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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평점 :
인상깊은 구절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박사님, 아시죠. 우리는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답니다...
나 자신도 그래요...그리고 어느 날, 그만두게 되죠." pg 307
작가가 이쪽 분야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작가라는데 소설을 잘 보지 않는 나는 처음 접하는 작가였다.
이 책을 덮고 나서는 좋은 작품을 하나 읽었다는 뿌듯함과 함께 엄청난 작가 한 명을 알게 되었다는 기쁨이 더해졌다.
소설을 평하자면 부득이 스토리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스토리를 정리하려면 사건 위주로 정리해야 할 터인데, 이 책의 사건은 매우 단순하다.
아래는 출판사에서 책을 소개하면서 정리한 내용이다.
(출처: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496649)
시골에서 사는 열두 살 소년 앙투안. 그는 우연한 사고로 동네 꼬마를 죽이고 만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앙투안은 숲에 꼬마의 시체를 숨긴다. 시체는 결코 발견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 12년이 지나도록. 이제 앙투안은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그날의 기억에서 슬슬 떠나도 좋은 것일까? 이때 갑자기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고향에 내려가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생기는데......
책에서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은 사실 저게 다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게다가 저 사건은 책의 초반부에 등장한다.
저 사건을 알고 책을 읽기 시작해도 책이 주는 흥미는 전혀 반감되지 않는다.
이 책의 묘미는 핵심이 되는 사건 자체가 주는 충격보다는(물론 충격적인 사건이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변화하는 주인공의 심리상태 묘사에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열두 살 남자아이라면 학교 다니면서 한두번씩은 크고 작은 싸움에 휘말릴 수 있는 나이다.
만 나이가 아닌 한국 나이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 정도가 될 테니 살면서 가장 겁이 없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 때 내가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여튼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어떤 심경이었을까?
그 시기에 앙투안은 의도치않게 한 꼬마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딱 한 번이었다. 분을 참지못해 엉뚱한 상대에게 터뜨린 분노의 한 방.
게다가 자신이 싫어하거나 모르던 누군가도 아니고 그 자신도 아끼던 이웃 동생이었다.
그 후 앙투안이 겪는 공포와 불안이 가히 압도적인 문체로 묘사되어 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동들이 다 그 사건을 파헤치기 위한 행동처럼 느껴지는 상태가 지속된다.
그러다 발각되기 전에 삶을 마감하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하고 사람들이 발견 못하는 것 같으니 조용히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마치 작가가 진짜 살인을 해보고 적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만약 내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나도 이런 심리상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들키면 자신의 파멸은 물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의 삶도 끝내버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
그 불안감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앙투안도 나이를 먹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끔은 그 사건을 잊고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룬 것이 많아질수록 그 사건은 불쑥 머릿속에 찾아와 앙투안을 괴롭힌다.
그 동안 노력한 것이 한 순간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역사 속 최악의 영아 살인마로 기록될 시나리오까지.
누구나 자신이 이룩한 것이 어느 정도이든지 간에 공감이 될만한 것들이었다.
특히나 야밤에 발생하는 교통사고의 경우 가해자가 뺑소니 치고 도망가는 사건이 많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운전자들의 심리가 앙투안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까지 겪게될 고통에 대한 공포로 피해자측의 고통은 외면하게 되는 그런 심리.
이후 앙투안이 살게 되는 삶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아래에는 소설의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보지 않기를 권한다.)
그는 자신의 과오에서 진정으로 해방되려면 고향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고 준비도 거의 끝나간다.
하지만 그러다 또 한 번의 실수를 저지른다. 어릴 적 로망이었던 여인과의 단 한 순간의 접촉.
그로인해 그는 자신의 과오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그 마을에 잡혀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인생을 살게 된다.
법적인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혐의가 모두 없어졌다고 하기도 어려우며 때문에 불안감은 지속되고
그 곳을 떠나 그 사건을 아주 잊어버릴수도 없는 그런 삶.
오히려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더 긴 형벌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작가는 처벌받지 않은 '운좋은 완전범죄'를 묘사하기 보다는,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는 법적인 처벌 유무에 관계없이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까지 다 보면 이 사건을 둘러싼 전말이 모두 밝혀지면서 '와, 이 작가 정말 장난 아니구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박사님, 아시죠. 우리는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답니다...
나 자신도 그래요...그리고 어느 날, 그만두게 되죠." pg 307
인상깊은 구절로 이 구절을 택한 이유는 책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대사에 불과하지만
책을 다 본 사람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구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스토리 구성 역량이 여기서 폭발적으로 느껴졌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 작품의 영화화를 준비하고 있다는데 만약 영화로 나온다면 이 대사를 누가 어떻게 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사건이 워낙 초반에 나오고 중반까지는 별다른 사건 없이 앙투안의 심경 변화 위주의 서술이 진행되다보니 약간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다시 긴장감이 고조되며 책이 그리 두껍지 않아서 순식간에 읽어간 책이었다.
(이건 저자의 잘못은 아니지만, 요즘 책 답지 않게 중간중간 오타들이 눈에 많이 띄는 편이어서 아쉬웠다.)
책을 덮자마자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 장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좋은 작가와의 만남은 좋은 선순환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책을 보는 즐거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새삼 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