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일러스트 에디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정윤희 옮김 / 오렌지연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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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결혼을 하면서 아내가 가져왔던 짐 중에 이 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집에 꽤 오랫동안 꽂혀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도무지 읽히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일러스트가 포함된 판본이 나왔다는 소식에 이 기회에 읽어보자 싶어 집어 들게 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저자가 약 2년 정도를 월든이라는 호수 근처에 소박한 집을 지어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수필집이다.

외딴곳에서 홀로 지내며 저자가 느낀 감상과 주변 환경의 아름다움, 계절에 따른 동식물의 변화 등 고독을 벗 삼아 자연 속에서 보낸 삶을 상세히 소개한 작품이라 보면 되겠다.

인터넷으로 세계가 연결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사람들마다 최첨단 컴퓨터를 손에 쥐고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나는 자연인이다'나 캠핑, 낚시처럼 자연과 함께하는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면 현재의 문화가 인간의 본성과 상충하는 느낌을 주기는 하는 모양이다.

그런 콘텐츠에 익숙해서인지 저자가 보냈던 자연 속에서의 삶이 그리 오래된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재미있었던 점은 저자가 중간중간 동양 사상, 특히 공자를 종종 인용하고는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깨달음이 노장사상에 훨씬 더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욕심부리지 말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을 찬양하는 아래와 같은 부분에서는 노장사상의 향기가 물씬 느껴졌다.

다시 말해, 원시 시대의 인간은 하늘을 천막 삼아 살았고,

골짜기를 누비고 넓은 평원을 가로지르고 산꼭대기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도구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허기가 지면 열매를 따서 배를 채우던 인간이 이제는 밭 가는 농부가 되었고,

나무 아래 은신처를 마련하고 잠을 청하던 인간이 이제는 집이라는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야외에서 밤을 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지구에 자리를 잡으면서 하늘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pg 63)

간단히 말해, 우리가 소박하고 현명하게 살기로 마음먹는다면 이 땅에서 내 몸 하나 추스르며 사는 것은 고생이 아니라 오락이라고 경험을 통해 굳게 믿고 있는바이다. 소박함을 추구하며 사는 종족에게는 일상적인 일들이 상대적으로 인위적인 생활에 비해 기분 전환을 위한 놀이처럼 느껴질 것이다. (pg 113)

또한 혼자 지내면서 자급자족을 위해 해야 하는 최소한의 노동을 제외하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색과 독서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 활동에 대한 찬미도 빼놓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활동을 중시하기 때문에 가장 많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올바른 독서, 즉 참된 정신으로 참다운 책을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자

현대인들이 높이 평가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 입장에서는 녹록지 않은 운동이다.

이를 위해서는 운동선수가 참고 이겨내야 하는 고된 훈련이 필요하고,

올바른 독서라는 목적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마음가짐을 평생 유지해가야 하기 때문이다.

(pg 165)

나는 최대한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오랫동안 함께 있다 보면 싫증이 나고 지루해지는 법이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지금까지 고독만큼 편한 친구를 만난 적이 없다.

(pg 221)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단순한 삶에 대한 욕구는 더 커지는 것 같다.

도심에 집을 사기 위해 아등바등 살면서 주말만 되면 집을 떠나 자연으로 나가는 역설은 주변에서 너무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자연에 나가서도 계속해서 로그인 상태로 존재해야만 한다면 자연도 큰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저자가 찬미하는 삶은 물론 자연 속에서의 삶이기도 하지만, 욕구와 필요를 단순화한 삶이기도 하기에 사람마다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은 매우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삶이 단순해질수록 우주의 법칙 또한 간결하게 변하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고독은 고독이 아니며,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

나약한 부분도 나약함이 아니게 된다.

(pg 539)

물론 혹자는 저자가 살았던 당시의 세상이 지금과 너무도 달랐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저자 역시 누군가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그런 삶을 살 수 없었다고 폄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살면 된다.

저자의 목소리가 한 줄기 빛처럼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말에 따라 자신의 삶을 조금씩 바꿔가면 될 일일 것이다.

우리의 눈을 비추는 빛은 어둠과 다를 바 없다.

눈을 뜨고 깨어 있어야만 새벽이 찾아온다. 앞으로도 수많은 새벽이 남아 있다.

태양은 아침에 떠오르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

(pg 555)

오래된 작품이라 문체가 요즘 스타일이 아니어서 역자가 갖은 노력을 다 한 흔적이 보이기는 하나, 쉽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다는 점은 꼭 언급하고 싶다.

보기 좋은 일러스트가 포함되어 부담을 덜었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읽는 재미를 주는 텍스트는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에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너무 지치고 복잡하게 느껴진다면 100여 년 전을 살다 간 은둔자의 삶을 한번 들춰보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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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멋대로 급식 뽑기 내 멋대로 뽑기
최은옥 지음, 김무연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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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직장인에게도 점심은 중요한 요소지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라면 그 중요성은 더욱 크다.

단순히 성장기이기 때문에 영양학적으로 균형 잡힌 음식이 중요하다는 이유 외에도 친한 친구들과 먹는 점심은 학교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미 여러 주제로 나온 바 있는 '내 멋대로 뽑기' 시리즈의 최신작이다.

부모부터 산타까지 온갖 것을 다 뽑아왔는데 아이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급식을 이제 뽑는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다.



책은 제목에 충실하게 편식이 심한 아이가 급식을 마음껏 뽑을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다.

처음에 채소 반찬을 잔뜩 남기며 죄책감을 느끼던 아이는 텃밭 가꾸기 활동을 하던 중 영양사 선생님이 마녀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소문에 반신반의했지만 어느 날 급식 시간에 처음 보는 포춘 쿠키 통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하나 뽑게 되는데, 그러자 마법처럼 급식 메뉴가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바뀌게 된다.

(바뀌기 전 메뉴 중 하나가 '오징어치즈떡볶음'인데 이건 나도 무슨 맛일지 상상이 잘되지 않았다;;)

(pg 16-17)

친구들이 좋아하는 메뉴들로 급식을 마구 바꿔버리던 중에 막상 고기보다 샐러드와 같은 야채를 더 좋아하는 친구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해결책을 낸 것이 바로 급식을 뷔페로 바꾸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뷔페를 먹던 친구들은 곧 마녀의 계략에 빠지고 만다.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게 될지, 결말은 스포 방지를 위해 생략하고자 한다.

사실 어릴 때 편식이 없는 아이는 극히 드문 것 같다.

다행히 우리 딸은 과일이나 야채에 대한 편식은 별로 없는 편인데 희한하게도 스파게티나 칼국수, 짜장면처럼 아이들이 좋아할법한 면 요리 중에 싫어하는 것이 꽤 있다.

이런 얘기를 다른 부모들과 함께 나누면 복에 겨운 소리 한다는 말을 듣기 쉽지만, 사실 면을 환장하게 좋아하는 부모 입장에서는 외식할 때 적잖이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음식을 가리는 사람과는 같이 식사를 하기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때가 되면 자연히 고쳐지기도 하지만, 성장기인 어린이들에게는 여러 음식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것이 곧 건강과 직결되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좋은 음식을 섭취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는 좋은 어린이 동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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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만한 세상을 만들 것인가 : 흔들리는 세계의 질서 편 - 시대의 지성, 노엄 촘스키에게 묻다
노암 촘스키.C. J. 폴리크로니우 지음, 최유경 옮김 / 알토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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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언어학자이지만 사회 비판적 시각으로 더 유명한 노엄 촘스키의 대담집이다.

90이 넘은 지금도 활발하고 날카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비친 최근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이번 대담집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기후 위기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그는 이 두 가지 주제가 전혀 별도의 사안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미국이 현재 지구상 유일무이한 강대국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화당이 권력을 잡은 지금, 세계 최강국에서 기후 위기를 해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그가 지적하는 가장 큰 문제다.

지금 당장 창문만 열어 보아도 밖의 열기가 어떤지를 체감할 수 있는 지금, 기후 위기가 남의 일이라는 생각만큼 위험한 생각도 없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국제적으로는 이 위기에 발 벗고 나서는 곳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화석 연료와 군수 산업이라는 탄소 배출에 악영향을 주는 산업들이 호황을 누리게 만듦으로써 이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또한 기후 위기와 같은 인류 공동의 문제에서 사회의 관심을 돌리는 것도 문제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일수록 시민들의 관심과 견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책의 여러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강자들의 손에 쥐어진 도구처럼 그저 수동적인 관찰자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pg 53)

그가 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곧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생명을 이용해 러시아의 국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대리전에 불과하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 등으로 미국 유일의 세계 질서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일단 우크라이나를 이용해 러시아를 무력하게 만든 뒤 (우리를 포함한) 중국 주변국들을 포섭해 중국을 고립시키고자 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푸틴의 무모한 선택으로 인해 유럽이 워싱턴 쪽으로 더욱 가까워지고

있으며, 이는 실현 가능했던 전쟁 회피의 기회를 놓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익의 수혜자는 일반 시민이 아닙니다.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 집단들, 즉 석유 가스 산업, 이에 투자하는 금융기관들,

방위산업체, 농업 분야의 대기업, 그리고 전반적인 경제 시스템을 좌우하는 세력들이

직접적인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급증하는 수익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그 결과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류 사회를 더욱 빠르게 파멸로 이끌 수 있는 '밝은 전망'에 들떠 있는 셈이죠.

(pg 195-196)

하지만 이러한 추세가 더 큰 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일부 국가들이 인류의 문명 자체를 종결시킬 수 있는 화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너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도 위와 같은 우려의 한 이유이기도 하다.

핵 전쟁이 절대 발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에 평화란 곧 자국이 정한 규범 기반 국제 질서를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국가들 역시 제각기 자국 중심의 평화 기준을 내세웁니다.

그리고 세계의 대부분 국가는 그 틈에서 힘센 코끼리들이 밟고 지나가는

풀처럼 존재할 뿐입니다.

(pg 258)

기후라는 크나큰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평화에 기반한 국제적인 협력이 필요한데, 이러한 추세가 그러한 협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사실 여기에는 수많은 권력과 이해관계가 달려있는 만큼 해결이 쉬울 리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과학자들이 새롭게 발표하는 기후 전망이 늘 조금씩 더 어둡고 절망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곧 그의 의견 자체를 거부하는 경향을 만들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의견에 반박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이제 40년을 조금 넘게 살아온 입장에서 볼 때에도 최근의 혹독한 더위와 스콜성 폭우, 참다랑어가 잡히는 바다는 굉장히 낯설게 느껴질 만큼 급격한 변화다.

이 추세라면 우리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한국의 기후는 감히 예상하기도 두려울 정도다.

사실 지금의 위기가 심각하다고 외치는 목소리는 노엄 촘스키 외에도 수없이 많다.

다만 그 목소리들이 권력에 가닿지 않을 뿐이다.

주권을 가진 시민의 한 명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러한 의견들이 권력의 귀에도 흘러들어갈 수 있게끔 이 문제의 심각성에 목소리를 더하는 일일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담은 대담집인데다 주제가 최근의 이슈들이어서 그리 어렵다는 느낌 없이 술술 읽혔다.

그러면서도 인류의 미래와 이를 만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국제적인 협력의 중요성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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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우주에서 우리 만나더라도
마크 구겐하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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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의도치 않게 멀티버스 관련 작품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멀티버스라는 개념이 아직은 온전히 상상 속의 개념인지라 작가마다 그 모습이 다른데, 이번 작품에서는 히어로 영화에서 흔히 보던 형식의 멀티버스가 등장한다.

즉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과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우주들이 존재하고 그 우주들을 오갈 수 있는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작품은 물리학자인 '조너스'의 시각에서 전개된다.

그는 하나의 가설로만 존재하던 멀티버스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는데 성공하면서 노벨상의 영예를 얻는다.

동시에 임신이 불가능할 줄 알았던 아내가 임신에 성공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듣는다.

그렇게 직업적인 성공과 개인적인 행복 모두를 손에 넣은 듯싶었지만, 수상 직후 교통사고로 아내가 세상을 뜨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가 없으면 자신의 삶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그는 자신이 밝혀낸 멀티버스 이론을 실제로 적용하기로 마음먹고 무려 용병까지 고용해서 CERN 입자가속기에 침입, 아내가 살아 있는 우주를 찾아 떠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조너스가 돌아서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언제나 당신을 찾을 거야." 조너스가 말했다.

"아무리 많은 사람 속에서도. 그 어떤 생애라도." 약속이 맹세처럼 느껴졌다.

(pg 111)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작품에 담긴 설정을 더 소개하자면, 일단 작품 속 멀티버스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저자는 이론상 무한대로 존재 가능한 다중우주를 그나마 유한하게 만들기 위해 우주가 일종의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정하고 있다.

즉, 다른 우주가 우리의 우주와 아주 다른 형태를 띤다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사는 우주에서 0.1% 정도 다를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가 수없이 많은 만큼 그 작은 차이로도 어떤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로 인해 특정 국가의 존재 여부도 달라질 수 있으니 큰 차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인류가 발생하지 않거나 인류가 쭉 원시 시대에 머무르는 수준으로까지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또한 히어로물처럼 주인공이 다중우주를 무한대로 왕래할 수는 없다는 제한도 있다.

일단 처음에 입자가속기에서 얻은 에너지로는 이동할 수 있는 횟수에 제한이 있고, 각 우주마다 양자역학의 발달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그 에너지를 마음대로 충전할 수도 없다.

그래서 후반부로 갈수록 더 신중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고, 이 점이 작품의 긴장감을 더한다.

어맨다가 없는 세상은 텅 비었다. 달처럼 황량하고 삭막했다.

위로가 바닷물처럼 밀려들어도, 그의 영혼에 펼쳐진 사막을 적실 수 없었다.

(pg 171)

이런 여러 설정들 덕분에 피상적인 줄거리만 보면 멀티버스를 종횡무진 헤매며 사랑을 찾는 로맨틱한 이야기 같지만, 생각보다 스펙터클하고 긴장감 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당연히 우주가 달라지는 것이기에 새로운 세상에서는 자신의 신분도, 돈도, 아는 사람도, 연락 방식도 모두 없는 것과 같기에 맨손으로 부딪혀야 하며, 끝까지 조너스를 쫓는 열등감 덩어리 빌런도 있어서 끝까지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우리의 삶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다루면서도 지금 우리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녹여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누구나 상실을 겪고 그리움에 힘든 시기가 있다.

그랬던 경험이 있다면, 그러한 상실을 되돌릴 수 있는 우주가 있다면 기꺼이 찾아 떠나고 싶은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알고 있어요." 에바가 말한다.

"상실을 겪고 살아가는 것이 어떤지 알아요. 그 운명이 다른 패를 주었기를 바라며 사는 것.

하지만 상황이 다르기를 바라며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에요."

(pg 270)

개인적으로는 결말이 살짝 아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읽었던 작품 중에서는 손꼽힐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한번 책을 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것 같다.

저자가 시나리오나 게임, 그래픽 노블 등의 스토리를 주로 써왔고 소설은 처음인 것 같은데 첫 작품이 이 정도라니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더운 날씨에 즐겁게 읽을 수 있는 SF 소설을 찾는다면 좋은 선택지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그 세상에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아름대운 예술 작품-희곡, 노래, 회화, 시, 교향곡-을 창조해낼 것이다.

조너스처럼, 선택받은 소수는 기존의 현실 인식에 도전하는 통찰을 내놓을 것이다.

모두가 절묘한 고통을, 잔인한 축복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으로 산다는 의미니까.

그 모든 삶이 하나마다 저마다의 우주다.

(pg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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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미 마인 워프 시리즈 8
배리 B. 롱이어 지음, 박상준 옮김 / 허블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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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구입

그렉 이건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관심 있게 보고 있던 워프 시리즈 중 하나로 1979년에 처음 발표된 작품이다.

발표 당시 SF 소설로 받을 수 있는 상이라는 상은 모조리 석권했었다고 하는 소개가 있어 어떤 내용일지 기대가 되었다.

표지의 그림이 작품을 잘 요약해 내고 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행성 위에 한 남자가 노란색 외계인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이다.

작품은 행성 간 전쟁 수행이 가능한 미래를 배경으로 하며 인간은 '드랙'이라고 하는 외계 종족과 영토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작품은 인간인 '데이비지'와 '드랙'인 '제리바 쉬간'이 서로의 비행선을 격추하는 바람에 외딴 행성에 불시착한 상황에서 시작한다.

당연히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지만, 곧이어 무인 행성인 그곳에서 구조대를 기다리려면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편한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배경이 되는 행성은 다행히 물과 섭취 가능한 생물들이 있지만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며 바람과 파도가 심한 혹독한 환경으로 묘사된다.

드랙인은 외모도 지구인과 다르지만 가장 큰 차이는 그들의 생식 방법이다.

자웅동체라서 때가 되면 타인의 유전자가 없어도 스스로의 분신을 출산할 수 있고, 생애 주기는 인간보다 짧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데이비지는 부상을 입고, 쉬간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서로 더 깊이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쉬간이 출산 중 자신의 아이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목숨을 잃게 된다.

쉬간이 떠나고 그의 아이 '자미스'가 태어나면서 자신의 생존과 한 어린 외계인을 양육해야 했던 데이비지의 삶이 작품의 주요 내용이라 보면 되겠다.

혹독한 외부 환경을 피해 동굴에 숨어있을 때, 서로 할 일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뿐이었던 데이비지는 드랙의 문화를 꽤 깊게 학습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그가 다시 드랙의 문화를 자미스에게 전수할 수 있게 되고, 지구에서 외롭게 성장한 데이비지는 드랙이라는 외계종족과 오히려 정서적으로 더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내 형제가 죽기 전에 자미스를 보았나요?"

"아니요."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궁을 찢고 지마스를 꺼내야 했습니다."

네프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고서 입을 열었다.

"당신 혼자 드랙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었을 텐데요."

아주 잠깐 생각한 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네프 씨. 힘들지 않았어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pg 202)

작품 속 드랙은 자신들의 경전을 항상 지니고 다니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이 경전을 참고하며 극복하려는 의지 강한 종족으로 묘사된다.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작품 속 드랙의 경전에는 그들의 생애 주기가 짧다는 점과 상응하며 내세적이기보단 현세적이고 실용적이다.

"사 아쉬잡 코바흐로 같이 갑시다, 데이비지 씨. 거기 자미스가 있소.

거기 새로운 탈마가 있소. 길이 보인다면 떠나 봐야죠."

(pg 198)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작품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이 최재천 교수가 했던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알면 사랑한다.

외모도 문화도 심지어는 생식 방법도 다른 데다 같은 자원을 놓고 경쟁까지 해야 하는 사이지만,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증오의 벽도 허물 수 있다는 것을 작품은 잘 보여준다.

물론 냉소적으로만 보면 아직까지도 인종, 경제력, 신분, 성별에 따른 차별이 사회에 만연한데 어떻게 외계 종족과의 화해를 꿈꿀 수 있느냐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누적된 교육의 효과이든 우리 자체가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이든 간에 그러한 차별을 없애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고 또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냉전이 아직 남아있던 70년대 후반, 저자는 외계 종족에 빗대어 우리 인간들도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작품으로 풀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언어가 충돌하는 장면이 많아서 데이비지가 하나하나 단어를 배워야 했던 것과 똑같이 단어를 익혀가며 읽어야 해서 진도가 조금 천천히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이 소통 가능해지면서 이러한 점은 자연스럽게 해소가 되고 이어지는 스토리가 재미있기 때문에 초중반 이후로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사실 스토리라인만 보면 예측 가능한 수준 안에서 진행되기는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던 대로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라 읽은 뒤 감상이 꽤 좋았던 것 같다.

세계 우수 SF 작품들을 소개하는 '워프 시리즈'는 2022년에 그렉 이건의 단편집으로 시작했는데 아직 여덟 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작품을 세심하게 골라 소개하는 모양이다.

처음 접하는 작가들의 작품도 일부 있어서 조만간 모두 읽어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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