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미 마인 워프 시리즈 8
배리 B. 롱이어 지음, 박상준 옮김 / 허블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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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렉 이건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관심 있게 보고 있던 워프 시리즈 중 하나로 1979년에 처음 발표된 작품이다.

발표 당시 SF 소설로 받을 수 있는 상이라는 상은 모조리 석권했었다고 하는 소개가 있어 어떤 내용일지 기대가 되었다.

표지의 그림이 작품을 잘 요약해 내고 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행성 위에 한 남자가 노란색 외계인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이다.

작품은 행성 간 전쟁 수행이 가능한 미래를 배경으로 하며 인간은 '드랙'이라고 하는 외계 종족과 영토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작품은 인간인 '데이비지'와 '드랙'인 '제리바 쉬간'이 서로의 비행선을 격추하는 바람에 외딴 행성에 불시착한 상황에서 시작한다.

당연히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지만, 곧이어 무인 행성인 그곳에서 구조대를 기다리려면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편한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배경이 되는 행성은 다행히 물과 섭취 가능한 생물들이 있지만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며 바람과 파도가 심한 혹독한 환경으로 묘사된다.

드랙인은 외모도 지구인과 다르지만 가장 큰 차이는 그들의 생식 방법이다.

자웅동체라서 때가 되면 타인의 유전자가 없어도 스스로의 분신을 출산할 수 있고, 생애 주기는 인간보다 짧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데이비지는 부상을 입고, 쉬간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서로 더 깊이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쉬간이 출산 중 자신의 아이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목숨을 잃게 된다.

쉬간이 떠나고 그의 아이 '자미스'가 태어나면서 자신의 생존과 한 어린 외계인을 양육해야 했던 데이비지의 삶이 작품의 주요 내용이라 보면 되겠다.

혹독한 외부 환경을 피해 동굴에 숨어있을 때, 서로 할 일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뿐이었던 데이비지는 드랙의 문화를 꽤 깊게 학습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그가 다시 드랙의 문화를 자미스에게 전수할 수 있게 되고, 지구에서 외롭게 성장한 데이비지는 드랙이라는 외계종족과 오히려 정서적으로 더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내 형제가 죽기 전에 자미스를 보았나요?"

"아니요."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궁을 찢고 지마스를 꺼내야 했습니다."

네프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고서 입을 열었다.

"당신 혼자 드랙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었을 텐데요."

아주 잠깐 생각한 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네프 씨. 힘들지 않았어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pg 202)

작품 속 드랙은 자신들의 경전을 항상 지니고 다니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이 경전을 참고하며 극복하려는 의지 강한 종족으로 묘사된다.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작품 속 드랙의 경전에는 그들의 생애 주기가 짧다는 점과 상응하며 내세적이기보단 현세적이고 실용적이다.

"사 아쉬잡 코바흐로 같이 갑시다, 데이비지 씨. 거기 자미스가 있소.

거기 새로운 탈마가 있소. 길이 보인다면 떠나 봐야죠."

(pg 198)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작품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이 최재천 교수가 했던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알면 사랑한다.

외모도 문화도 심지어는 생식 방법도 다른 데다 같은 자원을 놓고 경쟁까지 해야 하는 사이지만,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증오의 벽도 허물 수 있다는 것을 작품은 잘 보여준다.

물론 냉소적으로만 보면 아직까지도 인종, 경제력, 신분, 성별에 따른 차별이 사회에 만연한데 어떻게 외계 종족과의 화해를 꿈꿀 수 있느냐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누적된 교육의 효과이든 우리 자체가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이든 간에 그러한 차별을 없애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고 또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냉전이 아직 남아있던 70년대 후반, 저자는 외계 종족에 빗대어 우리 인간들도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작품으로 풀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언어가 충돌하는 장면이 많아서 데이비지가 하나하나 단어를 배워야 했던 것과 똑같이 단어를 익혀가며 읽어야 해서 진도가 조금 천천히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이 소통 가능해지면서 이러한 점은 자연스럽게 해소가 되고 이어지는 스토리가 재미있기 때문에 초중반 이후로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사실 스토리라인만 보면 예측 가능한 수준 안에서 진행되기는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던 대로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라 읽은 뒤 감상이 꽤 좋았던 것 같다.

세계 우수 SF 작품들을 소개하는 '워프 시리즈'는 2022년에 그렉 이건의 단편집으로 시작했는데 아직 여덟 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작품을 세심하게 골라 소개하는 모양이다.

처음 접하는 작가들의 작품도 일부 있어서 조만간 모두 읽어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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