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과학자 아빠의 기막힌 넛지 육아 - 어린 뇌를 열어주는 부드러운 개입
다키 야스유키 지음, 박선영 옮김 / 레드스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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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부모와 자녀의 대화에 늦은 때는 없다.

초등학생이든 중학생이든 당장 오늘 저녁부터 시작해 보자. (pg 64)



결혼 후 3년이 지날 무렵.

이제는 아내와 함께 아이를 낳아 잘 키워 보자고 작정하고 낳은 아이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아는 너무나 어렵다.


내 아이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이 지금쯤이면 슬슬 어린이집을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아직 그럴 생각은 없다.

일단 아내가 복직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고 요즘 어린이집 사고가 많다보니 다소 불안하기도 해서 그렇다.

그러다보니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어린이집에서 학습해야 하는 것들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 늘 고민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아이를 보며 때론 무서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마음으로는 뭐든 다 해주고 싶지만 막상 뭘 하려고 보면 뭘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고민은 머릿속에만 있을 뿐 일상은 늘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하다보면 어느 새 나도 잘 시간이 된다.

침대에 누워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듯이 보내는게 맞나? 아이에게 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던 차에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제목처럼 꼭 아빠가 하면 좋을 육아법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누구나 적용할 수 있는 쉬운 책이었다.


뇌과학자가 쓴 책이니 당연히 아이가 뇌를 충분히 활용하여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아이로 자라게 돕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특히 '호기심'에 주목하고 있다.

아이의 호기심이 폭발하는 5세 미만의 시기에 부모가 어떻게 유도하느냐에 따라 아이의 호기심 수준이 달라지며,

호기심이 잘 발달한 아이는 평생 스스로 학습하게 하는 아이로 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 우리 아이는 5세가 넘었으니 벌써 늦어버린걸까?' 싶은 부모들이 있을 수 있다.


적정 연령을 넘겼다고 해도 절대 포기하지 말자.

뇌는 몇 살이 되어도 새로운 정보에 접촉하면 그대로 반응하고 성장한다. (pg 121)


물론 어려서 하면 더 빠를 수는 있겠지만, 늦었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이 아니니 일단 실천해보라는 메시지가 좋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아이의 호기심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극하고 지속시킬 수 있을까?

그 첫 걸음으로 저자는 '도감'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다.

아이의 관심사가 세상으로 넓어지기 시작할 때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동식물, 사물에 대한 도감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가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가까이에 도감을 마련해두고 쉽게 접하게 하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어릴 적 집에 전집이 있었는데 정말 자주 봤었다.

얼마나 봤는지 이름을 외우는 것은 물론이요, 어떤 페이지에 어떤 동물과 물고기가 나오는지도 외웠었다. (물론 지금은 기억 안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런 경험이 살아가면서 학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전집을 구비해두라는 의미는 아니고, 저자는 아이가 흥미를 느끼는 분야가 늘어갈 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늘려가라는 충고도 덧붙이고 있다.


이렇게 도감으로 시작된 학습이 재밌어지면 점차 스스로 선택해서 읽는 책의 폭이 넓어지고,

궁금한 것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는지를 알게 되면(즉, 스스로 공부하는 요령을 알게 되면) 

학교에 들어가서도 교과 공부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된다고 한다.


그럼 도감만 사주면 끝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저자는 도감과 현실을 연결해주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도감에서 물고기를 보며 아이가 좋아했다면 아쿠아리움에 데려가 그 물고기를 실제로 볼 수 있게 해준다던가,

꽃을 보며 좋아했다면 꽃집에 가서 마음에 드는 꽃을 직접 골라 키워보게 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부분을 보면서 언젠가 TV에서 본 항공 영재가 생각났다.

비행기를 너무 좋아해서 비행기 기체의 재원은 물론 파일럿이 되기 위해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도 다 꿰고 있는 아이였다.

그 아이도 대단했지만 진짜 대단한 건 아이의 부모님이었다.

아이가 비행기를 좋아하니, 휴일에는 그냥 공항 근처로 가서 아이가 하루종일 비행기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관련 방송 내용을 소개한 기사: 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801170100123360008789&servicedate=20180116)


직장인이라면 주말이 얼마나 소중한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집에서 부족한 잠도 자고 싶고 취미생활도 하고 싶을텐데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시간을 내는 부모.

그런 부모가 있으니 아이가 영재로 자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는 이런 비결 외에도 아이의 뇌가 성장해 감에 따라 어떤 학습이 필수적인지도 소개하고 있다.

책을 늘 곁에 누고 아이가 커감에 따라 한번씩 들춰보면서 어떤 경험을 하게 해주면 좋을까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특히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 후 학원을 보내는 것으로 아이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부모와 자녀의 대화에 늦은 때는 없다.

초등학생이든 중학생이든 당장 오늘 저녁부터 시작해 보자. (pg 64)


지금은 아버지와 친구처럼 지내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친해진 건 내가 중학교 들어간 이후였다.

(오죽하면 내 아버지는 아들만 둘인 양반인데 난 아버지와 목욕탕을 같이 가 본 경험도 없다.)

어릴 때 추억이 많지 않지만 지금은 친근하게 지내고 있으니 육아에 '늦음'이란 없는지도 모른다.

 

육아는 긴 프로세스다.

지금 뭘 하면 좋을지 막막하긴 하지만 지금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결국 아이의 인생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당장 이 걸 시켜봐야겠어!', '당장 이런이런 책을 사서 읽혀야겠어!'

이런 조급함 대신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 때 아이의 호기심에도 좋은 영향을 줄까?'라는 고민을

보다 현실적으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었다.


책 자체는 얇고 글씨도 얼마 안되서 금방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쉽게 쓴 책인데다가 중간중간 그림으로 이해를 돕고 있어서 술술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초보 부모들에게는 참고할만한 좋은 충고들을 가득 담고 있었다.

오히려 내용이 좀 짧아서 아쉬울 정도였다.

저자가 관련 내용으로 추가적인 책을 낸다면 바로 접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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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죽인다
손선영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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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밤은 매일 생명을 다해. 알아?"

손창환의 말에 엠제이가 모자를 고쳐 쓰며 "무슨 말이에요?"하고 묻는다.

"글쎄다. 택시를 몰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밤은 밤대로 하루를 살고 있다.

그래서 새벽이 올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버티다 생명을 다하는 거다. 뭐 그런..."

"오호 멋진데요. 밤은 밤대로 죽을힘을 다해 버틴다니."

"내가 그랬으니까." (pg 166-177)



오랜만에 한국 소설을 접했다.

자극적이지만 명료한 제목에 이끌렸다.

책 소개에 있던 줄거리도 꽤나 단순했지만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소설은 손창환과 박상준이라는 두 인물의 악연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래와 같이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진실을 말했던 손창환은 거짓을 폭로한 내부고발자가 되어 왕따를 당했고,

열 명의 인생을 구렁텅이에 쳐박은 박상준은 억울한 모함을 당한 선량한 은행원으로 승승장구했다. (pg 68)


박상준이라는 인물은 스토리의 '악역'을 맡은 자로, 소시오패스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이용하는 것은 물론 필요가 없어지면 아무런 미련과 가책없이 제거한다.

뇌물과 술수에도 능해 직장에는 인정받으며 성공한다.


반면 손창환은 박상준과 입사 동기였지만 고졸과 대졸이라는 차이와 박상준같은 악랄함이 없어 승승장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동료를 괴롭히던 박상준을 내부고발했지만 오히려 누명을 쓰고 왕따를 당하다 박상준의 마수에 걸려들어 징역까지 살게 된다.

출소 후 택시 운전을 하던 손창환의 차에 박상준이 타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자신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놈이 인사불성으로 취해 자신의 택시에 탄 상황.

손창환은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스토리의 핵심인 원수를 만나는 장면이 꽤나 초반에 나온다.

그러면서 과거 은행원이었던 시절 손창환과 박상준의 에피소드들이 중간중간 등장한다.

또한 사건의 한 축을 이루는 킬러들과 계약을 맺는 장면들도 비교적 초반부터 제시되어 궁금증을 더해준다.


복수를 위해 박상준을 감시하던 손창환에게 뜻밖에 박상준의 딸로 알고 있던 여자가 그의 택시에 타게 되면서 전개는 급물살을 탄다.

박상준의 사기행각을 미리 알고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자신을 납치하라는 딸.

살인을 계획한 손창환은 그렇게 납치범이 되고 스토리는 점점 몰입감을 더해간다.


작가는 소설과 시나리오를 주로 쓴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다보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작가의 소설 중 영화화가 계획된 것이 여러편 있다고 소개되어 있는데,

이 작품도 그대로 영화화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읽으면서 머릿속에 계속 영화 속 이미지들이 떠올려지게 된다.

특히 배경이 서울 서초구 주변이어서 해당 지역을 잘 안다면 더욱 실감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이 작품이 정말 괜찮은 소설인가'라고 물으면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 같다.

물론 재미있었다. 몰입도도 좋아서 금새 다 읽었다. 분량도 300페이지 안팎으로 적절한 분량이다.

단지 내가 한국영화를 잘 보지 않는 이유가 이 책에도 그대로 살아 있어서 거부감이 좀 있었다.


영화 전문가가 아니어서 정확하게 이거다 라고 서술하기는 어렵겠지만 최대한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한국영화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간혹 너무 터무니없을 때가 있다.

차라리 공포영화나 SF처럼 확 허구던지 실사를 기반으로 한 사건을 다루어 현실에 가까울 때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는데,

이런 범죄나 스릴러물 같이 현실과 허구가 섞여있는 경우에는 다소 황당한 전개나 결말이 그 작품에 온전히 빠져들기 어렵게 만든다.

(아래부터는 작품의 결말이 포함되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흐리게 처리하였다.)


소시오패스라면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소시오패스가 20년을 치밀하게 준비한 범죄가 은행강도와 납치이다.

둘 다 한국에서 성공하기가 극도로 어려운 범죄들이다.

차라리 고도로 정밀한 사기극을 계획했다면 훨씬 개연성이 있었을 것이다. (극적인 재미는 덜했겠지만)

게다가 그 범죄를 한번도 듣도보도 못했던 외국의 킬러 여성과 함께 한다. 심지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과 동시에 진행한다.

그 세계에서는 나름 이름 좀 날린다는 킬러 두 명이 동시에 서울에서 위장하고 있는데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둘 중 한 명은 3년 동안 딸 행세를 하고 다른 한 명은 은행 직원으로 위장취업 해 1년을 일한다.

업무강도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은행원으로 1년을 위장취업한다?

그것도 금융지식이 전무할 킬러가 결과가 보장되지도 않은 범죄를 위해서 말이다.

(물론 위장을 위해 공부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금융기관에 취업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대학생들에게 물어보라.)

게다가 그 은행에는 손창환의 고등학교 동기가 근무하고 있다.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가? 세상이 생각보다 좁다 한들 저런 일이 벌어질 확률이 얼마나 될까?

개인적으로는 저 외국-여성-킬러라는 설정 자체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배역을 주기 위해 억지로 넣은 느낌이랄까?

차라리 박상준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게 된 자신과 비슷한 소시오패스들이 모여 작당모의를 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전개에 다소 실망감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아깝다거나 재미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왠지 영화로 만들어지면 더 재밌을 것 같은 스토리이기도 하다.

재미삼아 박상준 역에 조진웅 같은 배우가, 손창환 역에 송강호 같은 배우가 출연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송강호가 실제로 나이가 더 많아 둘 사이의 관계가 잘 보여질지 모르겠지만)

과거 스토리에 부패한 공무원과 은행원이 대거 등장하는데 여기에 이경영 같은 배우가 나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깔끔한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선입견일 수 있겠지만 결말 역시도 전형적인 영화 같은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필로그까지 모두 읽고 다시 프롤로그를 보면 '오호라' 싶은 부분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심심풀이로 읽기에 매우 좋은 소설,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꽤 있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밤은 매일 생명을 다해. 알아?"
손창환의 말에 엠제이가 모자를 고쳐 쓰며 "무슨 말이에요?"하고 묻는다.
"글쎄다. 택시를 몰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밤은 밤대로 하루를 살고 있다.
그래서 새벽이 올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버티다 생명을 다하는 거다. 뭐 그런..."
"오호 멋진데요. 밤은 밤대로 죽을힘을 다해 버틴다니."
"내가 그랬으니까." (pg 16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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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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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박사님, 아시죠. 우리는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답니다...

나 자신도 그래요...그리고 어느 날, 그만두게 되죠." pg 307


작가가 이쪽 분야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작가라는데 소설을 잘 보지 않는 나는 처음 접하는 작가였다.

이 책을 덮고 나서는 좋은 작품을 하나 읽었다는 뿌듯함과 함께 엄청난 작가 한 명을 알게 되었다는 기쁨이 더해졌다.


소설을 평하자면 부득이 스토리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스토리를 정리하려면 사건 위주로 정리해야 할 터인데, 이 책의 사건은 매우 단순하다.

아래는 출판사에서 책을 소개하면서 정리한 내용이다.

(출처: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496649)


시골에서 사는 열두 살 소년 앙투안. 그는 우연한 사고로 동네 꼬마를 죽이고 만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앙투안은 숲에 꼬마의 시체를 숨긴다. 시체는 결코 발견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 12년이 지나도록. 이제 앙투안은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그날의 기억에서 슬슬 떠나도 좋은 것일까? 이때 갑자기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고향에 내려가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생기는데......


책에서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은 사실 저게 다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게다가 저 사건은 책의 초반부에 등장한다.

저 사건을 알고 책을 읽기 시작해도 책이 주는 흥미는 전혀 반감되지 않는다.

이 책의 묘미는 핵심이 되는 사건 자체가 주는 충격보다는(물론 충격적인 사건이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변화하는 주인공의 심리상태 묘사에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열두 살 남자아이라면 학교 다니면서 한두번씩은 크고 작은 싸움에 휘말릴 수 있는 나이다.

만 나이가 아닌 한국 나이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 정도가 될 테니 살면서 가장 겁이 없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 때 내가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여튼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어떤 심경이었을까?


그 시기에 앙투안은 의도치않게 한 꼬마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딱 한 번이었다. 분을 참지못해 엉뚱한 상대에게 터뜨린 분노의 한 방.

게다가 자신이 싫어하거나 모르던 누군가도 아니고 그 자신도 아끼던 이웃 동생이었다.


그 후 앙투안이 겪는 공포와 불안이 가히 압도적인 문체로 묘사되어 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동들이 다 그 사건을 파헤치기 위한 행동처럼 느껴지는 상태가 지속된다.

그러다 발각되기 전에 삶을 마감하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하고 사람들이 발견 못하는 것 같으니 조용히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마치 작가가 진짜 살인을 해보고 적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만약 내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나도 이런 심리상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들키면 자신의 파멸은 물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의 삶도 끝내버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

그 불안감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앙투안도 나이를 먹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끔은 그 사건을 잊고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룬 것이 많아질수록 그 사건은 불쑥 머릿속에 찾아와 앙투안을 괴롭힌다.

그 동안 노력한 것이 한 순간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역사 속 최악의 영아 살인마로 기록될 시나리오까지.


누구나 자신이 이룩한 것이 어느 정도이든지 간에 공감이 될만한 것들이었다.

특히나 야밤에 발생하는 교통사고의 경우 가해자가 뺑소니 치고 도망가는 사건이 많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운전자들의 심리가 앙투안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까지 겪게될 고통에 대한 공포로 피해자측의 고통은 외면하게 되는 그런 심리.


이후 앙투안이 살게 되는 삶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아래에는 소설의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보지 않기를 권한다.)

그는 자신의 과오에서 진정으로 해방되려면 고향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고 준비도 거의 끝나간다.

하지만 그러다 또 한 번의 실수를 저지른다. 어릴 적 로망이었던 여인과의 단 한 순간의 접촉.

그로인해 그는 자신의 과오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그 마을에 잡혀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인생을 살게 된다.

법적인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혐의가 모두 없어졌다고 하기도 어려우며 때문에 불안감은 지속되고

그 곳을 떠나 그 사건을 아주 잊어버릴수도 없는 그런 삶.

오히려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더 긴 형벌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작가는 처벌받지 않은 '운좋은 완전범죄'를 묘사하기 보다는,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는 법적인 처벌 유무에 관계없이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까지 다 보면 이 사건을 둘러싼 전말이 모두 밝혀지면서 '와, 이 작가 정말 장난 아니구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박사님, 아시죠. 우리는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답니다...

나 자신도 그래요...그리고 어느 날, 그만두게 되죠." pg 307


인상깊은 구절로 이 구절을 택한 이유는 책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대사에 불과하지만

책을 다 본 사람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구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스토리 구성 역량이 여기서 폭발적으로 느껴졌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 작품의 영화화를 준비하고 있다는데 만약 영화로 나온다면 이 대사를 누가 어떻게 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사건이 워낙 초반에 나오고 중반까지는 별다른 사건 없이 앙투안의 심경 변화 위주의 서술이 진행되다보니 약간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다시 긴장감이 고조되며 책이 그리 두껍지 않아서 순식간에 읽어간 책이었다.

(이건 저자의 잘못은 아니지만, 요즘 책 답지 않게 중간중간 오타들이 눈에 많이 띄는 편이어서 아쉬웠다.)

책을 덮자마자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 장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좋은 작가와의 만남은 좋은 선순환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책을 보는 즐거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새삼 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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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합니다, 동네 바보형이라는 말 - 한국에서 10년째 장애 아이 엄마로 살고 있는 류승연이 겪고 나눈 이야기
류승연 지음 / 푸른숲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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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우리는 서로 반대편 길로 향하지만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저들과 내가 사는 세상이 같은 세상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세상은 버스와 달리 안과 밖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

저들은 내 세상의 일부이기도 하고 나는 저들 세상의 일부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다. 그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pg 199)



직장 근처에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특수학교와 장애인 직업재활센터가 있다.

그덕에 장애인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출퇴근 길에 장애인들과 보호자들을 자주 만난다.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이곳에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내 팔목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당시 나는 20대 후반의 건장한 남성이었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한 지적장애인 학생이 내 옷을 움켜쥐고 있었다.

지금에서 하는 추측이지만, 그 때 내 옷의 재질이 약간 반짝거리는 소재여서 그랬던 모양이다.

아는 사람이겠지 싶었던 터라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신호가 바뀌고 옆에 있던 학생의 어머님이 그 상황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손을 치우며 재빨리 사과하셨다.

그때까지도 당황스러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아닙니다' 한마디를 못했고, 그 어머님은 학생을 데리고 길을 건너가 버렸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위 경험이 30대 중반인 지금까지도 중증 장애인을 직접적으로 접한 최초의 사례이자 마지막 사례이다.

그 뒤로는 지나가면서 보긴 했어도 직접적인 접촉이나 말을 섞거나 부딪혀본 경험도 전무하다.

그랬기 때문에 그 때 그렇게 당황했던 것 같다.

일반적인 생면부지의 남학생이 그랬다면 시비의 의도로 받아들였을 것이고 아는 사람이었다면 친근함의 표시로 받아들였을텐데

윗 사례는 어떤 의도로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당황했었던 모양이다.

난 그때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


이렇게 가벼운 질문으로 접하게 된 책이다.

하지만 책을 다 본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의문으로 책을 접한 것이 저자에게 미안할 정도로 나의 장애인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기자 출신인 저자는 10년 전 쌍둥이를 출산했다.

이란성 쌍둥이였는데 첫째인 딸은 정상이었지만 둘째 아들이 발달장애인 판정을 받게 되었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서 저자는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아이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장애 판정을 받고 일반학교를 거쳐 현재 다니고 있는 특수학교에 들어가기까지 저자와 가족들이 겪게된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러면서 아직도 부족하기만한 장애인 복지 제도와 사람들의 장애에 대한 깊은 편견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장애인 복지뿐만 아니라 이 나라 자체가 '복지'라는 단어와 썩 잘 어울리는 나라는 아니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충격적인 뉴스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 중에서도 장애인 복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실제 장애인 복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 입장에서 담당 공무원도 잘 모르는 복지제도를 찾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는 과정이 얼마나 지치고 고된 일인가를 잘 보여줌으로써 무엇이 문제인지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사실 복지제도라는 것은 단기간에 보완되기 어렵다.

최근에 이슈가 되는 아동수당만 보더라도 해당 가정에 10만원이 지급되는 간단한 제도임에도 

관련 뉴스 댓글 속 사람들의 생각은 천차만별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복지의 개념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흡한 복지제도 만큼이나 장애인과 그 가족들을 괴롭히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편견어린 시선이었다.


지적장애 확진을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아들을 대한민국 최초의 지적장애인 출신 서울대 박사로 키우겠다는 야무진 꿈을 꿨다.

자폐 아이를 키운 선배를 통해 유치원 때는 장애 1등급이었는데 엄마의 노력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땐 전교 학생회장까지 한 아이가 주변에 있다는 얘길 듣고 나도 욕심을 부렸다. - 중략 -

장애를 엄마가 노력해서 고칠 수 있는 병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장애는 '완치되는 병'이 아니라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하는 '하나의 특성'임을 알게 되었다. (pg 161)


저자 자신도 발달장애를 '병'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음을 고백하는 구절이다.

특히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하기 쉬운 실수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이 장애인을 처음 접했을 때 질문을 하면 흔히 '응, 저 아이는 어디어디가 아파서 그래'라고 답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아파서..."라며 자식을 '아픈 아이'라고 말하는 장애 아이 엄마들이 있다. - 중략 -

나는 '아픈 아이'라는 말에 조용히 반대표를 던진다.

우리 아들은 병에 걸린 게 아니다. 신체가 아픈 것도, 정신이 아픈 것도 아니다.

그저 생각 회로가 남들과 같은 속도로 돌아가지 않을 뿐이다. (pg 163)


장애인을 환자 취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하고 있는 사람과 다리가 절단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똑같이 '아픈' 사람이라고 정의하게 되면

장애인도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런 편견 외에도 저자가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인식 개선 포인트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적당한 무관심'이다.

'아니, 장애인 현실이 개선되려면 관심이 많아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관심이란 개인적인 관심을 의미한다.


발달장애인의 경우 공공장소에서도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상하게 여길만한 언행을 보이곤 한다. (떼를 쓰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이러한 행동의 경우 특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멈추게 된다고 한다.

이 때 사람들이 적당히 무관심하게만 기다려줘도 해당 장애인과 가족에게는 큰 도움이 된단다.

자신도 모르게 쳐다보며 무언의 비난을 쏟아붓지 말아달라는 당부였다.


이렇게 장애 아이를 키우면서 겪는 이야기들을 풀어낸 책이지만, 일반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이야기도 많았다.

특히 정상인 딸 아이가 자신도 장애인으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라는 말을 했던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형제, 자매 중 어느 하나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아이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상대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정상인 아이가 무턱대고 투정을 부리기도 어려워진다.

그렇게 되면 자라고 나서의 인성에 문제가 될 소지도 생기게 된다고 한다.

우리 집은 나이 차이가 4살이 나는 형제 집안인데, 특이하게 동생과 나 모두가 편애로 인한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며 살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가 둘 이상이면 아무리 공평하게 대하려 해도 순간순간 누군가는 아쉬울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쌓여 서른을 넘긴 지금도 부모님 앞에서 옛날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부모 노릇이 쉽지 않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는다.

하물며 한 쪽이 장애를 가진 경우니 오죽 했겠는가.


또한 사고없이 평균적인 삶을 산다고 가정했을 때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죽게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보통의 부모라면 자식이 자신보다 오래 사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될 테지만, 자식이 장애를 가진 경우라면 이것이 두려울 법 하다.

그래서 저자도 이런 저런 계획을 세워 자식을 위한 완벽한 조건을 물려주고 싶었단다.


결국 이전까지 세웠던 모든 계획이 엄마인 나의 욕심이고 허영일 뿐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내 생각대로 아이의 인생을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닐뿐더러 내가 계획한 대로 아기가 따라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이 모든 자식 된 자의 본성이다. (pg 260)


윗 구절을 읽고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우리도 자랄 때 부모 뜻대로 자라주지 않지 않았던가.

비단 장애아이를 둔 부모 뿐만 아니라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부모라면 무언가 와닿는 게 있을 구절일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눈을 감고 현실을 피하고 싶어도 장애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지금도 늘 함께 살고 있다.

언젠가 마트에서, 공원에서, 지하철에서 딸과 함께 장애인을 만난다면 나는 어떻게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처럼 무심하게 '아, 어디어디가 아파서 그런가봐'라는 말로 얼버무리지는 않으리라.


지금 다시 그 횡단보도로 돌아간다면 난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

'옷이 맘에 들어요? 저도 큰 맘 먹고 샀어요. 하하하' 하고 웃으며 넘어갈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까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어머님이 죄송하다고 했을 때 '그럴 수도 있지요 뭐'하며 덜 무안하게 해 드릴 수 있지는 않았을까.


저자가 기자 출신이라는 것이 책 전체에 걸쳐 잘 드러난다.

읽으면서 '야...이 사람 글 참 잘쓴다'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300페이지 정도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분량이지만 쉽게 술술 읽힌다.

게다가 그 안에 가끔은 가슴 찡한 슬픔이, 가끔은 유쾌한 유머가 묻어 나온다.

주변에 장애인과 장애인의 가족이 있든 없든,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에게나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었다.

자녀가 책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면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서평에 다 담지 못한 인상깊은 구절을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서로 반대편 길로 향하지만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저들과 내가 사는 세상이 같은 세상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세상은 버스와 달리 안과 밖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

저들은 내 세상의 일부이기도 하고 나는 저들 세상의 일부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다. 그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pg 199) 


내 아이는 인간적 가치 면에서 효율성이 낮아 '맞아도 어쩔 수 없는 장애인'이 아니다.

오히려 나보다도 반짝반짝 빛나는 가치 있는 존재다.

나는 살면서 그 누구도 변화시켜본 경험이 없지만 내 아들은 이미 나를 변화시켰다.

어쩌면 아빠와 누나도 변화시킬 것이다. 존재 그 자체로 말이다.

내 아들을 비롯한 발달장애인의 인권이 나와 동등한 개인으로서 지켜져야 하는 이유다. (pg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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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애주가의 고백 - 술 취하지 않는 행복에 대하여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 이덕임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인상깊은 구절

술을 마실 때 나 역시 일행 중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견딜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혼자서만 부끄러운 짓을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pg 71)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핑계로 '나는 술자리를 좋아하지 술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난 내가 술을 좋아하지 술자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몇 년 전에 깨달았다.

난 참 술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맥주를 좋아하고 가장 좋아하는 술자리는 오로지 나 혼자 있는 술자리이다.

결혼하고서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 회식 후 2차 가자는 동료들에게는 집에 간다고 하고서

맥주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온 적도 있을 정도다.


살면서 혼술이 크게 늘게 된 계기가 두 가지 있다.

첫번째는 컨설턴트라는 허울에 반해 뛰어든 내 첫 직장일이 결국은 영업사원에 지나지 않았고,

난 사람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다.

대인기피증이 심해 평일에 연차를 내고 휴대폰을 끄고 방안에만 있다 출근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원래도 가끔 혼술을 하긴 했지만 이때부터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아니,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일, 인간관계, 인맥을 핑계로 술을 마셨다.

밤을 새워 마시기도 하고 아침에 모르는 사람과 눈을 뜨기도 하고.

그러다 급작스럽게 어떤 '깨달음'을 얻어 이제는 술을 끊고 이런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책이 주는 메시지는 심플하다.

술 마시다 죽기 싫으면 그만 마시라는 것이다.

이 책을 한 문단으로 요약할 수 있는 구절이 비교적 초반에 등장한다.


술을 끊으려면 술을 그만 마시는 수밖에 없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항상 같다.

술을 마시는 데는 어떠한 심리적 이유도 없다.

누설해야 할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술주정뱅이가 술을 마시는 것은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pg 50)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중독' 상태에 있는데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알콜중독자' 하면 뭔가 TV에서 등장하는 노숙자나 컴컴한 방에 혼자 쭈구리고 앉아서 깡소주를 마시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 정도가 아닌 우리들은 그저 '술에 조금 의존적인'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위하지만,

실제로는 의존증과 중독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나역시 술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숙취로 보낸 시간까지 술이 영향을 준 시간이라고 치면 근래 10년은 술에 취해있던 시간이 그렇지 않았던 시간보다 더 길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이 책의 제목에 이끌렸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읽게 되었다.

어처구니없지만 책을 받은 첫 날에는 맥주 한잔 하면서 읽기도 했다.


위에 언급했던 두 번째 혼술의 증가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터였다.

한 백일 정도까지는 아이가 밤에 자주 깨서 아예 술을 마실수가 없었다.

하지만 평소에 먹던 버릇이 있으니 계속해서 스트레스가 쌓이기만 하고 배출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폭발해서 집사람이나 아이에게 신경질을 내는 나를 발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금단증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집사람이 그럴꺼면 그냥 마시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그 뒤로는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혼술을 하고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정도면 괜찮은 수준 아닌가 싶을수도 있다.

하지만 빈도를 통제한 뒤로 양을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혼자 마시면서도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셔대는 날이 많아졌다.


나 또한 간헐적으로 금주를 실천해 봤지만 스스로 술을 조절할 수 있겠다는 자극을 받은 것 외에 별 이득은 없었다.

장기적으로는 점점 더 술을 마시게 될 뿐이었다.

잠깐의 절주는 통제 능력을 보여 주는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통제력이 상실되는 신호인 것이다. (pg 134)


저자도 마찬가지의 경험을 했었다.

위 구절을 읽고서는 일종의 무력감까지 느꼈다.

나도 건강검진 후나 한번씩 심하게 아프고 나서는 짧게는 한달, 길게는 두세달 정도 술을 조절했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시 원래 사이클로 쉽게 돌아오곤 했다.


군대에서 술을 못마시니 대안으로 찾은 것이 담배였다.

평균적인 흡연자들에 비해 늦게 시작해서 그런지 담배는 7년 정도 피우다가 결혼 전에 끊어버렸다.

한 1년 정도는 힘들었는데 그 뒤로는 생각도 안난다.

담배값이 올랐을 때 그 전에 끊길 잘했다는 생각도 했다. (물론 금연 후 주량이 더 늘었다.)


그치만 술만은 정말 끊기가 어렵다.

심지어 지금도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맥주를 한잔 할까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미련한 생각이지만 이 책에 술을 끊을 수 있는 비책이라도 있길 기대했다.

하다못해 저자만의 특별한 노하우라도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건 없었다.

심지어 저자는 한번 의존증에 빠진 사람은 평생 그것을 잊지가 쉽지 않다고까지 이야기한다.

핵심은 자신이 중독이라는 것을 깨닫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중독을 혼자서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절대로 가 보지 않은 길이 얼마나 힘든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 중략 -

실패란 동시에 자유를 의미한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죄의식을 견디기 위해, 불안함과 자책을 덜기 위해,

자신에 대한 커다란 기대와 스스로의 하찮음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건 완전히 어리석은 전략이다.

술은 삶의 어떤 경험, 어떤 경력, 위대한 생각,일 혹은 책과도 상관이 없다.

삶은 그 자체로 항상 충분하다. (pg 198-199)


멋진 말이긴 하지만 크게 와닿지 않는다고 할까. 뭐 책 한 권 읽는다고 인생이 바뀌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잘살겠지만...

나에게는 지금 닥친 불안함과 자책을 덜어내는 것이 더 시급한 것처럼 느껴진다.

저자가 말하는 그 '은총'의 시점이 아직 나에게는 오지 않은 모양이다.


담배도 끊은 나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술도 그만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가 얼른 와서 이 책을 다시 평가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사족이지만, 저자가 말하는 독일의 음주문화가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술을 장려하는 직장 문화 같은 것들이 특히 그렇다.

이런 현상들이 개인들로 하여금 금주하기 더 어려운 환경을 만든다고 한다.

점점 직장 회식 문화도 변화해가고 있다고 하니 점차 더 바람직한 음주문화가 생겨나리라 믿는다.


아이가 눈에 띄게 커가고 있다.

어릴 적 내 눈에 비친 아버지에게 술은 일상이었다.

내 아이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그와는 달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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