부족주의적 편 가르기에 흡수되었다.

무슨 말을 하건, 반대편 전문가와 지식인만 매도의 대상일 뿐

우리 편 전문가와 지식인은 추앙의 대상이다.

반대편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발산하는 능력이 뛰어난 우리 편 논객들에겐

무한대의 '궤변 면책특권'이 주어졌으며, 그들은 같은 부족 진영 내에서

부족원들의 사랑과 존경까지 누리는 정신적 지도자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반지성주의는 나의 힘'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로써 반지성주의는 편 가르기와 동의어가 되었다.

(pg 68-69)

잘한 것은 잘했다고, 못한 것은 못했다고 제대로 평가할 수 있으려면 상당한 수준의 정보와 분석이 필요하다.

게다가 그다지 재미도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 입맛에 맞는 정보를 흡수하고 내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를 들락거리기는 너무도 쉽고 상대의 논리를 옹호하는 '무식한' 사람들을 까내리는 것은 지적인 쾌감마저 안겨준다.

저자 역시 강조한 부분이지만 저자를 포함해 현재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 부분에서 자유롭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나 역시 국짐당 지지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과는 그다지 말을 섞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나 자신조차 이러한 생각에 변함이 없는 것을 보면 이러한 현상이 사라지기는 커녕 앞으로도 더 강화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제목이 '반지성주의'기는 하지만 반지성주의 자체를 소개하는 것은 초반 70페이지 정도고 이후에는 문재인, 윤석열 정부에 대한 비판의 글이 차지하고 있다.

분량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읽는 부담이 크지 않고 일단 양쪽 모두를 골고루 까주고 있기 때문에 정치 성향에 관계없이 읽어보면 재미있을 책이다.

후반부에 신문에 기고한 글을 그대로 수록하는 등 솔직히 성의가 없어 보이는 측면도 있는 책이지만 그의 세상을 보는 눈이 흥미롭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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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분석관K : 미래범죄 수사일지
소현수 지음, 이미솔 기획 / EBS BOOKS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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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도 그렇고 분량도 그렇고 청소년들을 위한 가벼운 SF 소설이라는 생각에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줄거리가 눈길을 끌었다.

두뇌 정보를 업로드한 양자 두뇌와 복제한 더미 신체로 영생을 누리는 사회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라는 소개를 보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로드된 데이터가 있어서 '영생'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사회라면 '살인'이라는 범죄가 원칙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다시 만들면 그만이므로) 여기서 발생하는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지가 우선 궁금했다.

궁금했던 부분에 대한 답을 먼저 하자면 뇌 속의 기억은 양자 두뇌로, 신체는 더미로 만들 수 있지만 한 번에 하나의 개체만 만들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이 양자 두뇌가 파괴된다면 그대로 그 개체는 복구될 수 없다는 설정으로 이를 해결하고 있었다. (즉 Ctrl+C가 아닌 Ctrl+X로만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배경 설정이야 어찌 됐든 공각기동대를 한 편이라도 봤다면 익숙한 설정이어서 그리 신선할 건 없었지만 나름 그 속에서 생각해 볼 문제들을 던져주고 있는 점이 좋았다.

작품에 대한 기대가 그리 높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내용이어서 꽤 재미있게 읽었다.

작품의 제목이 곧 화자를 소개하고 있다.

사건분석관은 사법권을 가진 경찰의 일종으로 복잡하고 특수한 강력 범죄들을 조사, 처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단순한 치안 문제는 순수한 기계인 안드로이드들이 대신하고 있다.)

때문에 일반인들과는 달리 더 성능이 좋은 더미 신체를 가졌다는 것이 기본 설정이다.

총 4개 챕터로 4개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알고 보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그런 내용, 전개 자체는 단순한 편이다.

하지만 사건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꽤 의미가 있었다.

한 사람이 자신의 두뇌를 복사한 양자 두뇌를 여러 더미에 이식해 복제 인간을 만들었고, 그중의 하나가 다른 복제인간들을 모두 파괴했다면 이는 살인인가? 자신이 자신을 죽인 것이므로 자살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기계 오작동에 지나지 않는가?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법인격은 복제를 진행한 원본 하나뿐이라는 점이다.)

본래의 인격에 이런저런 제약이나 강화를 거친다면 이 역시 인간 본연의 인격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작품 속 사건분석관들처럼 뇌 수술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아예 범죄를 저지를 수 없도록 뇌 수술을 강제했다면 이를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작품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일 텐데, 과연 두뇌의 기억을 복사해 다른 몸에 심는 행위를 우리는 '영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방법이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것일까? 그리고 과연 인간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영원을 바라십니까? 그것은 누굴 위한 것입니까?

죽지 않는 인간을 인간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인간다움이란 삶, 그리고 죽음에 있습니다.

나는 우리 인류가 인간으로서 살다가 죽길 바랍니다.

(pg 78)

물론 작품 자체가 청소년을 위한 SF 소설이기 때문에 작가가 생각하는 정답도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미리 생각해 볼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 인간이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독자들 각각이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를 남겨준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훌륭했다.

나는 인간이다.

제아무리 강한 힘과 감각, 특별한 양자 두뇌를 가지고 있다 한들

몇 마디 말에 고뇌하고 고통받는 것이 그 증거다.

잊자, 잊어버리자. 일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잊힐 것이다.

(pg 108)

결말이 시리즈물의 1권처럼 갑자기 툭 끝나버렸고 주인공과 아치 에너미의 관계도 아직 미완인 채로 남아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책이 인기가 있으면 후속작을 기대해 봄직도 할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다음 편이 나와주면 그때도 읽어볼 것 같다.

본 작품이 '공상가들'이라는 TV 프로그램의 결과물로 제작된 책이고, 그 때문에 타겟을 보다 넓게 잡기 위해 청소년들을 위한 수준으로 낮추어 쓴 것이라면 보다 더 세세한 살을 붙여 일반인 대상의 소설로도 충분히 승부해봄직한 소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표지를 이런 식으로 만들지는 않겠지)

청소년용 소설이 너무 늘어지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얼마든지 꼬아둘 수 있었던 사건이 금방금방 해결되는데 이 부분을 추리소설 느낌으로 조금만 더 상세히 풀어낸다면 SF와 추리 두 장르의 독자들을 충분히 사로잡을만한 작품이 탄생하지 않을까 싶다.

'공상가들'이라는 프로그램은 보지 않아서 어떤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SF스러운 주제를 하나 던진 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눠보는 토크쇼 형식인 것 같다.

여러 패널들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괜찮은 스토리 줄기가 잡힌 것 같은데 잘만 정리하면 시리즈 소설로 나오거나 한국식 SF 드라마로 제작하기에도 충분히 좋아 보여서 이후의 콘텐츠 확장성이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배우 하석진이 해당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있다는데 그가 사건분석관K 역할을 맡으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다.)

분량이 적어 금새 읽어버렸지만 최근에 접한 조금은 수준 미달이었던 SF 소설들에 비하면 꽤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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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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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쪽에 조예가 없어 작가의 이름은 낯설었지만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리플리'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의 단편집이라는 소개에 읽어보고 싶어졌다.

4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두껍지 않은 책인데 열여섯 편이나 되는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고 앞표지를 넘기면 작가의 서명이 꼭 손으로 쓴 것처럼 인쇄되어 있어 본문을 읽기도 전에 기분이 좋아진다.

짧은 이야기가 모여있는 단편집인지라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여서 인상적이었던 작품들 위주로 감상을 남겨보려 한다.

모든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주제 같은 것은 없지만 읽다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낯섦과의 만남'이다.

작품 속 화자들은 모두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익숙하지 않은 장소나 사람, 사물을 마주하게 된다.

익숙하지 않은 대상과 마주친다는 것은 때로는 불안함으로, 때로는 반가움으로 다가올 텐데 이 각각의 이야기들에서는 이러한 낯선 만남에 따르는 다양한 감정들을 엿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영웅'이라는 작품이었다.

어느 부잣집에 아이 둘을 돌보는 보육교사로 들어가게 된 젊은 여성의 이야기인데, 줄거리와 제목이 그다지 어울리는 느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결말까지 읽은 후 제목이 주는 역설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이를 사랑하는 순수한 보육교사와 모든 것을 태우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방화범이 공존하는 이야기가 불과 30페이지도 안되는 분량 안에서 '어색함 없이' 펼쳐진다.

여기서 '어색함 없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작품들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진행이나 등장인물들의 심경 변화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면서도 위에 언급한 '영웅'처럼 나름 반전 있는 엔딩을 가진 작품들도 더러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물론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로 다소 모호하게 끝나는 작품도 몇 있지만 그런 작품들을 읽을 때에도 이야기의 흐름이 어색하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화려한 경력을 가진 작가답게 작품 속 묘사도 좋았다.

특히 무형의 개념을 유형인 것처럼 묘사한 표현들이 좋았는데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표현들이다.

그들은 그저 서로 사랑하기를 그쳤다.

먼저 찰스가, 다음에 그녀가.

두 사람을 소진한 건 고요의 부족인지도 모른다.

(pg 153, 돌고 도는 세상의 고요한 지점)

'고요'라는 것은 양으로 측정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고요가 부족해 사랑하는 연인 사이가 점점 멀어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타 단편집과는 달리 안에 담긴 작품 중 하나의 제목이 아닌 '레이디스'라는 별도의 제목이 붙어 있는 만큼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화자가 전부 여성인 것은 아니다.)

제목 때문에 혹여 페미니즘의 시각이 강하게 담긴 작품들이 아닐까 우려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 그쪽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사람이더라도 충분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물론 내가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편이기 때문에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서두에 저자가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단어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고 했었는데 이 책에 실린 단편 중에서도 그런 인물이 하나 등장해 재미를 더하니 읽으실 분들은 꼭 찾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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