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먼저 죽인다
손선영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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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밤은 매일 생명을 다해. 알아?"

손창환의 말에 엠제이가 모자를 고쳐 쓰며 "무슨 말이에요?"하고 묻는다.

"글쎄다. 택시를 몰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밤은 밤대로 하루를 살고 있다.

그래서 새벽이 올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버티다 생명을 다하는 거다. 뭐 그런..."

"오호 멋진데요. 밤은 밤대로 죽을힘을 다해 버틴다니."

"내가 그랬으니까." (pg 166-177)



오랜만에 한국 소설을 접했다.

자극적이지만 명료한 제목에 이끌렸다.

책 소개에 있던 줄거리도 꽤나 단순했지만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소설은 손창환과 박상준이라는 두 인물의 악연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래와 같이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진실을 말했던 손창환은 거짓을 폭로한 내부고발자가 되어 왕따를 당했고,

열 명의 인생을 구렁텅이에 쳐박은 박상준은 억울한 모함을 당한 선량한 은행원으로 승승장구했다. (pg 68)


박상준이라는 인물은 스토리의 '악역'을 맡은 자로, 소시오패스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이용하는 것은 물론 필요가 없어지면 아무런 미련과 가책없이 제거한다.

뇌물과 술수에도 능해 직장에는 인정받으며 성공한다.


반면 손창환은 박상준과 입사 동기였지만 고졸과 대졸이라는 차이와 박상준같은 악랄함이 없어 승승장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동료를 괴롭히던 박상준을 내부고발했지만 오히려 누명을 쓰고 왕따를 당하다 박상준의 마수에 걸려들어 징역까지 살게 된다.

출소 후 택시 운전을 하던 손창환의 차에 박상준이 타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자신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놈이 인사불성으로 취해 자신의 택시에 탄 상황.

손창환은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스토리의 핵심인 원수를 만나는 장면이 꽤나 초반에 나온다.

그러면서 과거 은행원이었던 시절 손창환과 박상준의 에피소드들이 중간중간 등장한다.

또한 사건의 한 축을 이루는 킬러들과 계약을 맺는 장면들도 비교적 초반부터 제시되어 궁금증을 더해준다.


복수를 위해 박상준을 감시하던 손창환에게 뜻밖에 박상준의 딸로 알고 있던 여자가 그의 택시에 타게 되면서 전개는 급물살을 탄다.

박상준의 사기행각을 미리 알고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자신을 납치하라는 딸.

살인을 계획한 손창환은 그렇게 납치범이 되고 스토리는 점점 몰입감을 더해간다.


작가는 소설과 시나리오를 주로 쓴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다보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작가의 소설 중 영화화가 계획된 것이 여러편 있다고 소개되어 있는데,

이 작품도 그대로 영화화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읽으면서 머릿속에 계속 영화 속 이미지들이 떠올려지게 된다.

특히 배경이 서울 서초구 주변이어서 해당 지역을 잘 안다면 더욱 실감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이 작품이 정말 괜찮은 소설인가'라고 물으면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 같다.

물론 재미있었다. 몰입도도 좋아서 금새 다 읽었다. 분량도 300페이지 안팎으로 적절한 분량이다.

단지 내가 한국영화를 잘 보지 않는 이유가 이 책에도 그대로 살아 있어서 거부감이 좀 있었다.


영화 전문가가 아니어서 정확하게 이거다 라고 서술하기는 어렵겠지만 최대한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한국영화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간혹 너무 터무니없을 때가 있다.

차라리 공포영화나 SF처럼 확 허구던지 실사를 기반으로 한 사건을 다루어 현실에 가까울 때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는데,

이런 범죄나 스릴러물 같이 현실과 허구가 섞여있는 경우에는 다소 황당한 전개나 결말이 그 작품에 온전히 빠져들기 어렵게 만든다.

(아래부터는 작품의 결말이 포함되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흐리게 처리하였다.)


소시오패스라면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소시오패스가 20년을 치밀하게 준비한 범죄가 은행강도와 납치이다.

둘 다 한국에서 성공하기가 극도로 어려운 범죄들이다.

차라리 고도로 정밀한 사기극을 계획했다면 훨씬 개연성이 있었을 것이다. (극적인 재미는 덜했겠지만)

게다가 그 범죄를 한번도 듣도보도 못했던 외국의 킬러 여성과 함께 한다. 심지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과 동시에 진행한다.

그 세계에서는 나름 이름 좀 날린다는 킬러 두 명이 동시에 서울에서 위장하고 있는데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둘 중 한 명은 3년 동안 딸 행세를 하고 다른 한 명은 은행 직원으로 위장취업 해 1년을 일한다.

업무강도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은행원으로 1년을 위장취업한다?

그것도 금융지식이 전무할 킬러가 결과가 보장되지도 않은 범죄를 위해서 말이다.

(물론 위장을 위해 공부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금융기관에 취업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대학생들에게 물어보라.)

게다가 그 은행에는 손창환의 고등학교 동기가 근무하고 있다.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가? 세상이 생각보다 좁다 한들 저런 일이 벌어질 확률이 얼마나 될까?

개인적으로는 저 외국-여성-킬러라는 설정 자체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배역을 주기 위해 억지로 넣은 느낌이랄까?

차라리 박상준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게 된 자신과 비슷한 소시오패스들이 모여 작당모의를 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전개에 다소 실망감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아깝다거나 재미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왠지 영화로 만들어지면 더 재밌을 것 같은 스토리이기도 하다.

재미삼아 박상준 역에 조진웅 같은 배우가, 손창환 역에 송강호 같은 배우가 출연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송강호가 실제로 나이가 더 많아 둘 사이의 관계가 잘 보여질지 모르겠지만)

과거 스토리에 부패한 공무원과 은행원이 대거 등장하는데 여기에 이경영 같은 배우가 나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깔끔한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선입견일 수 있겠지만 결말 역시도 전형적인 영화 같은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필로그까지 모두 읽고 다시 프롤로그를 보면 '오호라' 싶은 부분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심심풀이로 읽기에 매우 좋은 소설,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꽤 있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밤은 매일 생명을 다해. 알아?"
손창환의 말에 엠제이가 모자를 고쳐 쓰며 "무슨 말이에요?"하고 묻는다.
"글쎄다. 택시를 몰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밤은 밤대로 하루를 살고 있다.
그래서 새벽이 올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버티다 생명을 다하는 거다. 뭐 그런..."
"오호 멋진데요. 밤은 밤대로 죽을힘을 다해 버틴다니."
"내가 그랬으니까." (pg 16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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